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우
자세한 내용은 민응식 문서 참고하십시오.2. 조선 후기의 척신
1844년 ~ 1903년 3월 22일친아버지는 민영우(閔泳愚)였으나, 민한준(閔漢俊)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본관은 여흥. 민유중의 차남 민진원의 7대손이다.[1]
임오군란 당시 궁궐에서 도망나온 명성황후를 서울의 집에 숨겨 주었다가, 이후 충주 장호원(長湖院)의 향제(鄕第)로 피신시켰다.
민태호 등과 함께 수구파의 중심이 되어, 위안스카이 세력을 배경으로 개화파 타도에 힘썼다.
1891년 예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방곡령으로 황두 배상 문제가 일어나자 이를 적극 반대하고, 일본의 강압적인 태도를 규탄했다. 갑신정변에 실패한 김옥균이 일본에 망명하자 자객을 밀파, 살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개화파 내각이 성립되자, 전라도 고금도에 유배되었지만 몇 달만인 그해 가을에 석방되어 곧 정계로 복귀했다. 1897년 중추원 일등의관을 비롯하여 1900년 궁내부 특진관, 재궁상자서사관, 경효전 제조, 의정부 찬정같은 관직을 역임했다. 그 뒤에 병으로 관직을 잠깐 물러났다가 1903년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어 재직 중 병사했다.
임오군란의 노고에 대한 은혜로, 사후 고종의 특명에 의해 바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의정대신(議政府議政大臣)에 추증되고, 충문(忠文) 시호가 추서되었다.
자식은 8명이 있었는데, 그 중 아들은 민병승(閔丙承), 민병희(閔丙羲), 민병문(閔丙文)으로 세명이 있었다.
나이는 보시다시피 훨씬 위였지만 민영익, 민영환, 순명효황후에게는 조카뻘이고 명성황후에게는 손자뻘이 되는 친척이었다. 동일 항렬이지만 1번 항목의 인물과는 근 120년 가까이 차이가 난다.
배일파의 한사람으로 다른 민씨 척족들이 좋아라 작위를 받은데 반해 그 아들 민병승은 끝까지 지조를 지켜 유림들의 추앙을 받았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