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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사드 무하마드

파일:매튜 사드 무하마드 프로필.jpg
매튜 사드 무하마드
Matthew Saad Muhammad
<colbgcolor=#000000><colcolor=#aa9872,#8c7a55> 개명 전 이름 매튜 프랭클린
Matthew Franklin
[1]
출생 1954년 6월 16일[2]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사망 2014년 5월 25일 (향년 59세)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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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
전적
58전 39승(29KO) 16패(8KO) 3무
체급 라이트 헤비급
신장/리치 180cm/191cm
스탠스 오서독스
링네임 Miracle Matthew

1. 개요2. 전적3. 커리어4. 파이팅 스타일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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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 권투 선수.

2. 전적

  • 주요 승: 메이트 파를로프, 마빈 캐멀, 마빈 존슨(2), 빌리 더글러스, 야키 로페즈(2), 존 콘테(2), 로티 므왈레, 머레이 서덜랜드,
  • 주요 패: 웨인 맥기, 마빈 캐멀, 에디 무스타파 무하마드, 드와이트 무하마드 카위(2), 유라이아 그랜트, 마르쿠스 보트, 안톤 요시포비치, 앤드류 메이너드, 제이슨 윌러
  • 무승부: 웨인 맥기, 메이트 파를로프, 케빈 웨그스태프

3. 커리어

1958년 6월 또는 1959년(출처에 따라 다름),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벤자민 프랭클린 파크웨이에서 경찰관에 의해 발견되었다. 경찰관은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하던 어린 사드 무하마드를 경찰서로 데려가서 친부모를 찾으려고 했지만, 그를 찾으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사드 무하마드는 가톨릭 사회복지사무소로 옮겨졌고, 수녀들은 그에게 매튜 프랭클린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매튜라는 이름을 지어준 까닭은 "선택받은 자"라는 뜻을 가졌기 때문이었고, 나머지 '프랭클린'은 사드 무하마드가 벤자민 프랭클린 파크웨이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붙은 것이었다.

일곱 살 때 필라델피아 남부에 살던 포르투갈 이민자 존 산토스와 버사 산토스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하지만 사드 무하마드가 살던 동네는 질이 엄청 안 좋은 곳이었던 데다가 청소년 갱단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괴롭힘을 받지 않으려면 그들과 합류해야 한다는 생각에 갱단에 들어가 나중에는 아예 갱단의 리더가 되었다. 갱단 활동의 결과로 사드 무하마드는 교도소를 드나들었으며,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상담사에게 권투를 시작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아마추어 전적 25승 4패를 기록하며 프로로 전향하였다.

1977년 7월 26일, 마빈 존슨을 12라운드에 KO시키며 NABF 라이트 헤비급 타이틀을 획득했다.

1979년 4월 22일, 마빈 존슨을 8라운드에 또다시 KO시키며 WBC 라이트 헤비급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리고 7개월 후 링매거진은 라이트 헤비급 타이틀을 사드 무하마드에게 수여했다. 사드 무하마드와 존슨의 2차전은 1996년 역대 최고의 타이틀전 35위에 올랐으며, 8라운드는 1979년 올해의 라운드로 선정되었다.

1979년 마빈 존슨이 가지고 있던 WBC 라이트 헤비급 타이틀을 획득한 후 매튜 프랭클린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매튜 사드 무하마드로 개명하였다. 사드는 "밝은 미래"를 의미하고 무하마드는 "칭송받을 자격이 있는"을 의미한다.

WBC 라이트 헤비급 타이틀을 8차 방어까지 성공했으며, 사드 무하마드를 상대로 판정까지 간 유일한 도전자는 첫 타이틀 방어전에서 만난 전 WBC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존 콘테뿐이었다. 1차전에서는 만장일치 판정승을 거두었지만, 2차전에서는 4라운드 만에 KO승을 거두었다.

1980년 7월 13일, 야키 로페즈와의 2차전에서 14라운드 2분 3초에 TKO승을 거두며 타이틀 4차 방어에 성공했다. 이 경기는 1980년 링매거진 "올해의 경기"에 선정되었고, 이때 8라운드는 "올해의 라운드"에 선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1996년에 역대 최고의 타이틀전 84위에 올랐으며, 2001년에는 권투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라운드 8위에 올랐다.

이후 1981년 2월 23일에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This Is It"이라는 카드로 WBA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에디 무스타파 무하마드와 통합전을 치를 예정이었지만[3], 경기의 프로모터였던 해럴드 스미스가 웰스 파고를 상대로 한 2,130만 달러의 사기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퍼지던 와중에 갑작스럽게 실종되면서 경기는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4]

1981년 12월 19일, 드와이트 무하마드 카위에게 10라운드 TKO패하며 WBC 라이트 헤비급 타이틀을 잃었다.

1982년 8월 7일, WBC 라이트 헤비급 타이틀을 되찾기 위해서 카위와 재경기를 가졌다. 하지만 이전 경기 때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기량차로 밀리며 6라운드 만에 또다시 TKO패를 당했다.

전성기가 지난 뒤에도 계속 경기를 치르다가 1992년에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링매거진은 사드 무하마드의 링 수입을 400만 달러로 추산했지만, 낭비벽이 심했던 것과 더불어 권투를 통해 벌어드린 수입을 잘못된 사람에게 맡긴 탓에 파산하기에 이른다.

2010년 Resources for Human Development가 관리하는 필라델피아 노숙자 보호소인 RHD Ridge Center에서 살았다. 몇 달 후, 그는 다시 필라델피아에서 혼자 살면서 개발 기구에서 옹호자이자 대변인으로 일했다.

2014년 5월 25일, 근위축성측색경화증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4. 파이팅 스타일

5. 여담

1980년에 가족의 행방을 알려주는 정보를 가진 사람에게 10,000달러를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 또한 사립 탐정을 고용하여 1981년에 몇 가지 해답을 얻었다. 필라델피아의 한 여성이 제공한 단서를 추적한 사립 탐정은 사드 무하마드가 맥스웰 안토니오 로치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발견했다. 게다가 사드 무하마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자신이 형과 함께 이모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두 형제의 이모는 두 사람을 키울 경제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형에게 남동생을 없애라고 지시했고, 사드 무하마드의 형은 그를 벤자민 프랭클린 파크웨이에 버리고 갔다는 진실에 도달하였다.

실베스터 스탤론 록키 3의 메인빌런 클러버 랭의 역할을 사드 무하마드에게 제안했지만, 배역을 위해서 삭발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캐스팅을 거절했다가 나중에 이 결정을 한 것에 대하여 엄청나게 후회했다고 밝혔다.

1998년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 2006년 세계 복싱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2002년 역대 최고의 라이트 헤비급 10위에 선정되었고, 2003년 역대 최고의 펀처 24위에 선정되었다.


[1] 출생명은 맥스웰 안토니오 로치(Maxwell Antonio Loach). [2] 기록에 따라 6월 24일, 8월 5일로도 알려졌다. [3] 이 카드에는 게리 쿠니 vs. 켄 노턴, WBA 웰터급 챔피언 토마스 헌즈 vs. 윌프레드 베니테스, WBC 슈퍼밴텀급 챔피언 윌프레도 고메즈 vs. 마이크 아얄라도 포함될 예정이었다. [4] 스미스는 나중에 29건의 사기 및 횡령 혐의로 인해 유죄 판결을 받고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