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02:00:02

비동일성 문제

미래 개인의 역설에서 넘어옴

1. 개요2. 문제
2.1. 주요 직관2.2. 사례
2.2.1. 자원 고갈2.2.2. 노예 아이2.2.3. 14세 소녀2.2.4. 원치 않은 삶2.2.5. 역사적 불의2.2.6.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
3. 주요 해결 시도
3.1. 누구를 어떤 상황에 존재시키든 잘못이 아니다.3.2. 애초에 문제 자체가 잘못됐다.3.3. 인격 영향적 관점의 거부; 다원주의적 관점
3.3.1. 순수 비인격적 관점: 총합 이론, 평균 이론, 임계수준 결과주의3.3.2. 순수 비인격적 다원주의; 급진적 다원주의; 대체적 결과주의
3.4.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지 않았으므로 잘못이다.3.5. 누구든 새로 존재시키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4. 관련 문서5. 외부 링크

1. 개요

비동일성 문제(, non-identity problem)는 현재 세대가 미래 세대에게 지는 도덕적 책임에 관한 생명윤리·환경윤리·인구윤리·세대간 윤리 등 분야의 윤리적 문제 또는 역설을 가리킨다. '미래 개인의 역설(the paradox of future individuals)'로도 통한다. 데렉 파핏(Derek Parfit)이 『이성과 인격(Reasons and Persons)』에서 처음으로 제기했다.[1]

부모가 자식에게 지는 도덕적 의무, 현재 존재하는 사람들이 미래에 태어날 후손에게 지는 도덕적 의무 등 '세대간[2] 정의(intergenerational justice)'와 관련된 윤리학적 탐구를 촉발한 문제이기도 하다. 출산의 정당성 문제와도 직결된다.

본 문서는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의 The Nonidentity Problem 항목(2024-7-19 리비전 이전)을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게 극단적으로 요약한 것에 가까우므로, 형식이나 핵심 문장을 편집할 때 위 항목에서 맥락을 참고한 후 편집하길 권한다.

2. 문제

한 개인을 존재시키는 행위로 인해 그 개인이 어떤 결함을 가지게 된다고 가정했을 때, 그 결함을 피할 수 있는 대안을 선택할 수 있으면서도 그러지 않고 굳이 결함 있는 개인을 존재시키는 행위는 일견 나쁜 것 같다.

그런데 저 대안을 선택하면 결국 아무도 존재시키지 않거나, 동일성(identity)이 다른 더 나은 상황의 개인을 결함 있는 개인 대신 존재시키게 된다. 결함이 강제될 개인을 고려해서 대안을 선택하면, 결함만 피하는 게 아니라 그 개인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결함 있는 개인을 존재시키는 행위가 나쁜 이유는 무엇일까?

2.1. 주요 직관

(ㄱ): 오직 개인의 상황을 악화시키는 행위만이 해악이자 잘못된 행위이다.[3]
(ㄴ): 설령 행위에 어떤 결함이 있더라도, 그 행위 없이는 살아갈 가치가 있는[4] 해당 개인이 존재할 수 없었다면 나쁜 행위가 아니다.
(ㄷ): 비동일성 문제에서 제시하는 사례에서, 해당 개인을 존재하게 유도하는 행위는 분명히 잘못됐다.

위 직관들은 선택적으로 수용 또는 거부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직관을 동시에 수용할 경우, 아래에서 제시되는 사례에서 직관 (ㄱ)·(ㄴ)과 직관 (ㄷ)이 상충하여 딜레마가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 사례의 공통점은 어떤 결함 있는 미래 개인을 존재하게 유도하는 행위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2.2. 사례

2.2.1. 자원 고갈

석유를 비롯한 지구의 여러 천연 자원의 양은 유한하며, 천연 자원을 낭비하고 환경을 파괴하면 미래 세대의 삶의 질은 현 세대보다 하락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따라 미래 세대의 삶의 질이 바뀐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 때 현재 위정자 혹은 유권자에게 가능한 선택지는 아래 두 가지라고 가정해보자.
  • 자원 절약: 휘발유 과세율을 올리는 등 자원 낭비를 억제하고 자연 환경을 보존하려 노력하며 미래 세대를 위해 재생 에너지 등 지속 가능한 발전 연구에 투자한다.
  • 자원 낭비: 휘발유 가격을 인하하는 등 자원 활용을 장려하고 개발을 위해 환경 규제를 철폐하여 현 세대의 향락에 주력한 후 미래 세대에게는 고갈되고 파괴된 자연 환경을 물려준다.
이러한 정책 결정은 사람들의 생활 패턴에 영향을 미쳐 인구를 변화시킬 것이다. 누가 누구와 언제 아이를 얼마나 낳는지 등이 조금씩 달라질 가능성이 높으며, 세대를 거듭할수록 그 차이 또한 커질 것이다. 따라서 '자원 낭비'를 택한 미래에 태어날 후손은 '자원 절약'을 선택했을 때는 애초에 태어나지도 못할 것이다.

직관 (ㄱ)과 (ㄴ)을 받아들이면, 현 세대가 이기적으로 자원을 낭비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나쁜 게 없다. 이대로 자원을 낭비하고 환경을 파괴하면 후손이 궁핍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말이다.

2.2.2. 노예 아이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부부에게 거금을 줄 테니 자신의 노예로 쓸 아이를 낳아 달라고 제안한다고 가정하자. 아이가 태어나 노예가 될 경우, 높은 확률로 상당히 고단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예측된다. 법적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이런 제안에 응하는 것은 대단히 부도덕해 보인다.

하지만 저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노예로 자라고 교육을 받기 때문에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갈 수도 있다. 역사를 보면 더 안 좋은 조건에서 주인의 재산을 낳은 노예 부모도 많았고, 현대에도 극빈국에서는 젖도 잘 안 나올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해서 아이가 굶어 죽을 확률이 높은 걸 알면서도 낳는 부모가 있다. 그에 비하면 부자와 맺은 계약으로 팔아 넘길 아이는 그렇게 굶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가난한 부부가 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이는 태어날 일이 없고 노예로조차 존재할 수 없다.

직관 (ㄱ)과 (ㄴ)에 따르면, 위 부자와 부부는 그들로 인해 태어날 노예 아이에게 해를 끼치거나 잘못한 게 없다. 개인, 집단, 사회에 아이를 노예로 제공하기 위해 아이를 낳는 행동이 딱히 잘못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2.2.3. 14세 소녀

현대 사회에서는 미성년이 출산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그러지 않도록 교육시킨다. 이는 미성숙한 모체의 안전 문제도 있지만, 사춘기를 지난 경우에는 미성년의 경제력 문제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같이 곤란을 겪으며 삶의 시작이 순탄치 않을 아기를 위해서라도 당연히 지양해야 할 일로 여겨진다.

따라서 만약 만 14세 소녀가 당장 아기(A)를 가지겠다고 아무리 우기더라도, 상식적인 어른이라면 아기(A)를 위해서라도 그러지 말라고 소녀를 말리고 성인이 돼서 결혼한 후에 아기(B)를 낳으라고 타이를 것이며, 반대로 저런 철 없는 소녀의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격려하거나 돕는 어른은 이상한 인간이나 범죄자로 취급되고 비난받을 것이다.

그런데 저 소녀가 임신을 성인 이후로 미룰 경우, 설령 삶의 시작 여건이 좋지 않더라도 태어날 수는 있었던 사람 A는 영영 태어날 수 없게 된다. 직관 (ㄱ)과 (ㄴ)에 따르면,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라도 성인이 된 이후에 임신해야 한다는 말은 거짓이 된다는 것이다.

2.2.4. 원치 않은 삶[5]

참고

심한 여드름으로 고생하는 한 여성이 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는다. 그러자 의사는 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여성에게 치료에 필수적인 약제( 이소트레티노인)의 부작용에 대해 경고한다. 이소트레티노인은 태아의 뇌 손상을 유발한다.

만일 여성이 치료제를 복용하는 기간 내에 임신한다면 뇌에 손상을 입은 장애인 A가 태어날 것이다. 반면 완치 후에 치료제 복용을 끝내고 임신한다면 비장애인 B가 태어날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A와 B가 동일인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이다.[6]

보통의 경우 당연히 여성은 A의 뇌 손상이라는 해악을 피하기 위해 임신을 미룰 것이다. 그리고 의사 역시 그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미고지시 비난받거나 소송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치료 부작용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럴 경우 A는 영영 태어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A를 영영 태어나지 않게 하는 결정이 정말 A를 위한 것일까?

직관 (ㄱ)과 (ㄴ)에 따르면, A를 위해서 A를 낳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되며, A가 뇌 손상을 입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임신해서 장애아 A를 낳더라도, 일부러 장애아를 계속 만들더라도 문제가 없다는 부조리한 결론이 도출된다.

2.2.5. 역사적 불의

홀로코스트, 과거 미국의 노예제 등 역사상 잘못으로 여겨지는 수많은 학살과 인권 유린 사례가 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런 부도덕한 사건들이 있었기에 현 세대가 존재할 수 있다. 위와 같은 부도덕한 사건들이 없었다면, 혼인 및 출산 패턴과 인구 구조 등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직관 (ㄱ)과 (ㄴ)에 따르면, 만행을 저지른 당시 가해자들과 가해국은 사실 현재를 살아가는 피해자 후손에게 해를 끼친 것이 없고, 윤리적으로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오히려 위 후손들은 피해자가 아니라 그런 비극 덕분에 비로소 존재하게 된 수혜자라는 것이다.

2.2.6.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출산 강요에 가까운 강압적인 인구정책을 펼첬으며, 수많은 아이들이 원하지 않은 임신 끝에 태어난 뒤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그리고 살아남은 아이들조차 그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빈곤과 범죄의 구렁텅이로 떨어졌다.

만일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폭정이 없었더라면 루마니아의 어린이들은 더욱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에서 살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폭정이 없었다면 대부분의 차우셰스쿠의 아이들은 태어날 수도 없었다. 당시 루마니아의 출생률은 금욕세 및 한 가정 4자녀 정책을 포함한 정책들을 통해 일시적으로나마 두 배 이상 상승했다.

직관 (ㄱ)과 (ㄴ)에 따르면, 차우셰스쿠가 아이들로 하여금 극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나서 고통받도록 사실상 강요한 것은 해를 끼친 것이 아니며, 그러지 않았다면 태어나지 못했을 아이들과 그 후손에게 윤리적으로 잘못한 게 없다는 부조리한 결론이 도출된다.

3. 주요 해결 시도

비동일성 문제는 호혜성의 원리와 암묵적 동의에 기반한 세대 간 계약론 등이 과연 세대간 정의 문제에 대한 올바른 대답인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따라서 현대의 윤리학자들은 정당화가 가능한 윤리 모델을 모색하고 검증 중이다.

3.1. 누구를 어떤 상황에 존재시키든 잘못이 아니다.

'총알을 무는(biting the bullet)'[7], 그냥 눈 딱 감고 받아들이는 선택지. 위에 있는 사례에서 후손과 자녀에게 나쁜 것으로 보이는 선택이 사실은 나쁜 게 아니며 문제 없다고 보는 것이다. 직관 (ㄷ)을 거부한다.

과격하게 말하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 세대는 고려할 만한 도덕적 지위가 없다고 할 수 있고,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불확실한 미래 세대보다는 당장 현 세대가 최대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거나 미래 세대의 입장이라는 것은 결국 현 세대 입장에서 상상한 것에 불과하며, 미래 세대의 입장은 미래 세대가 태어나기 전까지 존재할 수 없다고 보기도 한다. 만약 자식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전체적으로 삶의 질이 낮다면,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에 맞게 최선을 다해 살면 되는 것이다. 삶의 질이 전체적으로 높았던 부모 세대와 비교하고 부모 세대를 탓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태어나면서부터 삶의 질이 낮기 때문에 눈높이도 낮고 주어진 환경에 나름대로 적응해서 살아갈 수도 있다. 그리고 부모 세대가 낳아주지 않는다면 삶의 질을 따질 자식 세대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세대간 윤리(intergenerational ethics) 자체를 무색하게 하는 주장으로 여겨지므로 학계에서 강한 저항을 받는다.

비동일성 문제를 전면적으로 정리하는 첫 학술서를 쓰기도 한 데이빗 부닌(David Boonin)은 절대 다수 개인의 삶은 태어날 가치가 있으며, 가상적인 극소수 사례에서만 형식적으로 태어날 가치를 부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8] 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 손쉬운 미래 세대 생산 정당화와 책임 회피를 위한 신앙 설정에 가깝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고, 검증이 불가능하다는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9]

미래 세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현 세대의 자원 낭비와 환경 파괴로 인해, 미래 세대의 정상적인 삶의 항유 또는 생존 자체가 어려워질 경우[10], 미래 세대는 현 세대를 부양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부양할 여력조차 없을 것이다. 이는 현재까지의 국가 및 사회 체제와 그 윤리적 기반이 붕괴함을 의미한다.

비단 미래 세대 뿐만 아니라, 당장 눈 앞에 없거나, 항의할 능력이 없는 사람 고려해야 한다는 도덕적 직관 역시 무시해도 된다는 주장으로 확장될 위험이 있다. 또한 피해자 개개인을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없는 비개인적 해악 전반에 대한 도덕적 해이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3.2. 애초에 문제 자체가 잘못됐다.

비동일성 문제 자체를 일종의 논리적 실수, 착각으로 취급하여 무효화한다. '미래 세대'를 재정의하거나, 가치 없는 삶이 될 확률 계산에 대해 따지는 등 다소 애매모호한 부분을 이용해 공격하는 식. 이 경우 비동일성 문제가 형식적으로 무마된다.

그러나 비동일성 문제 자체가 오류라는 이 해결 시도는 여전히 직관에 반한다는 문제가 남는다. 또한 다른 해결 시도와 달리 어떤 미래 세대를 만드는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가치론적으로 시비를 가리거나, 윤리적인 행동 지침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11]

특히 이러한 무효화 방식은 세대간 윤리 개념 자체를 부정하거나[12], 나아가 모든 도덕과 윤리는 무의미하고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윤리 허무주의(도덕적 허무주의)로 확장될 위험이 있다.

3.3. 인격 영향적 관점의 거부; 다원주의적 관점

비동일성 문제를 제안한 데렉 파핏 본인의 해법이다.

이 주장을 하는 철학자들은 비동일성 문제를 인격 영향적 관점(직관 ㄱ)에 대한 반례로 받아들인다. 비동일성 문제가 발생하기에 "오직 개인의 상황을 악화시키는 행위만이 해악이자 잘못된 행위"라는 관점은 틀렸다는 것. 이들은 기본적인 결과주의적 틀을 유지하되, 인격영향적 관점에서 벗어나 순수 비인격적(impersonal) 관점 혹은 부분적으로라도 비인격적 관점으로 전환한다.

이 관점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선 개인의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는 어떤 행위가 왜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미래를 더 나쁘게 만들 수 있는지를 해명해야 한다. 일견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접근법은 바로 공리주의를 전제하는 것. 그에 따르면, 설령 그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더라도 개개인 행복의 총합이 결과적으로 줄어들 것으로 보이는 선택지는 윤리적으로 그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복의 총합을 중시하는 접근법은 단순추가역설(mere addition paradox) 또는 당혹스러운 결론(repugnant conclusion)과 같은 비동일성 문제보다 더 어려워 보이는 인구 윤리적 문제를 발생시킨다.

따라서 직관 ㄱ을 거부하는 입장은 1. 개인의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는 어떤 행위가 왜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는지를 해명하면서도, 2. 후술할 다른 인구 윤리적 문제를 발생시키지 말아야하는 난관에 직면한다.

3.3.1. 순수 비인격적 관점: 총합 이론, 평균 이론, 임계수준 결과주의

  • 총합 이론
1980년대에 이르러 비동일성 문제가 널리 인식되었고, 많은 도덕 철학자들에게 그 모순을 피할 방법은 분명해 보였다. 바로 직관 (ㄱ)을 거부하고 비인격적 관점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목표로 삼는 고전적 공리주의(이하, 총합 이론)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특정한 사람을 더 잘 살게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누가 존재하든 상관없이, 존재하거나 존재할 수 있는 사람들의 총집합이 가질 수 있는 총합적 행복 수준을 극대화하는 방법에 집중해야 한다. 위의 사례에서 14세 소녀의 행동이 잘못된 이유는 더 나은 상태의 아이를 낳을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행복의 총량이 상대적으로 낮은 미래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접근방법이 비동일성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겠으나, 이것으로 논의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위 해법을 따르면 단순 추가 역설(mere addition paradox) 또는 당혹스러운 결론(repugnant conclusion)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A 사회와 A+a 사회를 비교해보자. 여기서 A+a 사회는 A 사회와 구성원이 동일한 A 집단과 이보다 삶의 질 평균이 낮은 a 집단이 공존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만약 a 집단이 격오지에서 살아가는 원시 부족이라 A 집단과 무관하게 살아간다면, 우리는 직관적으로 A 사회보다 A+a 사회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이제 A 사회보다는 삶의 질 평균이 낮지만, A+a 사회와 인구가 동일하면서 A+a 사회보다 삶의 질 평균은 높은 B 사회를 떠올려보자. B 사회는 A+a 사회보다 나아 보인다. 그런데 A+a 사회는 A 사회보다 낫다고 했으니 B 사회는 A 사회보다도 낫다고 해야 한다.

좀 더 단순화해서, 모든 구성원이 각각 행복량 100점인 만 명의 사회와, 모든 구성원이 행복량 1점인 천만 명의 사회를 비교해보자. 사회 구성원 개인의 입장에서는 전자가 100배 행복하지만, 사회 전체 행복의 총합은 후자가 10배 크다. 따라서 행복량의 최대화 측면에서 보면, 모두가 상당히 행복한 소규모 사회인 전자보다, 모두가 죽지 못해 살 정도로 아주 약간 행복한 대규모 사회인 후자를 택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위 결론을 현실에 적용한다면, 태어날 미래 세대 개개인이 열악한 삶을 살든, 미래 세대를 기계적으로 생산해야 하는 현 세대 개개인이 불행하든 간에, 그저 죽는 것보다는 살아 있는 게 극도로 미세하게 나은 미래 세대의 머릿수를 무한정 불리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 평균 이론
평균 이론은 총합 이론과 대체로 유사하나, 선택의 기준을 전체 행복의 총합이 아닌 각 개인의 평균 행복(전체 행복의 총합을 전체 인구수로 나눈 값)으로 설정한다는 차이가 있다. 평균 이론은 비동일성 문제와 혐오스러운 결론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잘 대처하지만, 데릭 파핏에 따르면 다음의 추가적 문제가 발생한다.

1.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이 매우 행복하다면, 그보다 덜하지만 충분히 행복한 아이를 낳는 것조차도 불합리하게 금지될 수 있다.

2. 지옥 3(Hell Three) 문제
지옥 1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지옥 1에선 10억명의 사람이 상상도 못할 끔찍한 고통을 겪는다. 이들은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그 누구보다도 불행하며, 기회가 주어진다면 바로 자살할 것이다. 지옥 2엔 10억명의 다른 사람이 존재하는데, 놀랍게도 그들의 상황은 지옥 1보다 더 나쁘다. 지옥 2의 사람들 모두는 지옥 1의 사람보다 더 고통받는다. 지옥 3은 지옥 1과 지옥 2가 둘 다 존재하는 상황을 가정한다.

평균 이론에 따르면, 20억명의 고통받는 사람이 존재하는 지옥 3이 지옥 2보다 낫다. 지옥 2보다는 덜 고통받는 10억명의 비참한 사람들이 추가되면서 행복의 평균은 조금이나마 올라갔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같은 결론은 매우 이상하다. 이미 존재하거나 앞으로 존재할 모든 이에게 지옥 같은 삶을 주는 상황이, 그보다 덜 끔찍하지만 여전히 전혀 살 가치가 없는 삶들을 더 많이 추가하는 방식으로 개선된다고 할 수는 없다.

  • 임계수준 공리주의 (critical level utilitarianism)
총합 이론을 수정하여 적어도 혐오스러운 결론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피하려는 시도로 임계수준 공리주의가 제안되었다(Broome, 2014).

임계수준 공리주의란, 각 개인의 삶의 질을 단순히 총합하거나 평균내는 대신, 삶이 일정한 ‘임계수준(critical level)’을 넘어설 때만 그 삶이 인구 전체의 가치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것으로 보려는 접근법이다. 즉, 임계수준 이상의 삶은 전체 미래 가치에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지만, 임계수준 이하의 삶은 오히려 전체 미래 가치에 음의 영향을 주거나 전혀 기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하지만 임계수준을 도입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Arrhenius가 지적한 “가학적 결론(sadistic conclusion)”이 나타날 수 있다. 다음은 가학적 결론을 이해하기 쉽게 조금 수정한 것이다.

살만할 가치가 있는 수준의 행복을 10이라고 가정해보자. 각 개인은 자신의 행복도가 10 미만이라면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임계수준은 40이라고 치자. 이 때, A 사회는 행복도가 39인 사람 1만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B 사회는 행복도가 11인 사람 9천명과 행복도가 50인 사람 1천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계수준 공리주의에 따르면 A사회의 '임계수준 이하이지만 살만한 삶'은 무가치하게 처리되어 사회 B가 더 높은 가치를 갖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가학적 결론은,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살 가치가 있지만 임계수준을 약간 밑도는 삶을 사는 사회(A)보다, 오히려 극도로 비참한 삶(살 가치가 없는 삶)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 계산상 더 “나은” 것으로 평가되는 사회(B)가 더 낫다고 말하는, 직관적으로 극히 부조리하고 ‘가학적’으로 보이는 결론을 의미한다.

3.3.2. 순수 비인격적 다원주의; 급진적 다원주의; 대체적 결과주의

앞서 소개한 인구윤리적 딜레마에 대응하기 위해, 철학자들은 다양한 전략을 시도해왔다. 그중 하나가 다원주의적 접근법이다. "다원주의"란, 윤리적 판단에서 단 하나의 가치(예: 전체 행복의 극대화)만 고려하지 않고,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가치나 기준을 함께 고려하는 시도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다.

  • 순수 비인격적 다원주의(Purely Impersonal Pluralism)
이 접근법은 여전히 ‘비인격적(impersonal)’인 가치를 핵심으로 삼는다. 앞서 살펴본 순수 비인격적 관점(예: 총합 이론, 평균 이론)에서는 "얼마나 많은 행복이 총합적으로 존재하는가?" 같은 비인격적 가치에만 주목했다. 즉,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더 좋거나 나쁜 영향을 주는지가 아니라, 전체 행복의 양이나 평균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순수 비인격적 다원주의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총합적 행복 극대화뿐 아니라 ‘공정성’, ‘평등’, ‘인간적 번영(human flourishing)’, ‘최소수혜자(가장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같은 다양한 비인격적 가치나 이상(理想)들도 중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미래 인구를 구성할 때 단순히 총합 행복만 볼 것이 아니라, 그 행복이 어떻게 분배되는지(평등), 미래 구성원들의 삶의 질이 얼마나 인간답게 번영하는지(인간적 번영), 최소한의 삶의 기준을 보장하는지(최소수혜자 우선) 등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다양한 가치들을 인정함으로써, 단순한 총합주의나 평균주의가 낳는 문제점(예를 들어 혐오스러운 결론)을 피하려고 시도한다.

이 때 중요한 점은, ‘비인격적’이라는 성격은 유지한다는 것이다. 즉, 여전히 특정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어떤 영향이 가는지를 기준으로 삼는 인격영향적 직관(직관 ㄱ)은 거부하지만, 단순히 “행복 총량”이라는 하나의 가치가 아닌 다양한 비인격적 가치들을 조합해서 판단하는 것이다.

  • 급진적 다원주의(Radical Pluralism)
여기서 더 나아가 “급진적”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이론가들은, 비인격적 가치뿐만 아니라 인격영향적 가치도 다시 고려하자고 제안한다. 즉, 총합적 행복, 인간적 번영 같은 비인격적 가치들뿐 아니라, “특정한 사람에게 나쁜 결과를 직접 초래하지 않는가?”라는 인격영향적 직관도 일정 부분 복원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비동일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인격적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혐오스러운 결론을 피하기 위해 인격영향적 가치를 다시 활용할 수 있다. 결국 이런 입장에서는 여러 가치들이 서로 긴장관계에 놓이게 된다. 어떤 선택이 미래 전반의 행복에는 유리하지만 특정 기존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면, 그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급진적 다원주의자들은 이런 상충하는 가치들 사이를 조화시킬 방법을 모색한다.

예를 들어, 특정 부부가 세 번째 아이를 낳았을 때 전체 행복은 늘어나지만 이미 존재하는 두 자녀에게 큰 부담을 준다면, “전체적으로 좋은 결과(비인격적 가치)”와 “특정인에게 해악을 피하는 것(인격영향적 가치)”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아야 하는 식이다.

파핏 자신은 광의적 이중 인격영향 원칙(Wide Dual Person Affecting Principle)을 제안하였다. 인구윤리 문제에서 인격영향적 직관과 비인격적 관점을 모두 어느 정도 반영하려는 시도다. 이 원칙은, 두 가지 방향에서 ‘더 낫다(better)’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함께 고려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인격영향적 관점: 두 대안적 미래 중 하나가 “각 사람(each person)에게 더 큰 이익을 준다면” 그 미래는 인격영향적 의미에서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즉, 특정한 개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 결과가 각 개인의 복지를 향상시키는가 아닌가를 따지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서는 기존에 존재하는 사람들, 혹은 앞으로 특정하게 존재하게 될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이득’ 또는 ‘손해’가 있는지를 중요하게 본다.

비인격적 관점: 다른 한편으로, “총합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이익을 주는(outcome would together benefit people more)” 결과라면, 비인격적 의미에서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특정한 개인이 누구인지, 기존에 존재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고, 전체적 복지 총합(또는 전체적인 가치)을 최대화하는지에 초점을 둔다.

광의적 이중 인격영향 원칙은 이 두 차원의 ‘더 낫다’를 함께 고려하자는 제안이다. 한 결과가 다른 결과보다 더 낫다고 평가할 때, (1) 그 결과가 각 사람에게 더 이득이 되는지(인격영향적 관점), (2) 그 결과가 전체 사람들을 놓고 보았을 때 합산적으로 더 이득을 주는지(비인격적 관점)의 두 측면을 모두 중요하게 평가해보자는 것이다.

파핏은 이 원칙이 우리가 바라보는 윤리적 판단의 한 부분일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완성된 ‘이론 X(Theory X)’가 되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다만 이 원칙은, 순수하게 인격영향적 직관에만 기대거나, 반대로 순수한 비인격적 가치만 중시하는 극단 사이에서, 더 넓은 관점을 갖도록 유도한다. 즉, 인구윤리 문제를 다룰 때 우리가 어떤 미래가 더 낫다고 판단할 때 단지 한 가지 직관이나 가치만을 고집하지 않고, 인격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과 전체적인 웰빙 향상이라는 두 축을 모두 중요하게 인정하자는 취지다.

  • 대체적 결과주의(Substitutional Consequentialism)
또 다른 제안으로, “대체적 결과주의”란 개념이 제시되어 있다. 이는 간단히 말해 “더 나은 삶을 가진 사람”을 “덜 나은 삶을 가진 사람” 대신 존재하게 만드는 경우에만 우리가 더 많은 사람을 낳거나 더 좋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원칙이다. 즉, 인구를 늘려서 총합 행복을 증가시키려고 할 때, 단순히 아무나 늘리는 것이 아니라, “1대1 교체”를 통해 “더 낫게 살 사람”을 “덜 낫게 살 사람” 대신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무작정 인구를 늘려 ‘혐오스러운 결론’을 유도하는 상황을 피하고, 최소한 비슷한 조건에서 더 나은 대안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

3.4.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지 않았으므로 잘못이다.

후손이 어떤 도덕적 임계점에 도달한, 명백한 결함을 가진 채 태어나지 않을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보거나, 현 세대가 후손에게 취한 태도 등을 문제 삼는다. 이런 생각은 임마누엘 칸트로 대표되는 의무론적 윤리관의 연장선에 있다. 직관 (ㄴ)을 거부하고 직관 (ㄱ)을 약화된 형태로 수용한다.

후손을 존재시킬 때 갖춰야 할 최소 조건이 있다는 위의 접근 방식의 문제점은, 절대적이여야 할 조건의 기준이 사람에 따라 제각각이면서 상충되기 때문에 주장의 대표화가 매우 어렵고[13], 형식적인 것에 그치기 쉽다는 것이다.

또한 당사자인 미래 세대가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각자 어느 정도의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지 정하는 것은 철저하게 현 세대의 일방적 결정이 된다는 계약론적 문제도 지적된다.

특히 태어나도 좋을 존재, 태어나면 나쁜 존재를 선별하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우생학으로 귀결할 수 있고, 자칫하면 전체주의 하에 왜곡되어 나치 독일 T4 작전과 같은 비극이 다시 발생할 위험이 있다.

3.5. 누구든 새로 존재시키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위의 의무론적 관점보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직관 (ㄷ)을 세대 전체에 적용한다. 현재 세대가 후손을 존재시킴으로써 그 후손에게 심각한 해악(고통)을 강제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집단 이기주의에 기반한 도덕적 잘못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떤 출산 기준을 세우든 현재로서는 후손의 심각한 고통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굳이 미래의 희생자를 감수하고 후손을 존재시키는 근거가 그 후손을 위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후손을 존재시키는 행위는 그 자체로는 시혜가 아니며[14], 오히려 해악이 된다. 반대로 후손을 존재시키지 않는 건 그 후손에게 어떠한 해악도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관점에서는 후손을 탄생시키는 행위 자체가 비윤리적인 행위가 되며, 딜레마가 해소된다.

반출생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베나타는 고통과 쾌락의 비대칭성을 지적하며, 동의하지 않은 행복을 주는 것보다 동의하지 않은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논증을 개진한다. 또한 낙천성을 띠는 출생 편향적 직관이 잘못된 이유도 분석하여 제시한다. 상세한 내용은 베나타의 저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존재하게 되는 것의 해악(Better Never to Have Been: The Harm of Coming into Existence)」참고.

다만 일반적인 공리주의자라면 희생을 감수하고 행복의 생성을 우선시할 것이기 때문에 교착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15]

또한 반출생주의는 현 세대가 자발적으로 멸종을 택하여 멸종 직전까지 발생할 고충을 감내해야 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대중적인 호응을 얻기 어렵다.[16] 그렇기 때문에 강압적으로 실현하려는 극단주의자, 사이비 종교가 등장하여 테러리즘의 명분이 될 위험성이 지적된다.[17]

4. 관련 문서

5. 외부 링크


[1] Parfit, Derek. Reasons and persons. OUP Oxford, 1984. [2] intergenerational-의 역어로, 학술 용어로써는 붙여 쓰는 쪽이 띄어 쓰는 쪽보다 약간 더 많이 검색된다. 참고로 '-간'은 의존명사로 쓰일 때는 띄어쓰기가 원칙이나, 합성어일 때는 붙여 쓴다. [3] 이런 관점을 개인(인격) 영향적 또는 개인 기반적 관점(person-affecting or person-based view)이라고 한다. 개인적 원리, 사(私)적인 원리 등으로도 통용된다. [4] worth living. 살아갈 가치가 없는 삶의 존재를 곧장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5] wrongful life. 잘못된 삶, 원치 않은 출생 등으로도 번역된다. 원래라면 장애아로 태어나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의료 과실 등으로 인해 장애아로 탄생한 경우를 의미한다. [6]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더라도 각기 다른 정체성을 지닌다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일란성 쌍둥이도 정체성이 다르며, 복제인간 역시 그럴 것으로 예상된다. [7] 내키진 않지만 피할 도리가 없는 것을 이 악물고 한다는 뜻의 영어 숙어다. [8] 사실상 태어나서 고통만 느끼다 바로 죽는 수준의 삶 정도는 되어야 그가 잠정적으로 제시하는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불운한 아이"는 일단 태어난 후에야 비로소 태어나지 않게 하는 게 나았다고 말할 수 있다. [9] 가난에 시달리다 사고나 범죄에 의해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희생당하거나, 진통제도 듣지 않는 불치병의 고통 때문에 안락사를 갈구하거나, 만성적 우울로 자살하는 사람들 등도 태어나게 할 가치가 있고 그것이 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그냥 믿어야 한다. [10] 현 세대와 미래 세대 간 공유지의 비극, 제로섬 게임 등에 빗댈 수 있다. [11] 가령 어떤 경우에 아이를 낳는 게 잘못인지 전혀, 또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가정한다 한들, 그것이 모든 경우에 아이를 낳아도 문제 없다는 결론으로 곧장 이어지지는 않는다. [12] 비동일성 문제 자체를 사변적으로 부정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수행적 함의가 없으므로, 위 '총알 물기' 시도로 연계되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 윤리적 체리피킹에 해당될 수 있다. [13] 유전병 대물림 문제는 장애인들 간에도 의견이 분분하며 #, 여기에는 근친상간 문제도 포함될 수 있다. 또한 가난 대물림 문제 역시 제시되는 부모 자격 기준이 천차만별이다. [14] 그렇지 않다면 아동 유기 및 방임을 비난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된다. [15] 피터 싱어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존재는 태어날 권리가 없느냐고 반문하며, 이성적인 존재가 없는 세상을 선택하는 것은 잘못된 결정이고, 대부분의 삶이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식의 생각을 두고 베나타가 낙관주의적 환상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본인이 낙관주의자라고 인정한다. [16] 사실 공리주의 역시 미래 세대를 위해 현 세대의 희생을 요구하는 일면이 있으나, 출산을 부정하지는 않으므로 상대적으로 본능적 거부감이 덜하다. 이런 거부감 문제나 결과적으로 아이를 잔뜩 낳는 쪽이 번성하는 문제 등은 반출생주의자들이 기술적 특이점, 트랜스휴머니즘과 같은 보완책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17] 이런 위험성 지적은 사실 소극적 공리주의(부정적 공리주의)에 대한 지적이다. 쾌락의 최대화보다 고통의 최소화를 우선시하는 소극적 공리주의는 결과적 고통 총량을 0으로 만들기 위해 강제적인 불임 수술 등 폭압적인 출산 금지를 옹호할 위험이 있으며, 나아가 인류와 생명의 강제적 절멸, 학살 옹호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반출생주의는 심각한 해악(고통)을 강제하지 않기 위해 되도록이면 출산하지 말자는 것이므로, 폭압적인 출산 금지나 학살에 동조할 수 없다. 그리고 소극적 공리주의는 만약 인류의 절멸에 과정상 인구를 과포화시키는 게 더 효율적이거나 필요하다면, 오히려 출산을 강제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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