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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d3c65><colcolor=#ffffff> むらた ひでお
村田 英雄 무라타 히데오 | Hideo Murat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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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카지야마 이사무 (梶山 勇) |
출생 | 1929년 1월 17일 |
후쿠오카현 우키하군 요시이정 [1] | |
사망 | 2002년 6월 13일 (향년 73세) |
오사카부 오사카시 미야코지마구 오사카시립 종합의료센터 | |
데뷔 | 1958년 無法松の一生 |
활동기간 | 1958년 ~ 2002년 |
레이블 |
일본 컬럼비아 (
1958년 ~
1971년) 도시바EMI ( 1971년 ~ 200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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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낭곡사 출신의 엔카 가수이자 배우로, 깊고 낮은 가성과 풍채, 가사에 실린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여 미나미 하루오와 더불어 전후 일본 가요계의 한 획을 장식한 인물이다.2. 생애
16세가 되던 1945년 일본군 해군에 자원 입대해 나가사키 현에 위치한 사세보 진수부 예하 해병단 수송부로 배치되었다.자대배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6월 19일 후쿠오카에 위치한 요시즈카 전매국에 재발령되었는데, 배치 받아 도착한 그 날 후쿠오카에 대공습이 시작되어 다음 날 제15은행 사옥 지하실 시신 수습반에 배치되었다.
입대한 지 2개월 만에 전쟁이 끝나고 1947년 전역하여 동료 낭곡사였던 '요시다 이마리'와 결혼하여 1949년 도쿄로 상경해 무명 낭곡사로 활동하였고 1954년 활동명인 '무라타 히데오'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후 라디오에서 낭곡을 들려주는 무명가수로 생활하다가 1958년 우연히 라디오를 들은 작곡가 코가 마사오에게 발탁되어 無法松の一生 (무법송의 일생)이라는 노래로 공식 가수로 데뷔하기에 이른다.
1973년에는 지병인 당뇨병의 악화로 인해 쓰러졌으나 회복되어 다시 1979년 유선방송에서 무라타의 노래 <부부춘추>라는 곡을 드라마화한 것이 대히트되어 시너지 효과를 가져왔고, 1981 ~ 1982년 라디오 프로그램 " 비트 다케시의 올나잇 일본"에 출연해 호방한 성격과 일화를 소개하여 젊은 층에게 큰 인지도를 가져왔다.
1988년에는 같은 시기에 활약했던 미하시 미치야 (三橋美智也, 1930 ~ 1996), 카스가 하치로 (春日八郎, 1924 ~ 1991), 미나미 하루오 (三波春夫, 1923 ~ 2001)과 4인방으로 불리며 여러 방송 출연과 콘서트를 개최하였으며 개인적으로는 작사와 작곡도 병행하였다.
4인방 중 한 명인 미나미 하루오는 그의 라이벌이자 절친한 동료였으며 여러 합동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30년 가수 내공과 노래 속에 들어가 있는 명대사로 항상 공연장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2.1. 건강 문제
무라타의 인생은 한마디로 "당뇨병과의 싸움"이었다. 식생활에 있어 야채를 별로 안 좋아해서 "굵은 목소리를 내려면 고기를 많이 먹어야 한다"라는 생각에 거의 매 끼니를 육류를 중심으로 먹고 엄청난 애주가, 즉 주당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안 좋은 생활습관으로 35세에 당뇨병에 걸리고 만다.1972 ~ 1973년에는 발병으로 쓰러져 일시적으로 입원하였고, 1991년에는 무명 가수 시절에도 꿋꿋이 내조하며 무라타를 지지해 주었던 아내 요시다 이마리의 별세, 그 3일 전 엔카계 4인방의 일원으로 친한 동료였던 가스가 하치로마저 별세하여 당뇨 합병증에 우울증까지 겹쳐 아내의 장례 직후 입원하여 퇴원 후 오랜 애인이 거주하는 오사카에 거주하며 작업이 있는 경우에만 상경하는 방식을 가지며 요양 생활을 한다.
그 후 1995년에는 당뇨 합병증이 더욱 심각해졌으며 급성 심근경색과 심부전증이 겹쳐 의식 불명에 빠지고 이듬해 1996년 1월에는 또 엔카계 4인방 중 1명인 미하시 미치야가 별세하여 우울증도 심각해져갔다. 1996년 2월, 백내장 수술을 받으려고 입원한 도중 쓰러져 6시간에 걸친 심장 관상동맥 우회 이식술을 받고 3월에는 백내장 수술, 5월에는 오른쪽 다리 말초 혈관 질환이 괴저상태에 빠져 오른쪽 무릎 12센치를 절단한다. 이 때 무라타는 "모든 것이 무산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며 삭발한다.
1997년에는 다시 공연을 재개하면서 회복세를 보였지만, 10월에 저혈당 발작을 일으켜 생사의 고비까지 언급될 정도였다. 여기서 무라타는 "과거 화이트 와인을 술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물 마시듯이 마셨기 때문에 그렇다"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12월에는 당뇨병 망막증으로 왼쪽 눈을 수술하고 2000년 1월에는 왼발까지 절단한다. 이때까지 의족으로 생활했지만 이제는 휠체어 생활이 되고 마는데 인터뷰에서 "다리가 없어도 노래는 노래다"라고 말하며 고참 가수의 면모를 풍기었다.
그런데, 2001년 4월 무라타의 선의의 라이벌이었던 미나미 하루오마저 세상을 떠나자 "노래를 더 불러주었으면 했는데 매우 쓸쓸하다. 이제 살아있는 건 나 혼자구나"라며 매우 초췌한 표정으로 인터뷰를 하였다. 같은 해 6월 "이제 내게 더 이상 시간은 없다.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든 음반을 발매해야한다"라며 '3인방 모임' 콘서트의 오리지널 판을 CD화하여 발매하였다.
2002년 5월 컨디션 악화로 입원했지만, 6월 13일 오전 9시 52분 당뇨병 합병증과 폐렴으로 인해 오사카부 오사카시 미야코지마구 오사카 시립 종합 의료센터에서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이틀 뒤 무라타 히데오의 동료 중 한 명이었던 배우 무로타 히데오 (室田日出男)도 별세한다. 코미디언 비트 다케시는 "무라타 다음으로 무로타가..."라며 고인을 애도했다.
3. 사후
2004년 5월 23일 지역 유지들에 의해 무라타의 업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출신지 사가현 카라츠시 오치마을에 <무라타 히데오 기념관>을 오픈한다.구 사가은행 오치지점으로 사용하던 곳을 개조하여 유품 전시, 분장실 재현, 출연 프로그램 방영 등 여러 전시와 체험 프로그램이 있다.
1년에 1회 1월 17일 오치마을에서 <무라타 히데오 음악제>, <무라타 히데오 탄신제>를 거행한다.
2016년 1월 17일에는 지역 주민의 모금을 통해 오치역 구내에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1]
現 후쿠오카현 우키하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