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포에니 전쟁의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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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264년 로마군과 고대 카르타고- 시라쿠사 연합군이 메사나에서 맞붙은 전투.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첫번째 전투이다.2. 상세
기원전 3세기 중순, 시칠리아는 고대 카르타고가 지배하는 서부와 시라쿠사가 지배하는 동부로 나뉘었다. 두 세력은 시칠리아의 패권을 놓고 기원전 5세기부터 수백년간 전쟁을 벌였지만 좀처럼 승부를 내지 못하고 섬을 양분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던 중 또다른 세력이 시칠리아에서 두각을 드러냈으니, 바로 라틴인 용병 마메르티니(Mamertini)였다. 이들은 본래 시라쿠사 참주 아가토클레스에게 고용되었는데, 아가토클레스 사후 일자리를 잃고 시칠리아를 떠돌았다.그러던 기원전 282년, 그들은 메사나 주민들에게 자신이 좀 쉬다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주민들은 이들에게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먹을 것을 나눠주는 등 은혜를 베풀었지만, 마메르티니는 곧 메사나에서 정변을 일으켜 주민들을 대량 살육하고 살아남은 여인들을 아내로 삼았다. 그 후 그들은 메사나를 거점으로 삼고 20여 년간 그리스계 해안 도시들을 상대로 해적 행위를 일삼았다. 그리스인들은 당연히 그들에게 강한 적의를 품었고, 시라쿠사 참주 히에로 2세는 이들의 염원을 등에 업고 마메르티니와의 전쟁에 착수했다.
기원전 271년, 히에로 2세는 용병과 민병대를 포함한 시라쿠사군을 이끌고 메사나로 진격했다. 키아모소르 강 전투를 치렀을 때, 그는 용병들이 시라쿠사의 정치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다른 경쟁자를 지원할 조짐을 보이는 걸 감지했다. 이에 일부러 용병들을 적에게 노출시켜 몰살당하게 하고, 민병대는 안전한 곳으로 빼두었다. 그렇게 기존의 용병들을 죽게 만든 뒤 새 용병을 고용하여 전쟁을 재개한 그는 기원전 270년 시칠리아 북부 해안의 밀라, 틴다리다, 타우로메니움 시를 공략했고 269년 롱가노 강 전투에서 마메르티니인을 물리치고 메사나를 포위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마메르티니는 카르타고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카르타고 사령관 한니발 기스코의 함대가 메사나 함락 직전에 나타나 중재를 제안했다. 히에로 2세는 카르타고와 마찰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이를 받아들이고 마메르티니와 화해하기로 했다. 이후 카르타고는 메사나를 도와준 대가로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했고, 마메르티니 사이에서 "이러다간 카르타고인들의 지배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기원전 265년, 히에로 2세는 마메르티니와의 전쟁을 재개했다. 마메르티니 지도부는 카르타고에 구원을 요청했고, 한노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즉시 출격해 시라쿠사군을 물리치고 도시에 수비대를 배치했다. 그러나 마메르티니의 상당수 인사들은 카르타고가 메사나를 완전히 지배하려 들 거라 여기고 로마에 구원을 요청했다. 많은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마메르티니가 이전에 저지른 악행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이탈리아 남부의 패권을 쥐기 위한 긴 전쟁을 이제 막 완료하고 질서를 회복해야 하는데 시칠리아에 군대를 보내서 카르타고와 시칠리아를 상대로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무익하다고 여겼기에 이 요청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부 지중해 최강국인 카르타고가 이탈리아 본토 코앞인 메사나를 장악한다면 안보가 위태로워진다는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원로원 내에서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메사나에 군대를 파견하는 안건은 민회에 회부되었다. 당해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는 이 기회에 군공을 세워서 아욱토리타스(Auctoritas)[1]를 쌓고 정치적 입지를 굳건히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평민들에게 풍부한 전리품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고, 평민들은 이에 감화되어 마메르티니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의했다.
카우덱스는 2개 군단을 이끌고 메시나 맞은편 해안 도시인 레지아에 이르렀다. 그는 먼저 사촌이며 대대장을 맡고 있던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에게 소규모 분견대를 맡기고 바다를 건너게 했다. 클라우디우스는 바다를 성공적으로 건넌 뒤 마메르티니가 내부에서 호응한 덕분에 메사나를 장악했고, 한노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한 채 본국으로 도주했다가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시칠리아를 양분하던 카르타고와 시라쿠사 모두 로마가 메사나를 장악한 것에 분노와 위협을 동시에 느꼈다. 그들은 힘을 합쳐 로마인들을 몰아내기로 하고 임시 동맹을 맺었고, 폴리비오스가 "한니발의 아들"로 언급한 한노가 이끄는 카르타고군과 히에로 2세가 이끄는 시라쿠사군이 연합해 메사나를 포위했다. 또한 함대를 메사나와 레지아 사이의 바다에 배치해 로마군이 메사나에 추가로 오는 것을 막았다. 카우덱스는 협상을 제안했지만 무조건 철수하라는 답변만 받을 뿐 별다른 성과가 없자, 야밤에 적의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전 군대를 수송선에 싣고 바다를 건넜다.
해가 뜰 무렵 상륙을 완료한 로마군은 즉시 시라쿠사 진영을 공격했다. 시라쿠사군은 평원으로 나와서 회전을 벌였다가 보병대가 격파당하자 진영으로 철수했다. 로마군은 적 진영을 공략하려 했지만 적군의 맹렬한 저항으로 쉽사리 이루지 못했고, 그 사이 시라쿠사 기병대가 로마 기병대를 격파하고 후방을 위협하자 철수했다. 그 후 히에로 2세는 로마군이 바다를 완전히 건넌 것에 낙담한 데다 시라쿠사 내부에서 변란이 일어날 조짐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자 시라쿠사로 철수했다. 다음날, 카우덱스는 카르타고군을 공격해 손쉽게 물리치고 메사나 포위를 풀었다. 그 후 카우덱스는 시라쿠사를 침공해 에체틀라(Echetla) 요새를 함락한 뒤 시라쿠사를 포위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시라쿠사를 완전 포위할 정도로 규모가 크지 않았고, 함대 없이는 바다를 봉쇄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많은 손실을 보고 메사나로 철수했다.[2]
기원전 263년 집정관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 메살라와 마니우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가 카우덱스를 대신해 시칠리아로 이동했다. 이들은 총 4개 군단을 이끌고 시칠리아의 여러 도시들을 별다른 저항없이 점령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67개의 도시가 귀순했다고 하고,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52개 도시가 귀순했다고 한다. 이후 로마군이 시라쿠사를 압박해오자, 히에로 2세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두 집정관에게 로마와 동맹을 맺을 의향이 있으니 평화 협정을 맺자고 제안했다. 로마 측은 장차 카르타고를 상대로 시칠리아에서의 전쟁을 이어가려면 시라쿠사의 협조가 필요했기에 기꺼이 받아들였다. 시라쿠사가 지불해야 할 배상금 규모는 25달란트, 100달란트, 또는 200달란트로 기록마다 다르게 서술되었다. 나중에 로마에 곡물을 공급하는 대가로 배상금을 절반으로 줄였다고 한다. 또한 시라쿠사는 로마의 동맹국이 되었고, 양자가 확보한 포로를 무상으로 교환하기로 했다.
발레리우스는 시라쿠사를 로마의 동맹국으로 삼고 시칠리아 동부의 많은 도시들을 복속시킨 뒤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카르타고가 로마의 동부 시칠리아 지배를 순순히 인정하지 않고 군대를 대대적으로 동원해 공세에 나서면서, 전쟁은 점차 장기전으로 치달았다.
[1]
한 사람이 지닌 사회적 명예와 능력, 영적인 힘 등을 종합한 개념. 이것을 많이 쌓은 자들은 신들의 총애를 입어 가문 대대로 복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겨졌기에 로마 정치인 및 장군들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2]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히에로 2세가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클라우디우스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고 주장했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