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02:40:19

미국 연방대법관

1. 개요2. 현직 연방대법원장 및 연방대법관
2.1. 존 로버츠(John G. Roberts) 대법원장2.2. 클래런스 토머스(Clarence Thomas) 대법관2.3. 새뮤얼 알리토(Samuel A. Alito) 대법관2.4. 소니아 소토마요르(Sonia Sotomayor) 대법관2.5. 엘레나 케이건(Elena Kagan) 대법관2.6. 닐 고서치(Neil M. Gorsuch) 대법관2.7. 브렛 캐버노(Brett M. Kavanaugh) 대법관2.8. 에이미 코니 배럿(Amy C. Barrett) 대법관2.9. 커탄지 브라운 잭슨(Ketanji B. Jackson) 대법관
3. 역대 연방대법원장4. 역대 연방대법관
4.1. 1900년대 이전4.2. 1900년대 ~ 1940년대 중반까지4.3. 1950년대 ~ 1970년대4.4. 1980년대 이후

1. 개요

미국 연방대법원의 연방대법관에 관한 문서.

2. 현직 연방대법원장 및 연방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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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대법원장
존 로버츠
(2005년 임명, 조지 W. 부시 대통령 지명)
연방대법관
클래런스 토머스
(1991년 임명,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지명)
새뮤얼 알리토
(2006년 임명, 조지 W. 부시 대통령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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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임명, 버락 오바마 대통령 지명)
엘레나 케이건
(2010년 임명, 버락 오바마 대통령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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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임명,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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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기준으로 현직 대법관들을 성향으로 분류하면, 보수 성향은 존 로버츠 대법원장을 비롯해, 클래런스 토머스 / 새뮤얼 알리토 / 닐 고서치 / 브렛 캐버노 / 에이미 코니 배럿 이렇게 여섯 명, 진보 성향은 소니아 소토마요르 / 엘레나 케이건 / 커탄지 브라운 잭슨 이렇게 셋이다.

2.1. 존 로버츠(John G. Roberts) 대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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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지명으로 2005년에 임명되었다. 미국의 제17대 연방대법원장이자 2023년 현재 연방대법원장이다. 1955년생([age(1955-01-27)]세)으로 뉴욕 주 출신[1]이다. 꽤나 보수 성향이지만, 현직 대법관들 중에서 원체 보수 성향인 사람들이 많아서 로버츠는 그나마 덜 보수적 성향으로 분류된다. 다른 보수 성향 대법관에 비해서 더 부드럽고 협상에 더 적극적이기도 하다.[2] 조지 W. 부시 행정부 때 임명되었음에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들어 보수 성향 대법관이 대거 임명됨에 따라 진보 성향 대법관들과 의견을 같이 하는 상황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또한, 본인이 잘못 결정된 판례를 뒤집고자 할 때는 확 뒤집기보다는 점진적으로 뒤집어나가는 걸 선호한다.[3] 이전의 판례를 존중하는 stare decisis를 최대한 따르려는 대법관으로, 이게 존중되지 않으면 보통법 체계의 안정성이 깨지게 된다고[4] 청문회에서 밝힌 바 있다. 어떻게 보면 정치적 보수가 아닌 말 그대로 과거 및 전통을 존중하는 보수주의적인 대법관이라고 볼 수 있겠다. 배스킨라빈스에서도 자신이 익숙한 초콜릿 칩 맛 아이스크림만 고수해서 먹을 정도로 자신이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는 걸 불편해했다고 친구가 밝힌 적도 있으니 뭐.(…) 초콜릿을 상당히 좋아한다고 한다. 초콜릿을 담아두는 그릇이 빌 때마다 채워두는 것이 대법원장 비서 임무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본래 은퇴 선언을 한 샌드라 데이 오코너 대법관의 후임자로 지명될 예정되었으나, 청문회 중에 지병인 암을 앓고 있던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원장이 사망한 일이 벌어지면서 대법원장 자리가 공석이 되어버렸다. 이에 대법원장 자리부터 채우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한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로버츠를 대법관 대신 대법원장 임명안으로 바꾼 덕에 현재까지 대법원장이 될 수 있었던 것. 이후 오코너 대법관의 후임은 같은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새뮤얼 알리토인데, 그는 렌퀴스트 대법원장 사후 후임 인사에 하마평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2.2. 클래런스 토머스(Clarence Thomas) 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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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H. W. 부시 대통령의 지명으로 1991년에 임명되었다. 1948년생([age(1948-06-23)]세)으로 조지아 주 출신.[5] 현재 재임 중인 대법관들 중에서 최장수 재임 중인 대법관이자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강경 보수로 평가되는 인물.[6]

대법관 임명 과정 중에 스캔들(어니타 힐 성추문) 때문에 곤혹을 겪어서 꽤나 아슬아슬하게 통과된 대법관으로 남아있다.[7] 현재 대법관 중 유일하게 재판 연구관을 뽑을 때 비교적 하버드, 예일, 스탠퍼드 등 명문대가 아닌 로스쿨 출신들도 많이 뽑는 편이다.[8] 다만, 공화당 대통령이 지명한 판사 밑에서 일한 학생(즉, 보수적인 법 철학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학생들)만 로클럭으로 뽑기로 유명하다.

2.3. 새뮤얼 알리토(Samuel A. Alito) 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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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지명으로 2006년에 임명되었다. 1950년생([age(1950-04-01)]세)으로 뉴저지 주 출신.[9] 대법관 중 가장 강경 보수로 평가되는 인물[10]. 판사로서의 지적 능력은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연방제3항소법원 판사 재직 당시 강한 자(정부 및 경찰)의 편을 적극적으로 들어준 패턴 때문에 청문회 때 문제가 되었다. 또한 성 차별주의자 및 인종 차별주의자들 동문 집단인 Concerned Alumni of Princeton[11]의 멤버였다는 게 밝혀져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 본인은 공화당 정부에 있는 직업에 지원을 했고, 멤버라는 걸 밝히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 당시엔 그렇게 했다고 했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그래서 그런지 역대 네 번째로 많은 반대 표가 나왔다.(58-42)

2.4. 소니아 소토마요르(Sonia Sotomayor) 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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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지명으로 2009년에 임명되었다. 1954년생([age(1954-06-25)]세)으로 본인은 뉴욕 출신[12]이지만 부모님이 푸에르토리코 출신. 적극적 우대조치가 없었다면 자신은 여기에 없었을 거라면서 반드시 필요한 정책이라고 주장한다. 국민투표(referendum)로 적극적 우대조치를 금지시킨 표결을 무효화시켜야 한다고 올라온 소송(Schuette v. BAMN)에서 6:2로 압도적으로 밀렸지만, 강렬한 어조로 반대의견을 벤치에서 읽었다.[13] 인터뷰에 따르면, Schuette 케이스에 썼던 반대 의견은 앞서 피셔 대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Fisher v. University of Texas Austin) 재판 1 라운드에서 쓰기로 한 반대 의견을 여기서 썼다고 한다.[14] 본인에 따르면, 당시 소토마요르의 격렬한 반대 의견을 읽고 분위기가 너무 험악해지겠다 싶다고 생각한 다수파 대법관들이 결국 물러나서 협상한 게 저 결과였다고. 브라이어와 캐스팅 보트인 케네디가 협상을 주도했다고 한다. #

2024년 11월, 미국 대선 및 상하원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의 승리가 점쳐지자, 민주당과 진보진영 일부로부터 사퇴 압박을 받고 있다. 소토마요르 대법관이 70세가 넘는 고령인데다, 지병인 당뇨를 앓고 있어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한 후 자칫 건강에 큰 문제가 생긴다면, 그렇지 않아도 수적 열위에 있는 진보 대법관의 수가 더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트럼프 행정부 1기때, 긴즈버그 대법관의 사망으로 보수진영에 대법관 자리를 하나 내줘 4:5에서 3:6으로 보수 우위가 만들어졌고, 낙태권 등 첨예한 이슈에서 번번이 가로막힌 민주당으로서는, 연방대법관 수성에 필사적이다.

2.5. 엘레나 케이건(Elena Kagan) 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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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지명으로 2010년에 임명되었다. 1960년생([age(1960-04-28)]세)으로 뉴욕 주 뉴욕 출신.[15] 존 로버츠 대법원장과 더불어서 화합을 주도하는 대법관 중 하나라고 한다. 이렇기 때문에 케이건 대법관은 대체로 만장일치인 의견을 집필하곤 한다곤 하고, 다수 의견으로부터 집중을 분산시키거나 다수 의견을 약화시킬 수도 있는 보충 의견을 쓰는 걸 최대한 지양하는 편이기도 하다.

대법관들 중에서 위트 있는 의견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닥터 수스의 우화를 반대의견에 인용하기도 하였으며, 스파이더맨 로열티 관련 소송이었던 킴블 대 마블 엔터프라이즈(Kimble v. Marvel Enterprise) 다수의견에서도 스파이더맨 관련 노래를 인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만화책 덕후로 알려진 케이건의 덕력이 여기서 제대로 터져주었다. # # 다수 의견 원문. 위트에 있어서는 스컬리아 대법관 못지 않다는 평.

또한, 세대 차이 때문에 새로운 기술이나 비디오 게임 등에 덜 익숙한 다른 대법관들과는 달리 이에 대한 이해도 뛰어난 편이기도 하다. 캘리포니아주 비디오 게임 규제법 관련 사건이었던 Brown v. Entertainment Merchant Association 사건에서도 스컬리아 대법관이 " 모탈 컴뱃이 뭥미"하는 동안에 케이건 대법관은 구술변론에서도 이 게임 얘기가 나왔을 적에 문제 없었다고 한다. '내 밑에서 일하는 로클럭 몇 명도 이런 게임 참 좋아한다'고 말해서 구술변론 중 분위기를 가볍게 만든 건 덤.

그리고 취임한 2010년 8월 7일부터 후술할 닐 고서치가 임명된 2017년 4월 29일까지 가장 나이가 적고 서열이 낮은 대법관이었기 때문에, 대법관 9명이서 같은 방을 쓰면서 일할 때 누군가 노크하면, 모두가 막내인 케이건을 쳐다보면서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투표 세는 것, 합의 내용 기록하는 것도 다 케이건 대법관 몫이었다.[16]

대법원 카페테리아에 프로즌 요거트(Frozen yogurt) 기기가 들어온 것도 케이건이 프로즌 요거트 덕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청문회 당시, 상원 의원들과 코미디 쇼(?)를 찍기도 하였다 카더라. 코미디 쇼 내용은 청문회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던 무렵, 상원의원 린지 그레이엄(Lindsay Graham)이 지난 크리스마스에 어디에 있었냐고 물어보았고, 유대인인 그녀는 “아시잖아요, 다른 유대인들처럼 중국집에 있었을 겁니다.” 대답하여 좌중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역시 유대계인 척 슈머 의원이 끼어들어 “다른 데는 연 곳이 없잖아요.”라고 덧붙인 건 덤. 이런 내용이 웃음을 자아낸 이유는 미국계 유대인들이 크리스마스에 중국 음식점을 많이 찾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링크 참조.

2.6. 닐 고서치(Neil M. Gorsuch) 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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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명으로 2017년에 임명되었다. 1967년생([age(1967-08-29)]세)으로 콜로라도 주 덴버 출신.[17] 지명 과정은 상당히 드라마틱했다. 2016년 2월 13일(미 현지 시각)에 앤토닌 스컬리아 대법관이 갑자기 사망하여 대법관 자리에 공석이 생겼다. 당시 임기가 1년 남은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공석을 채우기 위해서 DC항소법원에서 19년간 판사로 재직한 (2013년부터는 최고 판사(Chief Judge)로 재직) 메릭 갈런드(Merrick Brian Garland)[18]를 차기 대법관으로 지명했으나, 공화당이 상원 다수를 장악한 상황에서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인 미치 매코널이 "오바마가 누굴 지명하던 간에 청문회도 없을 것이며, 투표도 없을 것이다. 2016년이 대통령 선거 해이기 때문에 다음 대통령이 뽑도록 해야 됨!"이라고 뻐기면서 무산되었다.[19]

결국 앤토닌 스컬리아 대법관의 빈 자리는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직후 스컬리아의 공석을 채울 연방대법관을 지명하게 되었다. 토머스 하디먼, 닐 고서치, 윌리엄 프라이어 셋 중에서 대통령의 지명은 고서치에게 갔지만, 민주당 상원 의원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공화당은 결국 민주당 필리버스터를 무효화하기 위해 핵 옵션[20]을 동원하면서까지 지명 통과된 비교적 드라마틱한 인준 과정을 거쳤다. 꽤나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대법관이어서 그런지, 민주당에서 반대가 꽤 격렬[21]했다. 찬성 54표[22], 반대 45표로 클래런스 토머스에 이어서 두 번째로 많은 반대 표를 받은 대법관이 되었다. 새뮤얼 얼리토가 세 번째로 많은 반대 표를 받은 대법관으로 내려앉은(?) 건 덤. 그리고 뒤를 이은 브렛 캐버노 대법관이 반대 48표[23]로 토머스 대법관[24]과 동률이 됨에 따라 고서치는 세 번째, 얼리토는 네 번째로 내려앉았다.

다만, 트럼프와 기대와는 무색하게 2020년 6월 보스톡 대 클레이턴 카운티(Bostock v. Clayton County) 사건에서는 존 로버츠 대법원장과 같이 진보 성향의 대법관들의 편에 서서 성 지향성 성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차별 반대에 손을 들어주었다. 또한 선주민 부족들의 자치권 및 독립성(Native American tribal sovereignty)에 대체적으로 적대적인 편인 다른 보수 성향의 대법관과는 달리 일관적으로 선주민 부족의 편을 들어주는 대법관이다.[25] 고서치가 지명되었을 때 고서치의 이념에 상관 없이 선주민 부족들이 지명 지지 의사를 표명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대다수의 대법관이 선주민이 많이 살지 않는 지역[26]에서 일하다가 올라온 반면에 고서치는 콜로라도 주에서 판사를 했기 때문에 선주민들이 연루된 사건을 자주 다룰 기회가 많았던 영향이 컸다. 특히 선주민 부족의 독립성에 관련 사건에서는 반대의견, 보충의견, 다수의견 여부에 상관 없이 선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참상 및 역사를 다루기 때문에 (예: Washington Department of Licensing v. Cougar Den Inc. 사건 보충의견, McGirt v. Oklahoma 사건 다수의견, Oklahoma v. Castro-Huerta 사건 반대의견, Lac du Flambeau Band of Lake Superior Chippewa Indians v. Coughlin 사건 1인 반대의견, Haaland v. Brackeen 사건 보충의견, Arizona v. Navajo Nation 사건 반대의견) 미국 선주민 역사를 공부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된다.

2.7. 브렛 캐버노(Brett M. Kavanaugh) 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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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명으로 2018년에 임명되었다. 1965년생([age(1965-02-12)]세)으로 워싱턴 D.C. 출신.[27] 이 사람 역시 임명 과정이 순탄치많은 않았다. # 청문회 과정에서 조지 W. 부시 정권 시절 이메일 해킹과 관련하여 미 의회 앞에서 위증을 했다는 혐의와 고등학교 시절 집단 성폭행을 했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 #2, 캐버노의 집단 성폭력을 폭로한 여성 3명 모두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고, 목격자도 없었다. 여기에 민주당과 공화당의 제프 플레이크 상원 의원이 요청한 FBI의 조사도 기간과 범위의 한계가 있기는 했지만, 성폭행 증거가 나오지 않았고, 끝내 50:48로 상원의 인준을 받는 데 성공했다.[28] 그러나 인준 이후에는 존 로버츠 대법원장 및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과 함께 온건보수 성향의 대법관으로 평가되며 대법원의 캐스팅보트라는 평가를 받는다.

2.8. 에이미 코니 배럿(Amy C. Barrett) 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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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명으로 2020년에 임명되었다. 1972년생([age(1972-01-28)]세)으로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 출신.[29] 위의 고서치와 캐버노와 함께 트럼프 대통령이 지명한 세 번째 대법관이며, 역시나 임명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발단은 역대 미 연방대법관 중에서 가장 강경한 진보 성향으로 여겨지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2020년 9월 18일 췌장암으로 타계하면서 시작되었다. 문제는 당시가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기간이었고, 긴즈버그 대법관은 손녀에게 전한 유언에서 "대통령 선거 전까지 후임자가 정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밝혔지만, 대통령이 그녀와 대척점에 선 트럼프라는 것! 아무튼 그녀의 별세 소식에 트럼프와 공화당은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며 청문회 절차 진행 및 인준을 강행했다. 2016년 막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대선을 앞두고 메릭 갈런드를 후보자로 지명한 상황이 재현된 셈.[30]

결국 2020년 10월 26일 오후 8시, 에이미 코니 배럿에 대한 인준안이 찬성 52표, 반대 48표로 상원 본회의를 간신히 통과했다. 반대 표를 던진 메인 주 수전 콜린스를 제외한 공화당 상원 의원 52인 전원의 찬성으로 가결.[31] 민주당 상원 의원들은 전원 인준에 반대하였다. 대법관 임명이 야당의 찬성표를 전혀 얻지 못한 채로 인준된 것은 151년 만에 최초다. # 자세한 내용은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변수 문서를 참고했으면 한다.[32]

근본주의 성향의 가톨릭교도로 전통적인 보수주의자이며, 남편(제시 배럿) 역시 검사이다. 7남매 중 장녀이며, 본인도 아이티에서 입양한 아이 2명과 자녀 5명까지 모두 7남매를 키우고 있다. 자녀 중 막내는 다운증후군이었으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출산했다. 전통적인 가부장제적 가정상과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를 지지한다고 알려져 있다. 청문회 중 민주당 상원 의원이 질문한 핵심 사항에는 모두 답변을 피하거나 원론적인 답만 냈다. 단면으로 동성애자, 양성애자의 인권에 대한 질문에 성적향("Sexual Preference")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면서 성적 지향을 부정했다.[33] 반면 공화당 의원들은 찬양 일색이어서 양당의 성향이 극과 극으로 갈라진 상황을 보여주었다.

2.9. 커탄지 브라운 잭슨(Ketanji B. Jackson) 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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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대통령 지명으로 2022년에 임명되었다. 1970년생([age(1970-09-14)]세)으로 워싱턴 D.C. 태생이나 성장기를 마이애미에서 보냈다. 2022년 찬성 53표, 반대 47표로 역대 세 번째로 많은 반대 표로 상원 본회의를 간신히 통과해 임명됐다. 이로써 233년만에 미국의 흑인 여성 대법관이 탄생했다. #

3. 역대 연방대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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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 마셜 ,( 존 애덤스 지명),
    4대 연방대법원장. 역대 연방대법원장 중 가장 높이 평가받는 인물 중 하나. 마버리 대 매디슨(Marbury v Madison) 판례를 통해서 헌법 재판의 권한을 확립해 연방대법원의 위상을 높였기 때문이다.
    재밌는 건 이 사람은 우연히 대법원장에 오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토머스 제퍼슨 민주공화당(반연방파)에게 패한 존 애덤스 대통령은 제퍼슨이 취임하기 전에 반연방파의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기 힘들게 하려고 연방당 출신의 판사를 대법원에 앉히려고 했었다. 존 러틀리지는 상원 대다수가 지지했던 제이 조약을 반대하는 기행[34][35]을 벌여서 상원 눈 밖에 나는 바람에 임명 거부가 되어버렸고, 3대 연방대법원장이었던 올리버 엘즈워스는 건강 문제가 심각했다. 결국 초대 연방대법원장을 맡았었고, 당시 뉴욕 주지사를 지내고 있던 존 제이에게 연방대법원장 자리를 다시 맡아줄 의향이 있냐고 편지를 써서 보냈지만, 제이는 "거긴 할 일도 없는 지루한 자리여서 다신 할 생각 없다."는 내용의 거절 의사를 밝혔다. 이 편지를 존 애덤스 대통령에게 가져간 사람이 바로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존 마셜이었던 것. 애덤스는 편지를 받아보고 잠시 좌절해 있다가 "그럼, 존 마셜 당신을 지명해야 되겠군요."라고 해서 연방대법원장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마버리 대 매디슨 사건을 비롯한 영미법 체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판례들을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34년(1801~1835)에 거쳐서 작성하게 된다.

  • 로저 터니[36] ,( 앤드루 잭슨 지명),
    5대 연방대법원장. 1836년 앤드루 잭슨 대통령에게 임명받은 존 마셜 대법원장의 후임자. 이후 1864년 사망할 때까지 대법원장 직을 지켰다.
    악명 높은 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 판결의 다수 의견을 썼다. 자신은 남북 전쟁의 발발을 막기 위해서 이런 의견을 썼다고는 하지만, 결국엔 이게 남북전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무튼, 이 의견 하나 때문에 터니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법원장하면 무조건 언급된다. 전임자와 후임자의 평판이 매우 크다 남북전쟁 이후 터니의 입지는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전쟁 초기, 존 메리멘이라는 사람이 메릴랜드 주에 살고 있는 친구들에게 연방에서 탈퇴하도록 부추겼다.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메릴랜드와 같은 접경 주(접경 주란 남북전쟁 당시 북부 지역과 남부 지역의 경계에 있던 주로서 메릴랜드주 이외에 델라웨어주, 버지니아주, 웨스트버지니아주, 미주리주 등이 이에 해당한다.)가 연방에 남아 있어야만 전쟁에 이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존 메리멘의 행동을 엄하게 다스리려고 작정했다. 링컨은 연방군에게 메리멘을 체포하여 연방 감옥에 수감토록 하였다. 메리멘은 로저 터니에게 일반인인 자기는 군사 법원이 아닌 민사 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헌법상의 권리가 있음을 인정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터니는 메리멘의 청을 받아들였으나, 링컨은 가볍게 그의 결정을 무시해 버렸다. 로저 터니는 격노하여 민사 재판을 받을 일반인의 권리를 중지할 수 있는 것은 의회만이 할 수 있다고 항의하였으나, 이때는 그 누구도 링컨과 대적할 어느 힘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를 지켜본 한 언론인은 이렇게 썼다. “남북전쟁 동안에 워싱턴에서 대법원장 로저 터니보다 서글픈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1864년 10월 12일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새먼 P. 체이스 (Salmon P. Chase) ,( 에이브러햄 링컨 지명),
    제6대 연방대법원장. 오하이오 주지사, 오하이오의 연방 상원의원, 링컨 행정부의 재무장관, 연방대법원장까지 맡아 본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 야망이 큰 인물로, 그의 동료 정치인 중 한 명은 "그는 좋은 사람이지만 신학적으로 불손하다. 그는 삼위일체에 네 번째 인물이 있는 줄 안다"라고 말하며 그의 자존심을 비꼬았다. 노예해방론자로 자유토지당 창당에 관여했으며, 1860년 대통령 선거 공화당 경선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의 주요 경쟁자였다. 링컨은 재무 관련 경력이 없는 그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하여 공화당 급진파 등 그의 지지층을 포섭했다. 그는 그린백 발행 등으로 남북전쟁 수행을 돕는 등 유능한 재무장관이기도 했으나 여러 번 사임을 요구했고, 링컨은 1864년 이를 받아들이고 로저 터니 사후 연방대법원장으로 임명했다. 체이스는 노예해방론자답게 대법원장이 되자마자 흑인 존 록(John Rock)을 대법원 변호사 협회(Supreme Court Bar)에 받아들여 연방대법원에서 사건을 맡을 수 있게 했다. 앤드루 존슨 대통령 탄핵 당시 대법원장이었으며, 남부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에 대한 반역죄 혐의를 기각하기도 했다. 연방대법원장이 되어서도 대통령직에 대한 야심을 버리지 못해 1868년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려 시도했으나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1872년에는 공화당에서 갈라져 나온 자유공화당(Liberal Republican Party) 창당에 관여하고 대선후보가 되는 것을 노렸지만 역시 실패했다. 1873년 사망했다.

  • 모리슨 웨이트 (Morrison Waite) ,( 율리시스 S. 그랜트 지명),
    7대 연방대법원장. 미국 역사상 가장 덜 알려진 대법원장으로 꼽힌다. 그러나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곳에 있었던 덕분에 엄청난 운으로 대법원장에 임명될 수 있었다고 한다. 율리시스 그랜트 대통령이 북부 포토맥 군을 재회하러 가는데, 탄 기차에서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한 변호사가 모리슨 웨이트였다. 마침 그 기차가 모리슨 웨이트의 고향이었던 오하이오 주를 지나고 있었기에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것. 웨이트는 본인의 고향인 오하이오 주에서는 나름 명성이 있긴 했지만, 2류 변호사 중에서 탑급(...)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후, 그랜트 대통령은 1873년 당시 연방대법원장이던 새먼 P. 체이스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대법원장 자리를 채우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그랜트는 본인이 지명한 후보가 다 하나같이 부패에 연루되어서 지명 철회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이 일이 다섯 번이나 반복되면서 지쳐 있던 그랜트 대통령은 "포토맥 군을 재회하러 갔을 때 내가 탔던 오하이오 주를 가로질렀던 그 기차에서 날 소개했던 그 변호사가 누구냐? 난 그 사람 참 맘에 들었다."라고 말하며 법무장관에게 누구였는지 알아볼 것을 명했고, 그것이 바로 모리슨 웨이트였던 것이다. 다행히 이 지명안은 통과되었다. 대중들의 여론도 '에휴 이제야 끝났네'라며 안도하는 분위기였다고. 이후 그는 1888년 사망할 때까지 14년간 연방대법원장을 지냈다. 역사에서는 잊혀진 대법원장이었지만, 성실하고 부지런했다고 한다. 대법관 건물 내 동쪽 회의실에 있는 웨이트 대법원장의 초상화 한 구석에 조그만 그랜트 대통령 초상화도 있는 걸로 봐서 그랜트 대통령에게 평생 감사했던 듯 하다. 출처1 출처2 그랜트는 그를 1876년 대통령 선거 후보로 지명하려 했으나, 웨이트는 '대법원 자리가 고위직으로 가는 디딤돌 따위가 되어선 안된다'라며 거절하고 끝까지 대법원에 남았다고.

  •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 워런 G. 하딩 지명),
    미국 제10대 연방대법원장이자 미국 제27대 대통령으로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국가 원수(행정부 수반)와 사법부 최고 수반을 모두 지낸 인물이다. 대법원장 일을 하면서 "난, 내가 대통령이었던 시절 기억 못 하겠음."식의 드립도 쳤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

  • 찰스 에번스 휴즈 ,( 허버트 후버 지명),
    1910년부터 1916년까지는 대법관으로 재직했고, 이후 1930년부터 1941년엔 대법원장으로 대법원으로 돌아왔다.
    사실, 1910년에 당시 연방대법원장이던 멜빌 풀러가 사망하면서 공석이 생겨 대법원장을 시켜주겠다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약속했지만, 이 약속을 지키면 당시 47세밖에 안 되었던 휴즈가 오랫동안 대법원장 자리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고, 그렇다면 자기는 영영 연방대법원장이 되지 못할 것을 깨달은 태프트[37]가 말을 바꾸는 바람에 연방대법원장이 되지 못한 채 1916년에 휴즈는 대선에 도전하기 위해 사임[38]하였다. 비교적 고령이었던 민주당 출신 에드워드 더글러스 화이트 대법관을 연방대법원장으로 승진시킨 것도 태프트의 이런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우드로 윌슨의 임기가 끝나고 워런 하딩이 임기를 시작한 지 몇 달 뒤에 딱 맞춰서 화이트 연방대법원장이 사망한(…) 덕분에 태프트는 계획대로(…) 연방대법원장이 될 수 있었다.
    태프트도 완전히 휴즈와 한 약속을 저버렸다고는 하기 어려운 게, 건강상 은퇴를 선언하기 전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허버트 후버에게 자신의 후임자로 휴즈를 지명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보장받기 전까진 은퇴를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39] 태프트, 후버, 휴즈 둘 다 공화당 출신이었기에 이런 요구를 할 수 있었던 것. 태프트의 바람대로 휴즈가 그의 뒤를 이었고, 휴즈는 이후 11년간 연방대법원장에 있으면서 뉴딜 정책 때문에 첨예하게 갈라진 대법원을 리드하게 된다. 친뉴딜 성향의 대법관 삼총사인 "The Three Musketeers"에 포함되진 않았지만, 대체로 이 셋과 뜻을 같이한 편이다. 후술할 윌리엄 렌퀴스트와 더불어 합의를 효율적으로 진행한 연방대법원장 중 하나라고 한다. 여담으로 휴즈의 자리를 이어받은 할런 피스케 스톤이 대법원장이 되었을 땐 3~40분이면 금방 끝나던 합의 과정을 몇 시간씩이나 질질 끌었다고 한다.

  • 얼 워런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지명),
    검사 출신 법조인에 공화당 소속의 진보[40] 정치인이다. 법적 감각은 뒤졌고 자신도 그걸 알고 있었다. 대신 캘리포니아 주 지사로 활동하면서 기른 리더십 스킬로 연방대법원을 이끌었고, 자신의 부족한 법적 감각을 보완해 주었던 브레넌 대법관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받은 덕분에 역사적이고 진보적인 판결을 많이 내릴 수 있었다. 후술되는 내용에 나오는 브레넌 대법관이 "연방대법원장 대행"이라는 별명으로까지 불렸다고 하니 워런이 브레넌에게 얼마나 많이 의지하였는지 알 수 있다.

  • 워런 버거 ,( 리처드 닉슨 지명),
    얼 워런의 후임자였다. 자신의 서열을 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사건의 다수 의견을 컨트롤하기 위해서 투표할 때 자신의 의견을 숨기려 들었고, 나중에 자신의 포지션을 바꿔가면서까지 다수 의견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쓰려고 하는 바람에[41] 다른 대법관들이 대법원장으로서 존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중 "I know it when I see it"으로 유명한 포터 스튜어트 대법관이 버거 대법원장을 특히 싫어했다고 한다. 게다가 합의도 효율적으로 진행하지 못해서 비판받았다. 보수적인 대법원장이 임명되면서 워런 시절의 진보적인 판결을 롤백하겠지 했지만 그것도 딱히 한 건 아니라서 보수 성향에게도 비판받았다.

  • 윌리엄 렌퀴스트 ,( 로널드 레이건 지명),
    제16대 대법원장. 자주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고, 특히 school prayer를 무조건 합헌이라고 판결을 내릴 정도로 강경 보수 성향이었다. 후임자 존 로버츠 대법원장에 의하면 법을 공부하지 않은 시민들도 읽기 쉬운 의견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물론, 상당히 보수적인 성향이었지만, 리더십은 뛰어났던 대법원장이었다. 다수 의견을 컨트롤하고 원하지 않는 케이스는 다른 대법관들에게 넘기며 좋은 케이스만 자기가 가져가는 치사한(…) 행동으로 미움을 산 전임자인 워런 버거와는 전혀 달랐다. 자신이 소수파에 있더라도 자신의 서열을 이용하여 다수파를 컨트롤하려 들지도 않았으며, 집필자 지정에 있어서도 각 대법관이 의견 집필할 기회를 줄 때도 최대한 공평하게[42] 했으며, 합의 때도 모든 대법관이 한 번씩 의견을 말하기 전까진 두 번 이상 말하는 걸 금지할 정도로 공정성에 있어서는 칼 같았다고 한다. 대법관들이 합의할 시간을 너무 짧게 준다고 불평하기도 했지만, 렌퀴스트는 "오랫동안 떠들어 봤자 의견 바꾸지도 않을 게 뻔한데 질질 끌어봤자 무슨 소용임"하며 쿨하게 짤라버렸고, 이로 인해서 합의도 상당히 효율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념적으론 극보수였지만 성격은 꾸밈없으며 느긋하고 부드러웠기 때문에 이념을 넘어서서 다른 대법관들과 잘 어울렸고, 의견 집필 과정에서 한 대법관이 반대하는 대법관에게 지나치게 공격적인 메모[43]를 보낸 걸 알게 되었을 땐 감정 상하지 않게 다독이고 타이르는 등 리더십 하나만은 대법원장들 중 가장 뛰어났다고 봐도 손색이 없다. 구술 변론 때도 변호사에게 불 꺼지면 바로 짤라버리는 등 가차 없었단다. 이런 쪽에서 좀 더 관대한 현 대법원장인 존 로버츠 대법원장과는 대조적이다. 이념적으론 반대 편에 있는 윌리엄 브레넌 대법관은 렌퀴스트를 "자신이 같이 일한 대법원장 중 가장 성공한 대법원장"이라고 평했다. 자신이 성향으로 따지면, 위의 얼 워런 연방대법원장과 더 맞았지만 말이다. 렌퀴스트 본인도 어떤 연방대법원장으로 기억되고 싶냐는 질문에 효과적인 관리자(administrator)로 기억되고 싶다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 렌퀴스트의 대법원장 지명이[44] 통과되었을 때, 이념에 상관 없이 모든 대법관들이 이를 환영한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전임자가 눈엣가시 같은 워런 버거였으니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4. 역대 연방대법관

4.1. 1900년대 이전

  • 조지프 스토리 ,( 제임스 매디슨 지명),
    18대 연방대법관. 만 33세가 되기도 전에 대법관으로 지명을 받아 역대 최연소 연방대법관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45] 주니어 대법관[46]만 11년 7개월로 가장 오랫동안 있었다. 사실 렌퀴스트 대법원장이 사망하지 않았다면[47] 이 기록을 스티븐 브라이어가 갈아치울 수 있었다고 한다. 브라이어는 11년 6개월에서 3일 빠지는 기간을 주니어 대법관으로 지냈는데, 최장 기록과는 29일 차이였다고 한다.

* 존 마셜 할런 ,( 러더퍼드 B. 헤이스 지명),
38대 연방대법관. '분리하되 평등하게'를 내세워 흑백을 분리한 인종 차별 판결을 내린 악명 높은 플레시 대 퍼거슨(Plessy v. Ferguson) 사건에서 유일하게 반대 표를 던져서 '위대한 반대자(The Great Dissenter)라는 별명을 가진 대법관이었다. 입법자의 의도에 충실하게 헌법을 해석해야 한다는 사법 자제론을 주장하면서도 민권에 대한 의견은 진보적이었다. 그의 손자도 연방대법관을 지냈는데, 이름도 존 마셜 할런(John Marshall Harlan)으로 같다.

4.2. 1900년대 ~ 1940년대 중반까지

  • 제임스 맥레이놀즈 ,( 우드로 윌슨 지명),
    59대 연방대법관. 피어스 버틀러, 윌리스 밴데반터, 조지 서덜랜드와 더불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을 반대해 온 대법관 넷을 지칭한 " The Four Horsemen" 중 한 명이다.[48]
    근데 이 양반이 왜 유명하냐면 성격이 개 같고 대놓고 인종차별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성 차별도 대 놓고 했다. 판결문 발표해야 하는데 반대 의견을 태프트에게 제출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사냥 간다고 휴가 가버려서 태프트를 뒷목잡게 만들었으며, 유대인들을 지독하게 싫어했다.[49] 서열 때문에 브랜다이스 옆에 앉아야 함을 깨달았을 때 죽어도 찍지 않겠다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결국 그 해엔 대법관들끼리 사진을 안 찍었다고 한다. 유대계 대법관인 루이스 브랜다이스와 벤저민 카도조와는 일절 얘기도 하지 않았고, 저들이 집필한 의견에 서명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시계 찬 남성들은 여성스럽다고(…) 싫어했고,[50] 흑인 변호사나 여성 변호사가 변론에 나오면 "저기 여성이 있군"하면서 의자 180도 돌려버리는 등 대놓고 혐오했다고 한다. 동료 대법관이 은퇴하면 같이 일해서 즐거웠고, 은퇴 이후도 행복하게 잘 보내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를 전달하는 게 전통이지만, 브랜다이스가 은퇴 선언을 했었을 적에 맥레이놀즈는 그 편지에 자기 이름을 서명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합의실에 있는 금연 사인도 이 양반의 주장 때문에 걸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악명 높은 드레드 스콧 사건의 다수 의견을 썼던 로저 터니 대법원장과 함께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법관하면 반드시 나오는 이름 중 하나이다.

  • 루이스 브랜다이스 ,( 우드로 윌슨 지명),
    60대 연방대법관. '최후의 권력 연방 대법원' 이라는 책에 따르면 브랜다이스 대법관은 1934년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미국 역사상 위대한 판사로 추앙받는다고 한다.
    최초의 유대인 대법관으로 1916년에서 1939년까지 대법관으로 재임했다. 그래서 그런지 유대계 대학교인 브랜다이스 대학교에 이름이 붙었다. 후임은 윌리엄 더글러스. 이미 1900년대 초반에 최저 임금제와 노동 시간 제한을 옹호하는 등 노동법 분야의 선구자였다. 1908년 멀러 대 오리건 주 사건에서 여성노동자의 1일 근로 시간을 10시간으로 제한한 오리건 주법을 지지하였다. 경제적 민주주의자로 대기업의 폐해를 간파하여 노조를 옹호하는 등 '법정의 로빈 후드', '민중의 변호사'로 불렸다. 위대한 반대자들(Great Dissenters) 가운데 한 사람으로 유명한 법 사상가이자 대법원 동료인 올리버 웬들 홈스와 같이 호흡을 맞추었다.
    너새니얼 네이선슨 교수가 재판 연구관으로 처음 맡았던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당시 브랜다이스 대법관이 그에게 일련의 법률 문서를 작성하여 아침 일찍 집으로 가져다 달라고 했다고 한다. 네이선슨 교수는 사전에 부탁 받은 대로, 문을 두드리거나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그냥 문 밑으로 서류를 쓱 밀어 넣었고, 서류는 스르르 빨려들어갔다고 한다.

  • 오언 로버츠 ,( 허버트 후버 지명),
    66대 연방대법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 관련된 사건들이 대법원에 자주 올라오던 시절, 찰스 에번즈 휴즈 대법원장과 함께 중도 성향에 있었던 대법관 중 하나였다. 반 뉴딜 성향의 대법관 넷 "The Four Horsemen"에게 설득당하면서 5-4로 계속 뉴딜 정책이 저지를 당하자 열받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이 "court-packing bill"[51]을 제정하면서까지 뉴딜 정책을 통과시키려 하였다. 이건 민주당 측에서도 너무하다고 생각했는지 의회에서는 둘 다 반대하였다.[52] 오언 로버츠가 뉴딜에 호의적이었던 The Three Musketeers와 휴즈 대법원장 쪽으로 선회한 시기가 저 court-packing bill을 FDR이 밀어붙이던 때와 맞아떨어져서 로버츠가 친 뉴딜 성향로 돌아서기 시작한 최초의 사건이라 여겨지는 West Coast Hotel Co. v. Parrish 사건에서의 로버츠 대법관의 선회는 두고두고 " the switch in time that saved nine"[53]이라고 불리게 된다. 당시 대법원장이었던 휴즈는 FDR의 법안이 전혀 영향이 없었다며 부정하였지만, 1936년 루스벨트 대통령의 압도적인 표차의 재선과 미국인들의 뉴딜 정책에 대한 강력한 지지의 영향은 있었다고 인정하였다. 휴즈 대법원장도 이 둘을 들면서 보수 성향의 러브콜에 화답하곤 했던 로버츠 대법관을 설득시켰고, 이 설득이 처음으로 먹혀 들어간 게 워싱턴 주 여성 근로자 최저 임금법에 대해 합헌 판결을 내린 West Coast Hotel Co 대 Parrish 사건이었던 것이다.

  • 휴고 블랙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지명),
    68대 연방대법관. 원문주의(Textualism, 혹은 문언주의)와 원의주의(Originalism, 혹은 원전주의)을 강조하는 의견을 많이 냈던 대법관. 사실 저 두 사법 철학은 보수 성향 대법관들이 지지하는 이론이다. 그런데 휴고 블랙은 리버럴 성향으로 분리되었다는 건 아이러니. 그래서 일부 학자는 블랙을 원의주의자로 보는 거에 반대하기도 한다.[54]
    정치인이었다. 자수성가한 인생사를 보면 야망이 오죽 컸으면 인맥을 넓히기 위해 KKK의 멤버로 활동했었다.[55] 윌리엄 O. 더글러스 대법관과 함께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이라 믿었던 대법관 중 하나였다.

  • 필릭스 프랭크퍼터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지명),
    70대 연방대법관. 사법소극주의(Judicial restraint)를 강조했던 것으로 유명했던 대법관. 유대인 자수성가의 대표적인 케이스.[56] 연방항소법원 판사로서의 명성은 대단했지만, 대법관으로서의 프랭크퍼터의 레가시에 대해선 분분한 의견이 있는 편. 사법소극주의에 반대한 대법관들을 대놓고 적으로 취급하면서 편 가르기를 해서 적을 많이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합의할 때도 대놓고 사법소극주의에 대해서 45분씩 강연할 때마다 이념적인 대척점에 있었던 워런 대법관장이나 브레넌 대법관 같은 경우는 아예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고도 한다. 이런 접근 방식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본인의 사법철학을 영미법 체계에 제대로 정착시키지 못했다는 것이 중론.

  • 윌리엄 O. 더글러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지명),
    71대 연방대법관. 역대 최장기 재임 연방대법관으로 36년 7개월 재임했다. 1975년 퇴임하지 않고 1980년 죽을때까지 재임했다면 41년 재임했을 것이다. 1939년에 위의 브랜다이스 연방대법관의 뒤를 이었다. 특히, 그는 표현의 자유 이슈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는 쪽으로 표를 던졌다. 인생사를 보면 개천에서 용 난, 존경스러운 자수성가[57] 케이스이기도 하고, 결혼을 네 번이나 한 특이한 인물.[58] 또, 재판 연구관(판사 보좌관)들을 힘들게 했던 대법관이기도 했다. 종종 재판 연구관들에게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59] 그의 밑에서 일하는 게 참 엿 같았다고 한다. 또한, "Trees have standing"이라는 주옥같은 명언을 남긴 대법관도 이 대법관. 직역하면 '나무가 (법정에) 서다'라는 뜻으로, 환경 문제와 연관된 소송에서 나무와 같은 자연물도 소송의 권리가 있는지에 대한 발언이다. 더글라스가 처음부터 만든 말은 아니고, 이 자연물의 소송 권리를 주장한 크리스토퍼 D. 스톤(Christopher D. Stone) 교수의 논문인 'Should Trees Have Standing?'에서 인용한 것이다.
    리타이어 하고도 계속 대법관 일을 하겠다고 땡깡부리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더글러스 밑에서 일하던 비서와 보좌관들을 더글러스의 자리를 이어받은 존 폴 스티븐스 대법관에게 배치시키고 나서야 은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화려한(…) 사생활 때문에 도덕적 문제가 있다면서 상원이 몇 번 탄핵을 시도하였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 로버트 잭슨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지명),
    74대 연방대법관. 프랭크퍼터와 더불어서 사법소극주의를 강조했던 대법관. 휴고 블랙과는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도 미국 측 검사를 맡기도 하였다. 악명 높은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를 합헌 판결 내렸던 코레마츠 대 미국 사건에서 반대 의견을 낸 대법관 중 하나이다.

4.3. 1950년대 ~ 1970년대

  • 윌리엄 브레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지명),
    80대 연방대법관. 진보적인 성향을 지닌 것으로 유명했던 대법관. 소수와 약자를 보호하는 판결을 자주 냈으며, 사형 제도는 위헌이라고 일관적으로 주장해왔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1989년 성조기 훼손을 처벌하도록 한 텍사스주 법령을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 라는 이유로 위헌을 선언한 것이 있다.[60] 1984년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 대회를 반대하는 가두시위에서 그레고리 존슨은 “미국에 침을 뱉는다”는 구호를 외치며 라이터로 성조기에 불을 붙였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외교 정책을 반대하는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텍사스주 경찰은 존슨을 국가 상징물에 대한 모독 행위를 금지하고 있는 주법에 따라 기소했고, 주 법원은 존슨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그러자 존슨은 즉각 항소했으며, 항소 법원은 “국기를 불태운 행위 역시 수정헌법 제1조의 표현의 자유에 의해서 보호된다”며 하급심의 판결을 뒤집었다. 이에 반발한 텍사스주 당국이 상고하면서, 이 사건은 발생 5년 만인 1989년 연방대법원에 올라갔고, 연방대법원은 5 대 4로 존슨의 손을 들어줬다. 다수 의견에 맞선 윌리엄 렌퀴스트 당시 연방대법원장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일본군에 맞서 성조기를 지키려고 싸웠던 전몰군인들을 상기시키며, “미국 국민이 성조기에 대해 느끼는 깊은 경외와 존경심은 국가가 의도적으로 국민들에게 심어준 것이 아니라, 이 나라 200년의 역사가 만든 것이다”라며 “성조기 소각은 미국의 역사와 정신을 훼손한 것이며, 국기에 대한 살인”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국기 소각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헌법의 보호막을 제공하는 것은 국가가 세워진 목적 자체를 위협하는 일”이라고 반대 의견을 냈다.[61] 그러나 5명의 대법관들은 성조기 소각 행위도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이들을 대표해 다수의견을 작성한 윌리엄 브레넌 대법관은 “단지 사회적으로 어떤 사상이 불쾌하거나 무례하다고 판단된다는 이유로 국가가 그런 사상의 표현을 금지할 수 없다는 것이 수정헌법 제1조가 규정하고 있는 기본 정신”이라며 “국기와 관련된 경우라고 해서 예외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라고 반박했다. 그는 “국가 상징물이라고 성조기 훼손을 금지한다면, 대통령 도장이 찍힌 서류나 헌법 사본의 경우는 어떨까?”라고 반문한 뒤, “특정 집단이 그들의 정치적 기호에 따라 상징물을 선택한 후 그 결정 사항을 시민들에게 강요한다면 이런 행위야말로 수정헌법 제1조가 금지하는 행위”라고 역설했다. 그가 판결문을 마무리하며 쓴 마지막 문장은 지금도 손꼽히는 명문으로 회자되고 있다. “성조기 모독 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그 소중한 성조기가 상징하는 자유를 침해하는 행동이다.” 이 판결은 미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미 의회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발끈해 상하 양원 모두 판결에 대한 비난 결의안을 채택했고, 1990년 성조기 훼손을 처벌하는 성조기 보호법을 만들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하지만 연방대법원은 이 법률에도 똑같은 논리로 위헌 판결을[62] 내려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헌법의 가치를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과시했다.
    이념적인 순수성을 위해서 타협을 거부하는 앤토닌 스컬리아나 클래런스 토머스와는 달리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다 얻지 못하더라도 차선책을 위해서 다른 대법관들과 협상을 선호하였다고 한다. 단, 사형 제도에 대해서만은 예외였다. 사형제도 위헌 판결을 뒤집은 그레그 대 조지아(Gregg v. Georgia)를 죽을 때까지 인정하지 않았고, 사형제 관련된 상고가 기각될 때마다 서굿 마셜과 함께 기각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썼다고 한다. 마셜이 쓰고 브레넌이 서명하거나, 또는 그 반대. 하도 성향이 같아서 그런지 일각에선 "브레넌-마셜 대법관(Justice Brennan-Marshall)"이라고 묶어서 불렀다고 한다. 얼 워런이 대법원장과는 죽이 잘 맞았던 대법관으로, 합의 이전에도 어떤 식으로 다른 법관들을 설득할지 미리 만나서 전략도 짜고 했다고 한다. 워런은 자신이 법적 감각에선 브레넌이나 프랭크퍼터에 미치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약점을 커버해 줄 수 있으면서도 성향이 비슷한 브레넌에게 자주 의지한 것. 이래서 워렌이 있는 동안 브레넌의 별명은 "연방대법원장 대행(Deputy Chief Justice)"였다고 한다.

  • 포터 스튜어트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지명),
    루이 말 감독의 1958년작 영화 연인들(Les amants)에 대한 재판 '자코벨리스 대 오하이오주 사건'(Jacobellis v. Ohio)[63]에서 그것이 외설물이 아님을 서술하는 근거 중 한 구절인 I know it when I see it('보면 알 수 있다')으로 유명한 대법관이다. 하드코어(Hardcore) 포르노(pornography)를 정확하게 정의하기가 힘들다는 걸 솔직하게 인정한 구절이다. 재임 기간 내내 중도 성향을 유지했다.
    개인 생활 권리(right to privacy)는 헌법에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의견이어서 피임약 사용을 위법화시킨 코네티컷 주 법을 위헌 판결 내린 사건(Griswold v. Connecticut)에서 반대표를 던졌다. 본인의 임무는 피임약 사용을 금지하는 법이 합리적인 사회적 정책인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위헌이냐 아니냐를 판결하는 것이라며, 위헌이라고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는 논지의 반대 의견을 냈다.

  • 서굿 마셜 ,( 린든 B. 존슨 지명),
    86대 연방대법관이자 미국 최초의 흑인 대법관. 마틴 루터 킹과 더불어 흑인 인권을 높이는데 엄청난 기여를 한 법조인이며 버락 오바마의 롤모델이 되기도 했다. 린든 B. 존슨 대통령과 절친한 관계였는데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진 일화도 여러가지 의미로 대단하다. 자세한 내용은 린든 존슨 문서를 참조. '분리하되 평등하게' 라는 말도 안되는 개념을 내세워 인종 차별을 정당화한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을 깨트리는 사건인 1954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재판 당시 변호인으로 참여해 이를 깨는데 일조했다. 볼티모어 워싱턴 국제공항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 해리 블랙먼 ,( 리처드 닉슨 지명),
    87대 연방대법관. 미국 사회의 영원한 뜨거운 감자인 낙태 허용 판결인 로 대 웨이드 의견을 집필하였다. 대법원에 처음 들어왔을 당시엔 보수 성향인 렌퀴스트 대법원장과 같은 편이었지만(90% 투표 일치율을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진보 성향으로 돌아서게 된다.

  • 존 폴 스티븐스 ,( 제럴드 포드 지명),
    연방대법원에서 세 번째로 오래 재직한 대법관이자 가장 공정한 재판관 중 하나로 이름이 높다. 1947년 연방대법원 재판 연구관으로 일하면서 프레드 빈슨 대법원장과 처음 인연을 맺었고,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75년 12월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지명으로 대법관에 임명되어 35년 6개월간 재임했다. 고령임에도 조지 W. 부시에게 대법관 지명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은퇴를 미루다[64] 버락 오바마가 당선 된 뒤 2010년 6월 90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빈슨, 워런, 버거, 렌퀴스트, 로버츠, 이렇게 5명의 연방대법원장과 함께하며 60여 년간[65] 법조인으로 활동한 현대 미국 사법사의 산 증인이자 역사이다. 미국 사회를 변화시킨 굵직한 사건들의 판결에 얽힌 이야기와 더불어 그들과 함께한 연방대법원 시절의 개인적 경험과 평가를 담아 회고록이 '최후의 권력 연방 대법원'이란 책이다. 행정법 Chevron deference를 창시한 것으로 유명하다.[66]
    중도 보수에서 시작했다가 진보 쪽으로 옮겨간 케이스이다. 법원에 있다 보면 새로운 것들을 배우게 되다보니 자연스럽게 성향이 바뀌게 된다고 하면서, 열린 마음을 거론하기도 하였다. 소수 인종 우대 정책( 적극적 우대조치)에도 반대하는 의견을 내다가 나중에 가서는 찬성 쪽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렌퀴스트, 로버츠 대법원이 보수화하면서 진보 대법관의 지도자로 활약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소수자 인권, 여성의 권리, 실질적 적법 절차상의 자유권, 형사 피의자의 권리 보호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보수적 다수 의견과 대척점에 서서 강한 목소리를 내었다. 많은 사건에서 자신의 소신과 개성이 담긴 소수 의견을 발표하였고, 다수 의견보다 더 논리적이고 짙은 호소력으로 ‘위대한 반대자들’의 계보를 이었다.
    표현의 자유에 관련해서는 대체로 수용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애국심에 관련된 케이스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특이한 스탠스를 가졌던 대법관이기도 하다. 국기 불태우기를 금지하는 법도 제1수정조항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결해왔다.[67] 그리고 연방 정부와 주 정부가 대치되는 상황, 즉, federalism 관련 사건에서는 일관적으로 연방 정부의 편을 들어주었다. 대표적인 예 중 하나가 Gonzales v. Raich 사건으로, 마리화나가 합법인 주에서도 연방법에 위배되므로 연방 정부 측에서 처벌할 수 있다는 다수 의견을 집필하였다. 반대 표는 산드라 데이 오코너 대법관 및 주 권리에 호의적인 입장을 자주 보여왔던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원장과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 이렇게 셋이었다.
    퇴임 이후, 2019년 7월 16일 뇌졸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99세(한국 나이로 100세)에 세상을 떠났다.

4.4. 1980년대 이후

  • 샌드라 데이 오코너 ,( 로널드 레이건 지명),
    미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으로 1981년에 임명된 중도보수 성향의 대법관이었다. 단, 진보적인 판결도 여럿 냈다. 대표적으로 적극적 우대조치가 당시 시점에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었기에, 이를 반대하는 대법관이 여럿 있었음에도 대부분의 재판에서 적극적 우대조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합의 중에도 강경 보수 성향의 앤토닌 스컬리아가 적극적 우대조치를 강하게 비판했을 때도 "니노(앤토닌의 애칭), 적극적 우대조치가 아니었으면 난 여기 없었을 거야"라며 불편한 심기를 표현한 적이 있다고 한다. 물론, 오코너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시한부로서의 적극적 우대조치였다. 2003년에 당시 오코너 대법관은 25년 뒤인 2028년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기를 기대한다며, 결국 근미래에는 적극적 우대조치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었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과 같이 일을 할 때, 1997년 변론에서 저명한 중견 변호사가 둘을 헷갈려서 오코너를 보고 "긴즈버그 대법관님."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법정 정면 판사석에 긴즈버그와 제법 거리를 두고 앉아 있던 오코너는 즉각 속기록 수정을 지시하며 “저분이 긴즈버그 대법관입니다. 나는 오코너 대법관이고요.”라고 응수했다. 대표적인 진보적 판결 대법관인 긴즈버그와 보수적인 판결을 내린 오코너를 구별하지 못했다는 이 일화는 미국 사법부의 남성 우위 전통을 보여준다.
    다른 사례로, 오코너는 취임 후 12년 간 갑자기 볼일이 급할 때 개인 화장실이 있는 집무실까지 뛰어가야 했다. 1935년 지어진 옛 건물인 연방대법원 청사[68]는 원래 여자 화장실이 적은 데다 대법관들이 변론을 위해 법정에 입장하기 전 법복으로 갈아입는 탈의실 부근은 아예 여자 화장실이 없었다. 그러다가 긴즈버그가 들어오면서 비로소 탈의실 곁에도 여자 화장실이 생겨났다. 오코너와 긴즈버그가 힘을 합쳐 “당장 화장실 보수공사를 시작하라”고 당시 대법원장을 압박한 결과였다. 후임에도 보수적인 성향의 대법관이 자신을 잇길 바래서 공화당 대통령이 있을 때 은퇴하고 싶다고 밝혔으며, 본인 자리는 여성 대법관이 물려받길 바란다고 했지만, 결국엔 새뮤얼 얼리토가 이어 받았으며 그녀는 퇴임 이후에도 한동안 법관으로 일하다가 2023년 12월 1일 세상을 떠났다.
    오코너는 1971년 대법관, 1986년 대법원장으로 임용된 렌퀴스트 시대 연방대법원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다. 특히 1993년 긴즈버그, 1994년 브라이어가 지명될 때까지 연방대법관 8명이 모두 공화당 대통령에게 지명되었다. 앤서니 케네디나, 존 폴 스티븐스, 데이비드 수터가 상대적으로 진보적 판결을 내리긴 했지만 결국 최종 스윙보터는 오코너였다. 이런 시각은 국내에 출판 된 '더 나인'에서도 강하게 드러난다.

  • 안토닌 스칼리아 ,( 로널드 레이건 지명),
    연방대법관 중에 클래런스 토머스와 함께 강경 보수로 평가받던 인물. 30년 가까이 재임하면서 대법원 보수 의견의 대들보, 기둥 역할을 해 왔었다. 재판 연구관(판사보좌관, law clerk)을 뽑을 때 학벌을 많이 보는 편으로 알려져 있다.[69] 금태섭 변호사의 말(저서 '디케의 눈'에서 인용)에 따르면, 미국 로스쿨의 최종 보스 격이라고 한다.
    강경 보수 성향이면서도 판결문에서 나오는 논리력이 대단해서 반박하기조차 만만치 않은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2015년 동성결혼 판결 반대 의견이나 킹 대 버웰(King v. Burwell) 사건에서의 반대 의견은 법적 논리력은 없고, 화가 나서 ranting하는 수준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한다. 한 법학 교수도 스컬리아와 저런 의견을 읽고 저게 쿨하다고 생각하면서 저런 스타일을 따라하는 학생들이 걱정된다는 우려를 SCOTUSblog에 표현한 바가 있다. 또한, 2015년 12월 9일에 열린 피셔 대 텍사스대 오스틴 라운드 2 구술변론에서도 흑인들은 좀 랭킹이 낮은(slower-track) 학교에 가는 게 낫지 않겠냐는 식의 발언을 해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2016년 2월 12일 밤 또는 13일 새벽(미국 현지시각)에 급사하였다. 사망 원인은 취침 도중 일어난 심장마비.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누군가 스컬리아를 살해한 것 아니냐는 음모론도 일어나고 있는데[70], 일단, 유가족들은 음모론 자체를 부정하였고, 부검을 원치 않는다고 밝혔다. 미 의회 의원들과 대법관 담당 의사(Attending Physician)인 브라이언 모너핸은 스컬리아는 여러 건강 문제를 안고 있었다고 밝혔다. 비만부터 시작해서 수면무호흡증, 고혈압, 만성 폐쇄성 폐질환(chronic obstructive pulmonary disease), 관상동맥질환(coronary artery disease), 퇴행성 관절염(degenerative joint disease), 당뇨병, 고콜레스테롤혈증(hypercholesterolemia), 위식도 역류 질환(gastroesophageal reflux disease) 등을 안고 있었고, 찢어진 어깨 근육을 수술로 치료하기엔 몸에 무리가 갈 것이라 판단되어 재활하는 수준에서 끝낼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수면무호흡증과 관상동맥질환을 앓고 있는 경우엔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죽을 위험이 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흡연자이기도 하였다. 자세한 기사는 여기서 읽어볼 수 있다(영문)

  • 앤서니 케네디 ,( 로널드 레이건 지명),
    흔히 경제 문제는 보수, 사회 문제는 진보적인 판결을 내린다고 평가받는 이름만 로버츠 코트의 캐스팅 보트. 사실상 실세 2015년 6월, 동성결혼을 미국 전역에서 합법화시키는 판결에서도 역시 캐스팅 보트를 행사.[71]
    중도 보수로 분류되지만, 국제법 참고에 더 적극적인 대법관이어서 보수 성향에게 비판을 받는 대법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역시 보수 성향이었기에 도널드 트럼프 재임기였던 2018년 6월 27일에 전격적으로 연방대법관에서 은퇴하겠다고 발표했다. 후임으로는 상당히 보수 성향이 강한 인물이 내정될 것으로 예상되었고, 7월 9일에 트럼프는 예상대로 보수 성향이 상당히 강한 브렛 캐버노 워싱턴 D.C. 연방 항소법원 판사를 후임으로 지명했다.

  •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빌 클린턴 지명),
    연방대법관 중 강경 진보, 급진적인 좌파로 평가되었던 인물로 특히, 인종 관련 문제와 여성의 권리 관련된 사건에서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진보적으로 투표했다. 또한, 종교와 관련된 사건에서도 정교분리에 힘을 싣는 쪽으로 일관적으로 판결을 내리는 편이였다.[72] 사망하기 전까지 재직 중인 대법관 중에서는 최고령[73]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 중 80대 고령의 나이에 직장암, 췌장암, 늑골 골절, 심장 스텐트 시술 등 건강 문제가 겹쳐 민주당 측에선 오바마 임기 중 퇴임해 새로운 진보 성향의 대법관을 임명하고자 했으나 긴즈버그 대법관은 은퇴하지 않았다. 이후 2018년에 대법원 건물에서 나오다 넘어지고 나서 병원에 입원했고, 퇴원은 했으나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보였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의 난민법 개정을 막기 위해서 긴즈버그 대법관은 병원에서 표를 던졌다는 보도가 나왔고 #, 연방대법원장인 존 로버츠도 행정명령을 통해 난민법을 개정하는 건 위헌이라고 결정하여, 총 5:4로 트럼프 대통령의 난민법 개정을 막았다. 2019년 1월 7일, 작년에 받은 암 수술 후유증으로 대법관으로 임명되고 나서 처음으로 공판에 참여하지 못했다. # 유언으로도 전했듯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내에 자신의 후임자가 지명되는 일을 원하지 않아서 굳은 의지로 암과 싸워 왔지만, 끝내 대선을 한 달 반 정도 앞두고 전이성 췌장암으로 인해 2020년 9월 18일에 향년 87세로 사망했다. 그리고 그 뒤에 벌어진 상황은 위에 상술되다시피 했다.

  • 스티븐 브라이어 ,( 빌 클린턴 지명),
    1938년생([age(1938-08-15)]세)으로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출신.[74] 전반적으로 진보 성향으로 분류되지만, 헌법 수정 조항 4조(불합리한 수색 및 사생활 침해를 금지하는 조항)에 관련된 이슈에서는 오히려 보수파와 뜻을 같이 하기도 했다. 메릴랜드 대 킹(Maryland v. King)에서도 보수 성향 대법관 셋과(로버츠, 토머스, 얼리토) 같이 메릴랜드 주의 편을 들어주었다. 오히려 강경보수인 스컬리아가 나머지 진보 대법관과 함께 반대편에 섰다.[75] 시민들이 민주적인 과정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쪽으로 법을 해석해야 한다는, 소위 "Active Liberty" 철학을 가졌기 때문에 의회가 통과시킨 법을 무효화시키는 판결은 최대한 지양했던 대법관이기도 하다.
    2022년 기준 연방대법관 가운데 최고령인데, 집권당인 민주당이 상·하원에서 모두 다수당이 된 상황에서 은퇴 요구를 받고 있다. 연방대법관직이 종신직임을 감안하면 꽤 이례적인 상황[76]. 결국 현지시각 2022년 1월 27일, 중간선거 전인 2022년 여름에 은퇴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역사적인 로 대 웨이드 판결 폐기까지 반대표를 던진 이후, 현지 시간 2022년 6월 29일자로 은퇴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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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대법원장 지명 당시에는 메릴랜드에 거주하고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따라서 공식 기록에 남는 홈 스테이트(home state)는 메릴랜드. [2] 반면, 클래런스 토머스 현 대법관과 스컬리아 前 대법관은 이념적 순수성을 더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협상을 하지 않으려 든다. 협상을 해서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더라도 차선의 결과를 얻으려 했던 윌리엄 브레넌 대법관과는 대조적이다. [3] 스컬리아는 이걸 보고 가짜 사법소극주의(faux judicial restraint)라고 비꼰 바 있다. [4] "jolt to the legal system"라는 표현을 썼다.(4분 35초 전후에) [5] 대법관 지명 당시에도 조지아에 살았으며, 따라서 홈 스테이트(home state)는 조지아이다. [6] 흑인에 대한 대표적인 편견 중 하나로 인종 차별 반대에 앞장서는 흑인들을 보면서 다른 이슈에서도 매우 진보적일 거라는 생각이 있는데, 인종 차별에 대한 부분을 제외하곤 보수적인 성향의 흑인들도 많다. [7] 52대 48로 지명 통과. 그 다음은 커탄지 잭슨으로, 53대 47로 통과되었다. 그 다음은 닐 고서치 대법관으로, 54 대 45로 통과되었다. 그 다음은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으로 58대 42이다. 이전에는 가장 아슬아슬하게 인준받은 대법관이라 서술되어 있었으나, 이젠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지명한 브렛 캐버노가 역시 성추문 때문 50 대 48로 겨우겨우 통과되었다. [8] 예일 법대를 졸업했지만, "흑인이어서 혜택 받고 졸업했겠지"라는 차별을 받았다. 예일대 로스쿨 졸업장에 담뱃갑에 붙어 있는 15센트 가격표를 붙여 지하실에 쳐 박았을 정도였다고 하니 명문대 외 다양한 학교 출신의 법학도들을 뽑는 이유가 짐작이 간다. 더하여 이 경험 탓에 어퍼머티브 액션에도 대단히 적대적이다. [9] 대법관 지명 당시에도 뉴저지에 살았으며, 따라서 홈 스테이트(home state)는 뉴저지이다. [10] 그의 판결 내용만 보면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 보다도 더 보수적이다. [11] 지금은 해체되었지만, 해체되기 전까진 프린스턴 측에서도 골칫거리로 여겼다고 한다. [12] 대법관 지명 당시에도 뉴욕 주에 살았으며, 따라서 홈 스테이트(home state)는 뉴욕. [13] 적극적 우대조치 반대 표결의 무효화에 찬성한 것은 소토마요로와 긴즈버그 2명뿐이었다. 진보적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알려진 브라이어도 보통 적극적 우대조치에 호의적인 입장이지만, 이건 민중의 뜻이기 때문에 존중되어야 한다는 입장에 섰다. 케이건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송무차관으로 참여한 경력이 있어서 심리에 참여하지 않았다. [14] 피셔 라운드 1은 좀 더 엄밀한(rigorous)한 심사를 적용해서 재심리하라는 의견을 내고 연방항소법원으로 보내는 것으로 일단락지었다. 사실 재심리가 났을 뿐, 피셔 대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의 경우도 본래는 5-3으로 적극적 우대조치 정책이 위헌 판결 났을 거라고 했다. 보수성향 4명+케네디 vs 긴즈버그, 브라이어, 소토마요르의 구도였다. 케이건은 법무차관으로 일한 경력이 있으므로 심리에 참여 불가. [15] 다만 대법관 임명 당시에는 매사추세츠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공식 기록에 남는 홈 스테이트(home state)는 매사추세츠이다. [16] 여담으로, 1994년 8월부터 2006년 1월까지는 브라이어 대법관이 11년이나, 이후 케이건 대법관 임명 전까지는 얼리토 대법관이 막내 노릇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나라나 직장이든 막내가 제일 힘든 건 마찬가지…. [17] 대법관 지명 당시에도 콜로라도에 살았으며, 따라서 홈 스테이트(home state)는 콜로라도. [18] 조 바이든 집권 후 법무장관으로 기용된다. [19] 매코널 원내대표는 4년 뒤 긴즈버그 대법관이 사망하자 정반대 입장을 취하며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5주 전 임명한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을 인준했다 [20] 연방판사 지명 토론을 끝내고 지명 찬반 투표로 넘어가기 위해선 상원의원 100명 중 과반수가 아닌 60명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 2013년 당시 상원 다수당이었던 민주당이 연방 항소법원 판사 지명 통과를 위해서 이걸 썼고, 2017년에는 소수당이 된 민주당의 필리버스터를 씹고 고서치 지명 찬반 투표로 넘어가기 위해서 공화당이 썼다. [21] 찬성표를 던진 의원들은 인디애나 조 도널리, 노스다코타 하이디 하이트캠프, 웨스트버지니아 조 맨친 3명이었다. 이들의 지역구는 공화당 초강세 지역인데다 이 셋은 2018년에 재선이 걸려 있어 유권자의 분노를 사지 않기 위해 찬성표를 던졌다. [22] 존 매케인을 제외한 공화당 의원 51명 전원 및 상술한 민주당 의원 3명. 매케인은 당시 뇌종양 투병 중이었던 탓에 지역구인 애리조나로 내려가 요양 중이었다. 결국 1년이 조금 지난 뒤에 사망. [23] 50-48. 원래는 51-49, 즉 반대 49표였으나, 모종의 이유로 48표가 되었다. 그 이유는 후술할 브렛 캐버노 대법관에 대한 설명 참조. 토머스 대법관은 찬성 52표를 얻어, 찬성률로 따지면 캐버노가 단연 최저. [24] 52-48. 찬성률은 토마스 대법관이 조금 더 높다. [25] 선주민 부족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있어서는 철저하게 일관적이다 보니, 선주민 부족이 연루된 사건에서 5-4이고 선주민 부족이 패소한 판결이 나왔을 때는 고서치 및 진보 성향 대법관 셋(소토마요르, 케이건, 브라운 잭슨)이 같은 편에 서는 경우가 매우 빈번하다. 반대의견 집필 또한 선주민 법과 역사에 제일 정통한 고서치 대법관이 십중팔구 담당하는 편. [26] 대체로 미국 북동부를 관할하는 항소법원에서 일하다가 지명되었기 때문이다. 선주민 권리에 호의적이기로 잘 알려진 소토마요르 대법관도 대법관이 되고 나서 선주민 역사와 법 등을 공부하는데 시간을 많이 할애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27] 다만 대법관 임명 당시에는 메릴랜드에 거주하고 있었고, 따라서 공식 기록에 남는 홈 스테이트(home state)는 메릴랜드. [28] 공화당 상원 의원 51명 중 딸의 결혼식 문제로 불참한 몬태나 스티브 데인스, 기권 표를 던진 알래스카 리사 머카우스키 의원(청문 종료 절차(cloture) 표결에는 반대 표를 던졌다. 본 인준표결에도 반대 표를 던지려 했으나, 전술한 데인스 의원이 불참함에 따라 인준 부결은 막고자 기권 표를 대신 던졌다. cloture 표결은 51-49로 통과되었으며, 머카우스키를 제외한 공화당 50인 전원과 민주당 조 맨친 의원이 찬성하고, 맨친을 뺀 민주당 48인 전원과 머카우스키가 반대했다.)을 제외한 49인에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민주당 맨친 의원(웨스트버지니아는 아주 유명한 공화당의 텃밭이다. 트럼프가 20%p 넘는 큰 격차로 승리한 지역. 우리나라로 치면 TK에서 민주당 인사가 개인기로 당선된 꼴이다. 맨친 의원은 당시 재선이 걸려 있어 친 트럼프 유권자들의 분노를 사지 않기 위해 찬성표를 던졌다. 마찬가지로 공화당 텃밭인 노스다코타의 하이디 하이트캠프 의원도 2018년에 재선이 걸려 있었는데, 캐버노 인준에 반대표를 던진 탓에 결국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그런데 몬태나의 다른 상원의원인 존 테스터는 반대를 던지고도 생환했다.)이 찬성했으며, 맨친을 제외한 민주당 48명 전원은 반대. # #2 [29] 다만 대법관 임명 당시에는 인디애나에 거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식 기록에 남는 홈 스테이트(home state)는 인디애나. [30] 이 과정에서 공화당 미치 매코널 상원 원내대표가 2016년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보여 미국 주요 언론들로부터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31] 초기에 반대 의사를 밝혔던 리사 머카우스키 의원은 결국 찬성으로 돌아섰다. [32] 여담으로 지명을 받았던 당시 백악관 앞에서 거리두기도 무시한 채 화려하게 임명 축하연을 여는 바람에 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진 판정을 받게 되었다. [33] 조 바이든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도 과거에 해당 용어를 사용을 한 적이 있음으로 호모포비아로 단정짓기는 성급하다. 하지만 논란이 계속되자 결국 공식 사과했다. [34] 이게 왜 기행이냐면, 휴회 임명이 되었기 때문에 상원에서 인준을 못 받으면 금방 짤릴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속으로 인종차별은 반대했지만 남부 민주당원의 지지가 필요한 걸 잘 알고 있었던 얼 워런은 정식으로 임명 동의안이 상원을 통과하기 전까진 굳게 함구하고 있었던 것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행보였던 것. [35] 10-14로 부결되었지만, 재미있게도 러틀리지의 연방대법원장 지명안에 지지표를 보낸 건 오히려 민주공화당 출신 상원의원 9명이었다. 러틀리지는 연방당 소속이었지만 연방당 상원 15명 중 딱 1명만이 찬성표를 던졌다. 제이 조약을 반대한 것 때문에 같은 당 소속 상원의원들에게 제대로 찍혀버리고 만 것이다. [36] Roger Brooke Taney. 테이니라고 발음할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발음은 터니라고 한다. [37] 이사람의 평생 소원이 연방대법원장이었다. 대통령은 태프트의 부인이 태프트에게 바라는 것이었다고. 태프트 본인도 자신은 대통령보다는 법관 체질인 걸 알고 있었다. [38] 2021년 현재까지 휴즈는 대통령 선거를 위해서 대법관 자리를 사임한 유일한 대법관으로 남아 있다. [39] 실제로 태프트는 은퇴 한 달 뒤에 사망하였다. [40] 공화당 소속인데 진보적이란 게 의아하겠지만 주지사 시절 보편적 건강보험과 인디언, 아시아 차별 금지를 지지하는 등 진보적인 행보를 보였으며 대법원장이 된 뒤에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재판이라던가 미란다 재판 등에서 진보적인 의견을 상당수 작성했다. [41] 서열에선 대법원장이 무조건 제일 위이기 때문에 자신이 다수에 있으면 집필자 지정권은 대법원장이 갖게 된다. [42] 의견을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대법관이 있을 경우엔 어느 대법관에게도 집필할 권한을 두 번 주지 않았고, 이 원칙도 자기 자신에게 칼같이 적용했다고 한다. 의견 집필하는데 시간을 질질 끌었던 해리 블랙먼 대법관도 렌퀴스트 아래서는 마감 기한에 맞춰서 집필 끝내야 했다고 한다. [43] 보안을 위해서 내부 메일 시스템을 쓴다고 한다. 합의 과정과 의견 집필은 발표 이전까지 철저한 비밀에 부쳐진다. 로클럭이 발표 이전에 의견에 대해 미리 불었다가는 사실상 법 커리어에 종지부를 찍는 수준의 징계가 내려질 정도이다. [44] 대법관으로 있다가 대법원장으로 올라갔다. [45] 21세기 들어 초임 대법관의 연령이 젊어지고 있지만 대개 40대 후반에 지명되는 게 빠른 수준이라 앞으로도 이 기록이 깨지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46] 대법관 중 가장 늦게 들어온 대법관. 합의 때 문 열기, 합의 내용 기록, 투표 기록, 티/커피 준비 등 잡일(…)을 해야 한다. [47] 혹은 얼리토 대법관이 2006년 3월 1일 이후에 대법원에 합류했더라면. [48] 반면, 뉴딜을 합헌 판결 내리려 했던 리버럴한 성향의 대법관 셋(벤저민 카도조, 루이스 브랜다이스, 할런 피스키 스톤)은 " The Three Musketeers"라고 불렸다고 한다. [49] 동료 대법관인 피어스 버틀러와 윌리스 밴데반터 또한 반유대주의자로, 연방대법원에 유대인 너무 많이 임명하지 말라고 대통령에게 서한까지 보내기까지 했다. 단, 이 둘과 맥레이놀즈의 차이는 전자의 경우는 본인들의 반유대주의를 겉으로 나타내려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50]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작전을 짤 때 정확한 시각을 트래킹할 필요가 있어서 군인들도 손목시계를 차기 시작한 걸 계기로 성별 가리지 않고 손목시계를 착용하는 문화가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여성적인 걸로 여겨졌다고. [51] 나이가 많은 대법관 한 명당 대통령이 공석 여부에 상관 없이 대법관을 최대 6명까지 추가 임명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안. 즉, 자신이 임명한 대법관을 더 앉혀서라도 뉴딜 정책을 밀어붙이려고 한 것이다. [52] 사실 이게 통과가 된다면, 공화당과 민주당 양쪽에서 자기 입맛에 맞는 법원을 만들기 위해 멋대로 판사 수를 늘리거나 줄이는 게 허용되는 전례를 만들게 되기 때문에 민주당에서도 이건 너무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53] 미국 격언인 "A stitch in time saves nine"을 살짝 바꾼 말이다. 미리 한 번 꼬매면 나중에 아홉 번 꼬맬 필요가 없다는 맥락의 격언으로 문제가 생기기 전에 미리 막는 게 낫다는 뜻이다. 합헌 여부부터 의심되는 저 법안이 통과되기 전에 딱 맞춰서 친뉴딜 성향의 판결을 내놓았으니 "9명의 대법관을 구한" 스위치라고 보여진 것이다. [54] 실제로 권리장전을 쓰여진 그대로("literal")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블랙을 "엄격한 해석주의(strict constructionist)"라고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보수적 법 해석의 상징인 Originalism과 strict constructionism의 차이는 분명하다. 예를 들어 앤토닌 스컬리아 전 대법관은 자신은 originalist이지 strict constructionist는 아니라고 밝혔었다. 같은 '법에 적혀진 대로', '원래 의도했던 대로'라고 해도 원래 헌법을 애당초 보수적으로 해석하느냐 진보적으로 해석하느냐가 차이라고 볼 수도 있다. [55] 후에, 특히 대법원이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을 다룰 때 이 과거를 정리하느라 고생이 심했다. [56] 공부를 기가 막히게 잘했다. 하버드 로스쿨에서 루이스 브랜다이스 대법관 이후 역대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57] 휘트먼 대학 졸업 후 하버드 로스쿨에 합격했으나 돈이 없었기에 일하면서 다닐 수 있는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로 진학했다. 기차 표를 살 돈이 없어서 워싱턴 주에서 뉴욕까지 기차에서 양들을 돌보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갔다. 뉴욕에 도착해선 동전 몇 개밖에 없어서 프래터니티(대학 친목조직) 형의 집에서 자야 했다. [58] 그러나 그리즈월드 대 코네티컷(Griswold v. Connecticut)에서 그는 결혼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을 강조했다: “Marriage is a coming together for better or for worse, hopefully enduring, and intimate to the degree of being sacred.” [59] 더글러스, 프랭크퍼터, 잭슨, 블랙의 인생을 노아 펠드먼의 Scorpions이 흥미롭게 다룬다. [60] 사건명은 텍사스 대 존슨(Texas v. Johnson) [61]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는 편에 자주 서곤 했던 스티븐스 대법관도 성조기 훼손 처벌 조항에 있어서는 일관적으로 합헌을 주장해 왔다. [62] 해당 사건명은 미국 대 아이크먼(United States v. Eichman). 텍사스 대 존슨 사건과 똑같은 라인업 5-4로 위헌판결이 났다. [63] 대체로 같은 편이었던 워런 대법원장과 브레넌 대법관이 대척점에 있었던 몇 안 되는 사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스튜어트 및 브레넌 대법관을 비롯한 6명의 대법관은 자코벨리스의 편, 워런 대법원장을 비롯한 3명의 대법관은 오하이오주 편을 들었다. [64] 이와 비슷한 이유로 도널드 트럼프에게 대법관 지명권을 주지 않기 위해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은퇴를 미뤘었다. 다만 존 폴 스티븐스는 은퇴 이후에도 정정했을 정도로 건강했기 때문에 스티븐스의 전략이 먹혀들어갔다. 스티븐스 대법관은 90세에 은퇴하고도 9년이나 더 살은 반면에 긴즈버그는 이미 2009년에도 암 수술을 두 번 받았을 정도로 안 좋았다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던 것. 그래서 진보진영으로부터 긴즈버그는 은퇴하라는 압박을 특히 오바마 재임 기간에 많이 받은 반면에 스티븐스는 이 쪽에서는 자유로웠던 편이었다. 긴즈버그는 결국 트럼프의 임기가 끝나기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나서 트럼프에게 지명권을 주어버려 가뜩이나 보수적인 연방대법원이 더 보수화가 되는 일을 낳고 말았다. 2022년 6월에 결국 로 대 웨이드 판결이 폐기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되자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거에는 긴즈버그 대법관에게 책임이 있다는 이 나올 정도였다. [65] 이 중 연방대법관으로서 같이 일한 대법원장은 버거, 렌퀴스트, 로버츠 이렇게 셋이다. 60년 중 연방대법관으로 일한 기간은 1975년부터 2010년까지 35년간이다. [66] 정작 본인은 당시에 Chevron이 그렇게 큰 획을 그을 줄은 전혀 몰랐다고 하버드 로스쿨에 방문했을 때 말했었다. [67] 텍사스 대 존슨 사건 구술변론에서도 존슨 측의 변호사가 나왔을 때도 화가 나는 걸 숨기기 힘들어했다고 한다. 본인이 2차 세계대전 베테랑이었던 경험이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 있다. [68] 미국 연방대법원 문서 맨 위의 사진이 연방대법원 청사이다. 청사 건물과 관련해서는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문서의 2.3.번째 문단을 참조. [69] 그는 아주 솔직하게 학벌을 중시한다고 말했다: "By and large, I’m going to be picking from the law schools that basically are the hardest to get into. They admit the best and the brightest, and they may not teach very well, but you can’t make a sow’s ear out of a silk purse. If they come in the best and the brightest, they’re probably going to leave the best and the brightest, OK?” 그러나, 사실 학벌은 대법관이 되기 전, 하버드 로스쿨 학장이었던 엘레나 케이건 대법관이 제일 많이 보는 것 같다. 재임 후 2015년까지 케이건이 임용한 24명의 재판 연구관 중 1명 빼고 모두 하버드, 예일 혹은 스탠포드 로스쿨 출신이었다. 옛날에 호러스 그레이 대법관과 올리버 웬들 홈스 대법관은 오로지 하버드 로스쿨 출신만 재판 연구관으로 선발했었다. [70] 대체로 드러지 리포트 같은 보수언론에서 나오는 말이다. [71] 케네디가 작성한 판결문의 마지막 문단은 요즈음 미국에서 결혼 서약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고 한다. #[77] [72] 이러한 이유로 일부 종교 관련 사건에서는 진보 성향 내에서도 긴즈버그&소토마요르 vs 브라이어&케이건의 구도가 형성되기도 했다. 그 예가 Trinity Lutheran Church v. Comer 사건과 American Legion v. American Humanist Association 사건이다. [73] 물론 실질적인 최고령자는 위에 나온 존 폴 스티븐스 대법관. 90세에 은퇴했으니 말이다. [74] 다만 대법관 임명 당시에는 매사추세츠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공식 기록에 남는 홈 스테이트(home state)는 매사추세츠이다. [75] 다수: 케네디, 로버츠, 토머스, 브라이어, 얼리토. 반대: 스컬리아, 긴즈버그, 소토마요르, 케이건. 굵은 글씨로 쓰여진 대법관은 의견 집필자이다. 수정 4조 관련 사건에서는 로버츠 대법원장-브라이어 대법관-얼리토 대법관 콤보(+ 가끔씩 토머스나 케네디가 끼기도 한다)가 심심찮게 보이는 편이다. [76] 긴즈버그가 은퇴하지 않고 사망하여 결국 트럼프에게 임명권이 넘어갔던 영향이 크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