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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문덕홍(文德鴻, 文德弘) |
본관 | 남평 문씨[1] |
출생 | 1902년 9월 19일 |
전라남도
제주목 구우면 옹포리 (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옹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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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9년 5월 12일 |
부산광역시 영도구 영선동 | |
묘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2] 선영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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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문덕홍은 1902년 9월 19일 전라남도 제주목 구우면(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옹포리에서 아버지 문창인(文昌仁)과 어머니 박씨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939년 일본 선박의 선원으로 강제 징용되어 상하이와 홍콩 등지에서 일했다. 그러다가 1940년 선박이 상하이로 입항한 틈을 타 탈출에 성공하고 충칭으로 가서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했다. 이후 그는 1940년 9월 중국 광시성에서 유림 전투, 계림 전투에 참가해 일본군 1개 여단과 교전했고, 부대장으로 승진했다.
1941년 2월, 문덕홍은 카이펑에 침투해 3개월간 비밀 지하공작을 수행해 일본군에 소속되어 있던 조선인 통역관을 포섭했다. 그리고 1942년 10월 충칭에서 임시정부 경비대원에 임명되었으며, 1943년 10월 2일에는 임시의정원 전라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한국독립당에 입당했고 1944년 임시정부 재무부 총무과 직원으로 근무했으며, 같은 해 6월 서무국 임무를 겸임했다.
1945년 초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의 경호실장으로 발탁된 문덕홍은 국내공작위원회에 가담해 비밀공작을 위해 국내로 파견되었다. 그는 임시정부를 떠나기 직전 김구와 함께 태극기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김구는 그 사진에 '임별(臨別) 민국(民國) 27년 5월 9일 중경(重慶)에서'라고 적은 뒤 그에게 건넸다. 그는 국내로 잠입한 뒤 제주도와 부산 등지에서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해 일본군의 군사 시설과 동향을 조사, 탐지해 임시정부에 보고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연합군이 국내로 들어왔을 때 이에 호응할 청년들을 조직하는 임무를 병행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초 부산에서 체포된 그는 구치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다가 8.15 광복 직후 가까스로 석방되었다. 이후 부산에서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던 그는 1949년 5월 12일 부산 영선동에서 사망했다. 향년 47세. 그의 유해는 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문덕홍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