대한민국의 사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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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금척리 고분군 | 부여 군수리 사지 | 경주 장항리 사지 |
대한민국의 사적 제44호 | |
<colbgcolor=#315288> 부여 군수리 사지 扶餘 軍守里 寺址 Temple Site in Gunsu-ri, Buye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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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군수리 79-2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사찰 |
면적 | 34\,391㎡ |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
제작시기 | 백제 |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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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80> 군수리 사지의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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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발굴 당시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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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청남도 부여군에 있는 백제의 절터이다. 1936년 일본인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보물 329호인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과 보물 330호인 '부여 군수리 금동보살입상'이 출토되었다.부여 군수리 사지는 1963년 사적 제44호로 지정됐다.
2. 특징
1935년 전국에 있는 폐사지들 중 최초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발굴조사를 진행한 사람은 일본인 고고학자 이시다 모사쿠(石田茂作 1894-1977)였다.3. 역사
백제 사비시대에 창건된 사찰이다. 기록이 전무하여 정확히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백제시대 이후 절의 유적, 유물은 나오지 않으므로 백제멸망전을 전후하여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조선고적연구회에 의하여 1935년 최초의 발굴조사가 사작되었다.
4. 명칭
문헌기록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사찰이라 그 이름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다못해 정림사지처럼 절의 이름이 새겨진 기와 파편이라도 나온다면 모르겠으나 그런것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때문에 일단 부여군 부여읍 군수리에 위치한다고하여 '군수리 사지' 라고 이름지어졌다.5. 구조
군수리사지의 가람배치
가장 기본적이고 전형적인 백제시대 절의 형식을 따라가고 있다. 남북을 가로지르는 축을 기준으로 중문 - 목탑 - 금당 - 강당이 차례로 배치되는 일탑일금당식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다.
5.1. 금당
남아있는 금당지의 초석
5.2. 목탑
남아있는 목탑지의 초석
6. 유물
6.1.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
자세한 내용은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 문서 참고하십시오.6.2. 부여 군수리 금동보살입상
대한민국의 보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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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 | 부여 군수리 금동보살입상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
대한민국의 보물 제330호 | ||
부여 군수리 금동보살입상 扶餘 軍守里 金銅菩薩立像 Gilt-bronze Standing Bodhisattva from Gunsu-ri, Buye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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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국립부여박물관 |
분류 | 유물 / 불교조각 / 석조 / 불상 | |
수량 | 1구 | |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 |
제작시기 | 백제 | |
위치 |
넓은 얼굴과 풍만한 미소[1]라는 백제불상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는 6세기경의 작품이다. 실제 백제인을 나타낸듯이 화려하게 장식된 관과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돋보인다.
7. 여담
1936년 발굴조사 중 칠지도와 유사한 철제품이 출토된 적이 있다.8. 외부 링크
- 고고학사전: 군수리사지
- 답사여행의 길잡이 4 - 충남: 군수리 절터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부여 군수리사지
- 한국어 위키백과: 부여 군수리 사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부여군수리사지
- 두산백과: 부여 군수리 사지
9. 사적 제44호
부여 군수리에 자리하고 있는 백제의 절터로,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1935년 일본 사람에 의해 조사되었는데, 그 결과 중문·목탑·금당·강당 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1탑 1금당의 구조임이 밝혀졌다. 백제 사찰에서의 1탑 1금당의 가람배치는 이 절터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는데,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을 일직선으로 배치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금당터의 기단은 기와를 쌓아 만든 것이 특징이며, 유물은 절터에서 골고루 출토되었다. 먼저 강당터 남쪽에서 금동관 조각이 나왔고, 금당터 주위와 탑터에서는 약 1,150점의 옥과 금당 서쪽에서는 금동제방울·구두 모양의 금구가 출토되었다. 또한 연꽃무늬·덩굴무늬가 아름답게 조각된 상자 모양의 벽돌과 금제고리·작은 구슬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목탑의 중심부에서는 군수리 금동미륵보살입상·군수리 석조여래좌상과 칠지도·철못·삼족토기를 비롯한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이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칠지도이다. 칠지도는 중심에서 양쪽으로 각각 세가지씩 칼이 뻗어있어 7개의 칼날을 가지고 있는 칼이다. 이와 비슷한 백제 칠지도 하나가 일본에 있어 백제와 일본의 문화교류의 한 단면을 말해주고 있다.
1935년 일본 사람에 의해 조사되었는데, 그 결과 중문·목탑·금당·강당 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1탑 1금당의 구조임이 밝혀졌다. 백제 사찰에서의 1탑 1금당의 가람배치는 이 절터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는데,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을 일직선으로 배치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금당터의 기단은 기와를 쌓아 만든 것이 특징이며, 유물은 절터에서 골고루 출토되었다. 먼저 강당터 남쪽에서 금동관 조각이 나왔고, 금당터 주위와 탑터에서는 약 1,150점의 옥과 금당 서쪽에서는 금동제방울·구두 모양의 금구가 출토되었다. 또한 연꽃무늬·덩굴무늬가 아름답게 조각된 상자 모양의 벽돌과 금제고리·작은 구슬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목탑의 중심부에서는 군수리 금동미륵보살입상·군수리 석조여래좌상과 칠지도·철못·삼족토기를 비롯한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이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칠지도이다. 칠지도는 중심에서 양쪽으로 각각 세가지씩 칼이 뻗어있어 7개의 칼날을 가지고 있는 칼이다. 이와 비슷한 백제 칠지도 하나가 일본에 있어 백제와 일본의 문화교류의 한 단면을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