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함대 계획 | |||
전함 戦艦 | |||
나가토급 長門型 | 카가급 加賀型 | ||
나가토 長門 | 무츠 陸奥 | 카가 加賀 | 토사 土佐 |
키이급 紀伊型 | |||
|
|
|
|
순양전함 巡洋戦艦 | |||
아마기급 天城型 | |||
아마기 天城 | 아카기 赤城 | 타카오 高雄 | 아타고 愛宕' |
13호급 十三号型 | |||
|
|||
※ 밑줄: 항공모함으로 개장, 기울임: 건조/개장 도중 해체, |
나가토급 전함 | |
나가토 | 무츠 |
[clearfix]
長門と陸奥は日本の誇り(나가토와 무츠는 일본의 자랑)
1. 개요
나가토급 전함 2번함으로 명칭 유래는 무츠 문서의 1번.2. 논란 속의 출생
무츠가 건조될 당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당연히 영미 측에서는 무츠를 폐기하라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조약 기본 조건이 아직 건조 중인 전함 및 신규 건조 계획의 폐기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당시 막 완성된 나가토와 메릴랜드는 해당 사항이 없었으나 그 외에는 모두 폐기하거나 다른 함선(대부분 항공모함)으로 용도를 변경해야 했다. 그래서 당시 조약에 따라서 16인치(406mm)포를 장착한 전함은 전 세계에 딱 2척인 일본의 나가토와 미국의 콜로라도급 전함 메릴랜드만 남게 될 예정이었다.하지만 거함거포주의적 시각에서는 나가토를 실제 작전에 쓰려면 전대를 구성할 동형함이 1척은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무엇보다 일본 해군에게는 이미 투입한 돈과 자재와 인원이 심히 아까웠다. 사실 무츠는 거의 완성 직전의 상태였으며, 약간의 의장 공사만 끝나면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 측에서 불만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완성 직전의 전함을 그냥 갖다 버리라는 것은 일본이 아니라 어떤 나라라도 달갑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워싱턴 군축 협상이 조금만 늦게 시작되었으면 이런 논란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1] 그래서 일본 해군은 해군 병원에 입원한 장병들을 무츠의 의무실로 옮긴 다음에 이미 취역해서 현역으로 활동 중이니 해체할 수 없다고 억지를 부렸다. 한동안 옥신각신한 끝에 씁 어쩔 수 없지하면서 영미 측도 무츠를 인정...하긴 했다.
다만 영국과 미국에서는 "그럼 불공평하잖아. 무츠 대신 우리도 16인치급 주포 실은 전함 두 척씩 더 찍어낼 텐데 그래도 괜찮겠지?"라고 제안했고, 일본은 괜찮아라고 대답해버렸다. 그래서 영국은 넬슨급 전함 2척을 신규로 건조할 권한을 얻었고, 미국은 이미 건조중인 콜로라도급 전함 4척 중 이미 조약으로 생존이 언급된 메릴랜드 외 2척(콜로라도와 웨스트버지니아)을 추가로 완공해서 총 3척을 보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이들 16인치급 주포 탑재함 7척(나가토급 2척, 넬슨급 2척, 콜로라도급 3척)을 빅 세븐 이라고 불렀다. 즉 일본 해군은 무츠 1척을 가지려고 가상 적국들에게 40cm급 주포 탑재 전함 4척을 준 것이다.
아마 일본 해군은 자신들의 우월한 전략 전술과 개함 전투력으로 그 정도 숫자의 차이는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콜로라도급 전함의 웨스트 버지니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웨스트 버지니아는 진주만 공습에서 침몰한 이후 다시 건져내어 대개장을 받은 뒤 Mk 8 초중량탄을 당시의 최첨단 레이더인 SG, SK로 관제사격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 야간전에서 웨스트 버지니아와 노스 캐롤라이나급 2척 그리고 무츠가 겨룰 경우 무츠는 구식 사격통제 기구 때문에 미군 전함의 Mark 6 (노스캐롤라이나급)과 Mark 8 (Mark 7 바로 아래 Mark 6보다 위, 웨스트 버지니아)의 레이더 관제 사격을 받고(30km 거리에서 관통 가능, 무츠는 이 세 척을 관통 불가) 격침 당할 위험이 매우 높다. 웨스트 버지니아와의 1:1 포격전의 경우, 주간에는 호각[2]이고 야간에는 신형 사격통제 기구 덕에 웨스트버지니아가 더 유리하다. 재수 없는 경우 야간전에서 레이더 성능의 열세로 인해 개장 후 최첨단 레이더를 갖춘 14인치 테네시급의 일격이탈 전략에 의해 부포 장갑이 뚫려 피해를 입거나 굉침당할 수 있다.
원래 조약대로라면 나가토는 콜로라도급과 비슷한 스펙에 속도가 우월하므로 1:1 대결에서 여유롭게 메릴랜드를 가지고 놀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았으나, 저렇게 덜컥 허용해주는 바람에 숫자에서는 콜로라도급에게 밀리고, 방어력 및 신기술에서는 넬슨급에게 밀린다. 물론 넬슨급도 2척이라서 숫자에서도 동등하며, 단지 콜로라도급이나 넬슨급이 느리기 때문에 어느 정도 상대가 가능할 뿐, 미국이나 영국이 이미 지키고 있는 곳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한다. 덤으로 16인치 주포를 탑재한 전함을 1척 격침시키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갈 것인가 생각해본다면...
이 때문에 조약 체결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의 일본에서는 영국과 미국이 무리한 제안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패전 후의 일본에서도 무츠의 최후와 맞물려 차라리 무츠 1척을 영미의 4척과 바꾸는 게 더 전략적으로 큰 이득이었을 것이라는 식으로 이를 비판한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본다면 그렇게까지 무리한 제안은 아니었는데, 해당 시점에서는 일본은 16인치 주포 탑재 고속전함을 2척이나 바로 전쟁에 투입할 수 있는 상태로 보유해서 압도적인 우위에 서지만, 미국은 동급 주포를 갖추었으나 속도가 크게 느린 전함을 건조 중단 상태에서 계속 공사를 추가로 더 진행한 후에야 2척 더 보유할 수 있게 된 것이고, 영국은 아예 설계도도 없는 상황에서 16인치 주포 탑재 전함을 처음부터 만들어야 하는데 그래서 나온 것이 넬슨급. 그러니까 일본은 저 4척이 취역할 때까지는 전함 전력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또 결과론적인 얘기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콜로라도급이나 넬슨급 모두 조약의 제약을 받아서 그런지 실제 완성도는 영 좋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당시 일본의 국가전략은 영국과 손을 잡고 미국을 봉쇄하는 것이지 폭주하는 일본이 혼자서 영국과 미국을 전부 상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일본 스스로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켜 가면서 만주사변 때까지만 해도 사실상의 동맹국이었던 영국에게 사실상 손절당한 것이기에 사실상 국가 대전략상의 자업자득에 불과하다.
3. 폭발사고로 맞은 허망한 최후
침몰 후 수십 년 뒤에 건져낸 1, 2, 4번 주포탑 |
구 일본제국 해군 해군병학교( 해군사관학교에 해당)이자 현 방위대학교박물관 소속으로 내부 항구에 전시된 대개장 당시 빼내어진 4번포탑[3]. 인근엔 야마구모급의 것으로 보이는 연장포탑 하나가 추가로 세워져 있다. |
하지만 무츠는 위에 언급된 4척이 현역에 취역하기 전이나 그 뒤에나 제대로 실전에 투입되지 못했다. 동부 솔로몬 해전에 참전했지만 너무 느려 터져서 함대에서 낙오되었다. 결국 구축함 3척의 호위 하에 트럭 제도로 돌아가야 했고, 이것이 무츠의 유일한 실전 투입이었다. 이후 무츠는 1943년 6월 8일, 히로시마 하시라지마(柱島)에 정박했다가 오후 12시 10분쯤에 갑자기 폭발과 같이 침몰해버렸고, 승조원 1,474명 가운데 353명만 생존했다.
3.1. 가설
그 원인으로 여러가지가 제기되었는데 연합군 잠수함에 의한 기습, 스파이에 의한 파괴공작, 탄약고 내의 자연발화, 폭뢰폭발설 등이 있다.- 우선 잠수함에 의한 어뢰 공격의 경우 침몰하기 전 3번 주포탑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는 다수의 증언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아닌 것으로 판정되었다. 게다가 태평양 전쟁이 한창 때에 연합군 잠수함이 전함을 격침시키는 대전과를 세웠다면 발표되지 않을 리 없다. 일례로 시나노를 격침한 잠수함 아처피시의 경우 상부에서 시나노의 정보가 없어서 순양함으로 처리하려다가 승조원의 반발로 재조사 후에 최대 항공모함의 격침을 인정받았다.
-
폭뢰설은 일본의 우익들이 지지하고 있는데 히로시마항에서
구축함 우시오가 실수로 1년 반 전에 무츠가 있던 자리에
폭뢰를 떨어뜨리고 책임을 묻게 될까봐 이를 보고하지 않아서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폭발했다는 것. 그러나 마찬가지로 3번 포탑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도 가능성이 낮다. 게다가,
잠수함조차 직격을 맞아도 한 두발은 경우에 따라서 버틸 만큼 위력이 약해 격침보다는 침몰 직전으로 몰아 부상시키는 게 주 목적일 정도인 폭뢰가 터진다고 하더라도 손상을 입는다면 모를까 격침까지 가는 일은 없다고 봐도 된다. 오히려 이런식으로 격침 되었다면 설계상이나 기공상에 중대한 하자가 있었다는 뜻이니 그것 나름대로 문제이다. 때문에
멍청한일부 우익들을 제외하면 거의 묻힌 주장이다.
- 스파이의 공작활동으로 전함을 파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거진 현실에서 어지간한 액션물 주인공들을 능가하는 활약을 한 것인데, 이런 대단한 스파이가 실제 있었다면 연합군이 승전한 시점에서 지금까지 이런 엄청난 공적을 발표하지 않을 리 없다. 그야말로 스파이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전설적인 업적이며, 영화로도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해당 사건에 대한 의혹을 다룬 소설인 『무츠폭침(陸奥爆沈)』에서 가능성 중 하나로 언급되고 있을 뿐 주요한 소재가 아닌 상황이다.
- 과거 탄약고내의 포탄이 자연발화한 경우는 HMS 뱅가드(1909)가 있는데,[4] 1917년 7월 9일 스캐퍼플로에서 훈련중 코다이트 MD 장약에 불이 붙어 폭침을 당한 적 있다.[5] 그래서 당시 일본이 쓰던 3식탄은 마그네슘과 가연성 소이탄이 내부에 들어있어 3식탄의 자연발화 가능성이 거론되었다. 하지만, 함께 히로시마에 정박해있던 전함 후소의 함장 이하 목격자들이 진술한 3번 주포탑에서 피어오르던 연기가 니트로글리세린과 면화약이 주성분인 주포용 93식 1호 장약에 의한 것으로 밝혀져 이 가능성도 부정되었다. 그리고 93식 장약은 독일 무연화약 기술을 받아들여서 센트랄라이트가 들어가는데. 이것이 섞어 들어간 장약은 웬만해서는 자기발화하지 않았고, 유틀란트 해전에서 불안정한 코다이트 Mk.1과 MD 장약으로 인한 유폭으로 고생한 영국 해군도 센트랄라이트를 섞어서 쓸 정도였다.(코다이트 SC)
3.2. 유력설
결국 잠수함도 기뢰도 스파이도 자연발화도 아니라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 탄약고에 접근하기 쉬운 수병이나 당직사관 등이 실수로 불을 냈거나 고의적인 방화라는 가설만이 남는다. 이들이라면 여분의 열쇠 한 개쯤 몰래 훔치거나 복제해서 손에 넣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실수라는 면에서는 탄약고에서 불을 붙이는 미친짓을 하는 상황이 있겠나고 반문할 수 있지만, 병사의 실수로 유폭해 침몰사고를 당한 군함이 있다. 이 군함이 바로 일본의 전함 미카사다. 사실 이 경우 여러 나라의 해군에서 유행하던 신호용 램프등에 들어있는 알코올에 일부러 불을 붙인 후 냄새를 없애 술처럼 마시기 위함이었다.[6] 문제는 이 짓거리를 탄약고에서 해버리는 바람에 그대로 유폭, 승무원 수백 명이 사망하고 미카사는 그대로 가라앉아 버렸다. 사실 탄약고 자체가 평상시에는 관리자가 아닌 이상 들어갈 일이 적다보니 의외로 일반 병사들이 모여 으슥(?)한 짓을 하거나 병사들의 일탈현장인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또한 군대라는 조직은 일반 사회에 비해 매우 폐쇄적이며, 그중에서도 해군의 경우에는 몇 달이고 망망대해에 나가 훈련하다보니 그 정도가 매우 심했다. 거기다 일본 특유의 똥군기로 인해 함내에서 구타와 가혹행위가 만연한 상황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당시 일본 해군 장병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노래 또한 정말 가관인데...
수병들조차 자기 나라 군함들의 똥군기가 무서워 타지 말라는 노래다. 거기다 이게 유행까지 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답이 없었는지는 상상에 맡긴다. 특히 이러한 똥군기는 함의 크기가 클수록 심각했고 전함급에서 정점을 찍었다고 하는데, 전함은 당시 해군의 최강 전력인 만큼 훈련은 매우 빡세지만 정작 실전 투입은 많지 않고, 인사 이동도 잦은 편이었기 때문에 어차피 곧 있으면 안 볼 사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어서 평상시에 쌓이고 쌓이는 스트레스를 후임이나 부하를 두들겨 패고 괴롭히면서 풀었다고 한다.
반대로 구축함 이하의 소형함에서는 함장의 성향에 따라 함내 분위기가 비교적 온화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대형함선 지휘에 문외한이라 구축함을 주로 몰던 기무라 마사토미는 온후한 성격이라서 부하들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특히 거주 환경이 함정 중 가장 열악하고, 침몰 시 생존 가능성이 없는 잠수함의 경우 일본군이라기에는 믿기 힘들 정도로 똥군기가 없고 승조원들의 분위기도 좋았다고 한다.
여기서 주포 탄약고에 불 좀 났다고 거함이 격침 당할 수 있는가란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군함 간의 포격전 같은 전투 상황 시 가장 위험한 사태 중 하나가 탄약고에 불이 나는 것이다. 군함보다 훨씬 안정적인 육상에 설치된 탄약고조차도 화재가 발생하면 초비상이 걸리며, 탄약고가 폭발하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자세한 내용은 유폭문서 참고.
따라서 주포 탄약고에 불이 나서 탄약이 유폭한다면 함선의 크기가 아무리 크더라도, 방어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7] 굉침당하는 것은 순간이다. 어쨌든 무츠가 침몰한 원인은 3번 포탑 내 탄약고에서 난 불이 탄약고를 유폭시킨 것으로 결론이 났으나, 화재의 원인에 대해서는 사문회의 절도범 가설이 영어권 연구를 비롯해서 여러 자료에서 인용될 뿐 아직까지 여러 이견이 존재하며 심지어 우리나라 밀덕 커뮤니티에서는 수병 간의 가혹 행위가 불러온 자살적 테러설이 널리 퍼져있다. 함선에 배속되느니 차라리 목이나 매달고 만다 따위의 노래가 유행하는 만큼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4. 구조적인 문제
일본의 전함들은 야마토급 전함을 제외하고는 모두 케이스메이트(현측 포곽에 부포배치) 방식을 사용하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설계/건조된 전함들의 보편적인 설계 방식이다.문제는 이렇게 건조된 전함들은 데미지 컨트롤, 특히 화재에 상당히 취약한 단점을 가지고 있다. 포곽식의 경우에는 포곽 바로 뒤로 선체 내부가 노출되어 있고,다른 포곽들이 후방을 공유하기 때문에 포곽들 사이에 화재를 방어할 수단이 전무한 수준인데 일본 전함들이 쓰던 장약은 주포건 부포건 코다이트에 장약과 탄약을 동시에 이송하는 방식이다. 즉 장약과 탄약을 같이 대량으로 보관하는 것이다. 그러니 불 하나 잘못 났다 하면 그대로 BOOM! 타국의 경우에는 기존 전함을 개장하거나 신형 전함을 건조할 때 부포는 따로 부포탑으로 독립시키는 추세였다.
물론 연합군도 포곽을 버리지 못한 전함들이 몇몇 있긴 했다. 영국의 경우 좋은 예가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들인데, 네임쉽인 퀸 엘리자베스와 3번함 밸리언트는 1938년 개장 때 부포를 신형 2연장 4.5인치 양용포탑으로 대체하면서 되레 포문 숫자까지 늘어 화력이 대폭 강화됐지만, 나머지 배들은 개장 타이밍 자체를 잡지 못했거나 다른 부분은 다 개장해 놓고도 그 부분만 손을 못 댔다. 특히 다 개장해놓고도 부포만 못 바꾼 좋은 예가 바로 영국 해군 최고의 수훈함 워스파이트. 미국 역시 표준형 전함들 중 부포탑까지 개장할 시간이 없는 등의 문제로 몇몇 전함은 포곽을 달고 다녔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포곽을 포탑 형식으로 바꾸거나, 포문을 줄이는 식으로라도 방어력 향상을 꾀했다.
일본도 사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이세급 전함의 경우 항공전함으로 개장하며 포곽을 철거했다.
5. 침몰 이후
폭발 사고에서 살아남은 무츠의 승조원들은 전원 중부 태평양의 해군기지로 보내졌다. 그리고 이런 곳들은 말이 좋아서 해군기지지, 마셜 제도나 마리아나 제도에 있는 해군 근거지대였다. 이들 지역은 일본군이 옥쇄 아니면 굶어 죽어나가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비밀 보호를 명목으로 무츠의 승조원들에게 보내진 우편물들은 "극비 출동 중"이라는 명목으로 반송처리했다.일본군은 처음에는 무츠를 인양해서 수리 후 재취역하려고 했고, 공사기간도 3개월 정도면 다시 전력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본은 과거 탄약고 폭발로 침몰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미카사를 인양 후 수리하여 재취역시킨 적이 있었기에 무츠도 수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듯싶다. 하지만, 주포탑 폭발로 굉침한 선체가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전쟁기간 중에 방치 상태로 버려졌으며, 전쟁이 진행될수록 연료가 매우 부족한 상황에 이르자, 1944년 7월에 무츠의 연료 탱크에서 중유를 600톤 정도 회수했다.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패전으로 끝난 후, 1948년에 서일본 해양산업 주식회사라는 업체가 무츠에 탑재된 물자나 고철을 회수할 목적으로 인양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원래 허용 범위를 초과하는 무리한 작업 끝에 사고가 발생해서 작업이 중단되었다. 이는 무츠가 침몰한 위치가 내해이기는 하지만 조류가 빠르고 시야가 좋지 않아서 잠수 및 인양 작업이 매우 곤란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본격적인 인양은 1970년에 후카다 구조 건설공사 주도로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때 함수의 일부와 주포탑 등의 무장 일부, 승무원의 유품 등을 인양했다. 인양 작업의 초창기에는 1500t 크레인으로 함미도 인양하려고 했으나, 와이어가 끊어지는 등의 사고로 인해 포기했고, 다시 시도한 끝에 1971년 3월 15일에 함미 부분도 인양했다. 동시에 4번 주포탑도 인양했으며, 내부에 있던 승조원의 유골도 몇 점 수거했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인양한 결과, 함체의 약 70%를 인양했으며, 해저에는 함교부위와 함수부를 제외한 전함의 함체 전반부가 남아있다.
일본 각지의 관련 박물관에는 무츠의 포탑 등 여러가지 부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는 침몰한 무츠에서 건진 것도 있지만, 예비부품으로 남은 물건도 섞여있다. 원래 전함은 장기간 운용시 수리를 빠르게 하고, 손상된 부품을 빠르게 교체하기 위해 여유가 되는 대로 예비부품을 만들어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 무츠용 부품이기 때문에 진품인 것은 맞다.
↑ 도쿄 오다이바의 해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무츠의 주포. 현재는 요코스카의 베르니 공원으로 옮겨졌다.[8]
또한 무츠에서 회수된 강철 중 일부는 '무츠철'이라 불리며 일본에서는 방사능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되는 정밀기계의 부품 등으로 재활용되고 있다. 당시의 제철/제강 과정에서는 철에 자연방사능 성분 이상의 방사능 성분이 들어가지 않았고, 바다에 가라앉아 있었기에 원자폭탄의 영향을 받지 않은 철이기 때문이다.[9]
현재 생산되고 있는 철들은 제조과정에서 미량의 방사능 물질이 포함되므로[10] 정밀기기용으로는 부적절하기 때문이다.[11] 강철 항목 참조.
일단 타국에서도 방사능 측정 기기 등 특수한 물건에 한해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때 침몰한 독일 함선에서 철을 뜯어 쓰는 경우가 있긴 하다. #1 #2 하지만 이런 경우는 보통 정밀한 방사능 측정을 위해 가급적 자체 방사능이 적은 자재가 필요한 경우에 한하며, 꼭 무츠뿐만 아니라 핵폭탄이 사용되기 전에 가라앉은 침몰선이라면 모두 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국과 일본의 함선들이 많이 가라앉은 아이언 바텀 사운드 같은 곳에 가면 엄청나게 많은 양을 얻을 수 있다.[12] 그리고 이런 이유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보통 극소량만 필요하기 때문에 무츠 하나만 가지고도 앞으로도 최소 몇백년 이상은 소요량을 충족시킬 수 있다. 한마디로 무츠를 재활용한 건 무츠가 딱히 특별한 물건이라서가 아니라 단지 일본 본토 연안 지역에서 침몰했으므로 적은 비용으로 자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6. 기타
히라가 유즈루라는 조선 기술자는 설계과정 중 무츠는 3연장 포탑 2기와 2연장 포탑 2기를 혼용해서 16인치 포를 총 10개나 달자고 제안[13] 했으나 양산 효과가 떨어져서 거부되었다. 만약 히라가의 제안이 받아들여졌다면 설계변경 등으로 건조 시점이 대폭 늦어졌을 것이므로 워싱턴 회의 시점에서 무츠는 완공 직전이 아니라 진수 직전/직후 상태가 되어 폐기가 확정되었을 것이다.개장 전 모습이 월드 오브 워쉽의 6티어 일본 프리미엄 전함으로 등장한다. 7티어인 나가토와 방어적 특성은 거의 비슷하지만, 철갑탄 성능이 영 좋지 않다. 건조 당시 선체 사양이라 어뢰 발사관이 있어 근접에서 일발역전이 가능할 수도 있다.
1970년에 NHK에서 제작한 무츠에 관한 다큐다. 건조 모습과 폭침에 대한 증언, 폭발실험, 그리고 인양 작업 등이 나온다. 러닝타임이 2시간이 넘지만 같은 게 3번 반복된다는 것이 함정.
[1]
다만, 설령 군축 협상이 조금 늦어졌다 하더라도 논란만 없었을 뿐이지 미국과 영국 등에 16인치 전함 쿼터를 더 주는 것 자체는 막을 수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전함의 위상을 생각하면 일본만 16인치 전함을 2척이나 보유한다는 것은 매우 불공평한 일이었기에 그 경우라면 역으로 미국과 영국 측에서 불만을 제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일본이 억지를 부리긴 했지만 무츠 건조에 들어간 돈이 보통 액수가 아니었으니 그걸 그냥 폐기하는 것은 충분히 아까울 만 했고, 설령 진짜로 완성되어 있었다고 한들 타국에도 16인치급 전함을 보유하게 해서 서로간의 균형을 맞추자는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이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걸 아랫문단에도 나오듯 폭발로 한큐에 날려먹어서 그렇지...
[2]
누가 먼저 선빵을 갈기느냐 기준. 자세한 것은
콜로라도급 전함 항목의 나가토와 웨스트 버지니아를 비교한 것을 참고 바란다.
[3]
태평양 전쟁 당시의 일본전함 주포로는 현재 무츠의 것만이 남아있다. 나머지는 모두 미군에게 넘어가거나 스크랩된 상태. 나가토급 전함을 개장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주포탑을 탈거하고 건조가 중단되어 잉여로 남아있던
카가급 전함의 주포탑으로 교환했는데, 전시되어 있는 포탑은 개장 전에 달려있던 포탑이다. 참고로 카가급의 주포탑은 명칭과 구경, 포신은 동일하지만 기존 나가토급의 주포탑보다 앙각과 사정거리가 개선된 물건이었다.
[4]
뱅가드급 전함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세인트 빈센트급 전함이다.
[5]
이 사고로 인해 승조원 845명중 폭침에서 생존한 승조원은 단 2명에 불과했다. 원래 구조된 승조원은 3명이였지만, 1명은 구조직후 사망하여, 최종 생존자는 2명이다. 여담으로
영일동맹으로 인해 참관인 자격으로 뱅가드에 승선해 있던
일본 해군 장교 에토 쿄스케 대위도 폭침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이후 1984년에 에토 쿄스케 대위의 유족들이 뱅가드가 침몰한 해역에 방문하여 뱅가드의 선체 일부를 인양하는 모습을 참관했다.
[6]
뭔 짓거린가 싶겠지만 영국이나 이탈리아, 독일도 다 했던 짓이다. 금주법 크리였던 미국은 여기에 더해 어뢰추진용 알코올을 빼다 마시기도 했다.
[7]
대표적인 예시로, 야마토급의 경우 2번함 무사시를 보면 덩치도 덩치지만 미 해군의 항공기들이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6차례의 공습을 거쳐서 침몰시켰을 만큼 방어력이 매우 뛰어난 전함이었다. 그럼에도 그 자매였던 1번함 야마토의 경우에는 좌현에 집중된 공격 탓에 함체가 기울어지자 탄약고가 폭발해 버섯구름을 피워올리며 함체가 산산조각이 나서 순식간에 바닷속에 가라앉았다.
[8]
해당 공원은 JR의
요코스카역과 케이큐 전철의
시오이리역 바로 옆에 위치해 있으며 나가토와 야마시로의 기념비도 있고, 요코스카 군항 크루즈도 탈 수 있다.
[9]
아이러니하게도 자매함인 나가토는 지구상에서 가장 심한 방사능 오염을 받은 함이다. 핵무기 실험인 크로스로드 작전에 투입되어 원자폭탄의 직격을 받았기 때문.
[10]
용광로의 수명 측정 용도로 용광로의 내부에 방사성 물질인 코발트-60을 발라놓는다는 얘기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용광로가 아닌 현 지구 환경 문제. 냉전기에
핵실험을 엄청 해대는 바람에 코발트-60을 비롯한 방사성 물질이 인류에는 해가 없지만 정밀기기에는 영향을 줄 정도로 퍼져있기 때문. 제련 과정에서 필수적인 부분이 바로 산소 유입인데, 여기에 핵실험으로 좍 퍼져버린 자연 방사능 이상의 방사성 물질이 조금씩 들어오기 때문.
[11]
그렇다고 이게 무슨
로스트 테크놀러지인 것은 아니고, 방사능 물질을 제거한 청정환경을 인공적으로 만들면 방사능 물질이 없는 강철을 만들 수 있다. 철광석이나 재료 자체에 방사능이 포함된 것이 아니라, 강철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대기에 섞여있는 방사능 물질이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침몰선에서 강철을 채취하는 이유는 청정환경을 만들어 강철을 제조하는 것보다 비용이 저렴하기 때문이다.
[12]
다만 배는 침몰한 뒤에도 원래 소속돼있던 국가나 회사의 재산으로 취급되는지라 아무나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다. 특히나 전투로 인해 승조원들과 침몰한 군함의 경우 대개 전몰자 묘역으로 간주되기에 보통 활용이나 다이빙이 제한된다. 하지만 중국은 동남아시아 지역에 2차 대전 당시 침몰한 연합군 군함을 털어간다. 참고로 영국은 이 해전에서 가라앉은 자국 군함들을 전쟁묘지로 선언해둔 상태였고 적지 않은 군함이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의 영해인데도 뻔뻔하게 들어가서 훔쳐가는 것이다.
[13]
구현됐다면
네바다급 전함과 비슷한 실루엣이 되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