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8-06-11 19:40:46

마이클 잭슨/인기와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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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은 대중 문화에 끼친 영향력 측면에서 엘비스, 비틀즈, 프랭크 시네트라의 계보를 이어요. 21세기에 댄스팝, 알앤비 혹은 소울을 선보이는 그 누구든 마이클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셈이죠.
ㅡ짐 데로가티스 음악평론가/ 2009년 NPR 인터뷰
만약 마이클 잭슨이 세상에 기여한 혁신적인 업적이 아니었다면 현대의 음악과 예술은 아마 지금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을 겁니다.
ㅡL.A Reid 에픽 레코드 CEO/ 2014년 Xscape 앨범 발매 공식 논평
오늘날 마이클 잭슨의 신화는 그 자신의 천재성과 엄청난 노력이 함께해 얻은 결실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이미 그는 거의 갇혀 살다시피 하며 최고 음악인이 되기 위한 혹독한 영재교육을 받았다. 결국 최고의 가창력을 갖게 되었음은 물론 최고 수준의 댄스로, 전 세계 춤과 음악계 판도 모두를 바꾸었다. 어셔, 저스틴 팀버레이크,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등 수많은 팝스타들이 현재까지도 그의 '핵우산' 아래에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 등에 비견할 만한 이 팝음악사에 길이 빛날 걸출한 음악인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도 음악계의 큰 손실이다.
ㅡ조성진 음악평론가/ 조성진의 음치불가 '마이클 잭슨' 편
팝의 황제이자 아이콘이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아니었던가. 말하자면 농구계의 마이클 조던 같은 인물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수식으로는 모자란, 그 분야 자체를 상징하는 거대한 존재 말이다. 마이클 잭슨은 ‘천재가 노력도 하고 성실함까지 갖추면 이렇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 인물이다. 동시에 그가 지닌 여러 재능이 어쩌면 고루 온전하게 평가받지 못했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그가 무대에서 완벽한 퍼포먼스를 구사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퀸시 존스 같은 위대한 프로듀서와 작업한 최고의 재능을 지닌 ‘댄스 가수’를 넘어 이미 그 자신이 뛰어난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였다는 사실을 그리 많이 알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재능이 재능을 가렸다고 할까. 불세출의 뮤지션..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요절로 인한 신화화’ 운운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물론 요절로 인한 신화화로 인해 자신이 지닌 음악적 능력보다 과대평가된 뮤지션이 세상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마이클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ㅡ김봉현 음악평론가/ 시사저널 기고문 '마이클 잭슨, 세계를 열광시키다'
북유럽 신화의 많은 신들이 마지막 날에 거대한 전쟁을 일으켜 멸망하는 사건을 가리키는 '신들의 황혼'이라는 단어는 바그너에 의해 사용된 후 위대한 시대의 종언을 가리키는 관용구로 자리잡았다. 지난주 마이클 잭슨의 갑작스런 죽음을 접한 후 바로 이 표현이 생각난 이유는 아마도 그의 죽음이 단순히 한 아티스트의 죽음이라기보다 세계 음악시장 쇠락의 상징적인 사건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평론가 강명석 씨도 지적했듯이 지금도 '우리는 마이클 잭슨이 만든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오직 마이클 잭슨만이 '팝의 제왕'(King of pop)이자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죽음은 상징적으로 거대하게 느껴지며 그의 부재는 엄청난 상실감을 남기는 것이다.
ㅡ방시혁 작곡가/ 일간스포츠 기고문 '새로운 마이클 잭슨을 기다리며'
그 완벽한 사운드 안에서 마이클 잭슨은 1980년대에 지금의 그 어떤 팝 앨범보다 현대적인 음악을 하고 있었다. 그는 흑인음악의 원초적인 비트와 그루브를 백인의 팝 안에 정제시켜 융화했고, 그것을 록의 다이내믹으로 폭발시켰다. 그가 곡의 도입부에서 선보이던 독특한 창법은 그대로 어셔와 저스틴 팀버레이크, 비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수많은 댄스 가수들은 마이클 잭슨의 무대를 보며 퍼포먼스를 구상한다. 그는 모든 장르가 가장 쾌락적인 형태로 융합하는 팝음악을, 가수의 춤이 단순한 몸짓을 넘어 거대한 무대와 합일 되는 새로운 퍼포먼스의 개념을 창조했다. 우리는 지금도 마이클 잭슨이 만든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King of Pop’의 서거는 한 시대의 종언이 아니라 한 시대의 시작이다. 지난 4반세기 동안 지구의 모든 뮤지션들이 마이클 잭슨의 영향을 받으며 살았지만, 정작 마이클 잭슨 개인은 그 업적으로부터 격리됐다.
ㅡ강명석 음악평론가/ 텐아시아 기고문 '우리는 지금도 마이클 잭슨이 만든 시대에 살고 있다'
제왕 마이클은 인종차별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 백인 주류 사회의 총아로 등장했다. 전 세계 수억 명의 팬을 사로잡는 무기는 다름 아닌 마이클의 팝 음악에 대한 천부적 재능과 인간적인 매력이었다. 우리는 이미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를 만났고, 비틀스, 레이 찰스, 밥 말리 등 대중음악의 시대별·장르별 전설을 목격한 바 있다. 그러나 무엇이 마이클 잭슨을 “내 생애에서는 다시 보지 못할 레전드 중 레전드”(T 윤미래의 말)로 만들었을까? 그의 음악은 모타운의 유명 흑인 스타들을 자랑하던 디트로이트 R&B의 정수의 경계를 뛰어넘어 록과 재즈, 포크와 발라드 등 여타 장르의 장점을 모두 모은 정제된 작품이었다. 가장 많은 리스너가 공감하고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팝의 틀 속에 용해하는 절제력과 완성도를 추구했다는 점은 그의 천재성을 보여준다. 힙합을 비롯한 흑인 아티스트들이 MTV 등 주류 방송 매체로 진출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준 사람이 바로 마이클이라는 사실을 많은 힙합 아티스트들은 고맙게 기억하고 있다.
ㅡ서병후 음악평론가/ 맥심 코리아 2010년 6월호
도대체 잭슨은 팝 음악에서 어떤 존재였을까. 나는 어떤 면에서 그가 팝 음악 그 "자체"를 정의하는 인물이었다고 감히 말한다. 팝이 무얼까? 잭슨이 "Off The Wall'로 본격적인 Epic 레코드 시절을 열어가기 이전에 팝이란 백인의, 백인에 의한, 백인을 위한 주류 중산층 청취자 타겟의 보수적이면서 듣기 편한 이지 리스닝 재즈/팝의 변용 내지는 빅 밴드 음악의 한 갈래에 불과했다. 틴 팬 앨리가 그랬고 스윙이 그랬다. 락앤롤, 트위스트, 디스코, 훵크 등 흑인들의 음악으로 출발한 주류 대중음악도 결국 백인 주류 문화로 변형, 도입, 흡수되거나 아니면 저질 음악으로 낙인 찍혀 조기에 사멸하거나 둘 중의 하나의 길을 걸어야 했다. 개중 인기가 높았던 모타운은 확실히 광범위한 청자를 확보했지만 록에 비하면 저질스러운 싸구려 음악이라는 인식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고 그나마도 그 뒤를 이은 디스코와 훵크는 70년대가 저물어 가면서 제대로 꽃피우기 전에 또 하나의 깜둥이 음악으로 낙인 찍히며 '블랙뮤직에 기반한 주류 팝 음악'이라는 미션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다. 잭슨은 정확히 이 모든 한계를 뛰어넘었다. 다른 방식으로. 그는 메인스트림인 팝을 자신만의 블랙뮤직 속에 녹이며 백인들의 지배적인 팝 문화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 결과 MTV가 열광한 첫번째 스타는 허여멀건한 금발의 청년이 아닌 검은 잭슨의 춤사위였고 백인 중산층 청자들의 보수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AOR(Album Oriented Rock) 라디오 스테이션에서 가장 많이 흘러나온 것도 그의 음악이었다. 재즈에서 훵크까지 모든 음악을 꿰뚫고 있던 프로듀서 퀸시 존스, 그리고 클래식부터 록앤롤까지 모든 장르의 음악을 스승으로 송 라이팅을 공부한 잭슨의 어프로치는 개방적이면서도 대담했다. 그들은 정확히 장르나 형식으로 규정되지 않는 어떤 다채로운 사운드의 모음을 향해 질주했고, 이런 독창적인 방향 설정은 정확히 엘피 시대를 지나 씨디 시대로 향하는 첨단 현대 대중 음악의 취향을 정확히 포착해 내고 있었다. 장르 아티스트가 아닌 팝 아티스트의 영역, 타협적이지만 자유롭고 실험적인 한 곡 한 곡, 당대 최고의 세션맨들과 송 라이터, 엔지니어들이 총 출동, '곡에서 곡'을 향하는 거시적인 제작 방식을 뛰어넘어 '한 음에서 한 음으로' 집착해대는 음악 만들기를 실험한 결과 잭슨이라는 걸출한 아이콘이 탄생된 것이다. 뻔한 수치조차 들먹일 필요가 없다.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그는 전 세계 팝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앨범을 판 아티스트이며, 미국 밖에 알려진 그 어떤 이들보다 더 '유명한' 미국인 엔터테이너였다. 음악성, 지명도, 상업적 성공 등을 모두 종합해 볼 때도 그의 업적을 능가하는 솔로 가수나 밴드를 찾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미국 대중음악에만 시선을 고정, 시대적인 상징성만으로 명인들의 계보를 만든다고 할지라도 40년대의 프랭크 시나트라, 50년대의 엘비스, 60년대의 비틀즈, 70년대의 레드 제플린을 잇는 80년대의 진정한 아이콘은 마이클 잭슨임에 틀림없다. 잭슨의 삶, 퍼스낼리티, 그리고 그의 음악은 오로지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 평생을 달려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이들이 좋아할 수 있는 음악, 다른 세대, 다른 지역, 다른 문화와 인종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들이 하나로 어울려 환호하고 즐거워하고 장난치고 웃을 수 있는 그런 퓨어 팝의, 한때 불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던 그 원대한 꿈을 그는 잠깐이나마 이뤘고, 그 담대함이 가져다준 성공은 큰 대가를 치렀지만 결국에 그 업적들이 오늘날 킹 오브 팝이라는 그의 위상을 선사했다. 21세기 팝이 낳은 가장 위대한 엔터테이너, 잭슨은 잠재력 있는 천재 소년 가수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예술의 경지를 탐하며 그의 모든 것을 꾸준히 연마해 나갔다. 완벽주의에 가까운 프로페셔널리즘과 예술과 음악에 대한 그치지 않는 욕심은 그가 떠난 무대에 미국 팝의 정수라 부를 만한 여섯 장의 레코드로 똑똑히 증언된다. 그리고 팝의 전당에, 음악의 전당에, 대중의 전당에 마이클 잭슨의 별명 킹 오브 팝은 영원히 결번 아닌 결'별명'(retired nick name)되어 언제까지고 남아 있을 것이다.
ㅡ김영대 음악평론가/ 음악취향Y '마이클 잭슨' 특집
팝 음악의 세계에는 마이클 잭슨과 그 외 모두가 있다. 전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킨 이 가수의 인기는 1960년대 비틀매니아를 연상시킨다. 마이클 잭슨은 대중문화 그 자체이지. 단순한 팝 뮤직이 아니다. 이런 가수는 한 시대에 한명 나올까 하는 가수다. 그는 인종 간의 경계를 무너뜨렸으며 흑인 음악을 백인 관객들에게 가져왔다. 그리고 빈민가에서 탈출할 수 있으며, 에너지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1984) 대중음악의 피터팬이자, 성장하기를 거부한 소년인 세계적인 팝 스타 마이클 잭슨은 컴백을 시도했으나 목요일 오후 UCLA에서 사망했다. 잭슨 씨는 50살 인생 중 40년을 대중들의 시선에서 보냈고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와 마찬가지로 잭슨이 음악 세계에 미친 영향력을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이클의 커리어 중 절정에 달했을 때 그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스타였으며 7억 5천만의 레코드[1]를 판매했습니다. 전국의 라디오 방송국은 그의 죽음에 반응하며 노래를 마라톤처럼 송출하고 마이클 잭슨의 혁신적인 뮤직비디오의 결과로 성공한 MTV는 그의 히트곡을 보여주고 있습니다(2009).
뉴욕타임즈 1984년 그리고 2009년
마이클 잭슨은 역사상 최고의 연예인입니다. 여태까지 내가 살면서 본 가장 충격적인 공연은 모타운 25주년에서 마이클이 문워크로 무대를 가로질렀을 때였습니다. 우리는 보자마자 알 수 있습니다. 위대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보다 미치지 못 하는 것은 한 단계 아래라는 것을, 마이클 이전에는 프랭크 시나트라,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비틀즈가 있었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그 위인들과 함께 합니다. 빌리 진은 상업적 성공과 음악적 깊이가 함께 한 그가 만든 가장 중요한 레코드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들은 어떤 노래보다 빌리 진은 가장 훅(hook)이 많았습니다. 빌리 진은 기억하기 쉬우며 빌리 진 안의 모든 악기는 각기 다른 훅을 연주합니다. 당신은 거기서 12가지의 음악적 조각들로 나눌 수 있고 다양한 영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롤링 스톤 2004년 선정 Rock N roll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35위 'Michael Jackson' 설명문
잭슨은 20세기 대중문화의 진정한 아이콘이었다. 1980년대 잭슨신드롬 이후 그 어떤 가수가 그보다 더 엄청난 일을 저질렀을까? 일찍이 전설이 된 엘비스와 비틀스를 빼놓고 대중적 파급효과를 따진다면 잭슨을 능가하는 가수는 아무도 없었다. 이 지구상 모든 인류가 열광한 가수는 잭슨이 유일했다. 그의 음악 앞에선 피부색을 떠나 모든 인종이 하나가 됐다. 매번 그는 당대 최고 수준의 세션 연주자들을 초빙, 빈틈 없는 마술 같은 스튜디오 레코딩을 창조했다. 'Billie Jean' 'Man in the Mirror' 'Black or White' 등 그렇게 탄생된 잭슨의 음악은 지구촌 수억 인구에게 감동과 전율, 눈물과 환희로 다가왔다.
ㅡIZM 2009년, 김獨 기고
마이클 잭슨은 한동안 팝의 황제였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아는 팝의 마지막 황제였다. 그가 등장하기 전에는 프랭크 시나트라와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비틀스가 있었다. 하지만 잭슨 뒤로는 아무리 기교가 좋고 인기가 높은 팝 스타라고 해도 갈수록 분화되는 음악 팬들의 다양한 맛을 맞추지 못했다. 커트 코베인,퍼피,머라이어 캐리,셀린 디온,비욘세,라디오헤드도 '아니올시다'였다. 그의 가장 치열한 경쟁자였던 마돈나마저 그의 수준엔 못 미쳤다...(생략)... 사실 잭슨보다 재능이 뛰어난 연예인이 결코 무대에 오른 적이 없었다. 전설적 댄서인 프레드 아스테어는 잭슨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춤을 칭찬했고 가수로서도 잭슨은 지나치리 만큼 카멜라온이었다. 부드러움과 거침,감칠맛 나는 비통함까지 너무도 다양했다... (생략) ... 특히 음악을 개념화한 뮤지션으로는 아마도 제임스 브라운만이 잭슨과 비슷한 영향력을 가졌을 듯하다. 잭슨과 선견지명 있는 그의 프로듀서 퀸시 존스는 디스코, 소울, 팝을 혼합했다. 사실 그런 음악은 많은 가수가 만들어내 매일 매시간 모든 팝 전문 라디오 방송에서 들린다. 하지만 잭슨의 노래만 한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소니 뮤직 사장을 지낸 토미 모톨라는 잭슨을 “음악 사업 전체의 주춧돌이 됐던 존재”라고 말했다. 안에서 느끼는 그의 삶이 뭐든 간에 밖에서 볼 때 그의 삶은 분명히 천재가 빚어낸 작품이었다. 대성공이라고 하든 기묘한 서커스라고 하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술적 창의성에서나 예술적인 자기 개조에서나 마이클 잭슨 같은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뉴스위크 2009년
마이클, 네 솔로 앨범을 내가 만들고 싶은데 말야.” 나는 그의 눈에 비친 호기심 어린 놀라움에 꼼짝없이 빨려 들어갔다. 나는 우리가 미개척지를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재즈 음악가인 나로서는 소름 끼치는 모험이었지만 말이다. 마이클과 당시 그의 매니저였던 프레디 드맨, 론 와이스너는 에픽 레코즈사를 찾아가 솔로 앨범을 내게 맡기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에픽 레코즈는 내가 너무 재즈풍이라고 여겨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마이클은 사업 수완이 아주 좋았다. 사람들이 과소평가한 그의 특성 중 하나였다. 마이클은 잭슨 파이브 활동으로 음반 사업을 오래 지켜봐 온 터라 음반사를 어떻게 요리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음반사 측에 솔로 앨범을 내게 맡기겠다고 우겼다. 결국 음반사가 두 손을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프 더 월(Off the Wall)’의 작업을 시작했다. 마이클은 부끄러움이 많았다. 내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상태로 소파에 앉아 있으면 그는 뒤에서 나를 등지고 앉아 노래를 불렀다. 보컬 코치인 세스 릭스가 그를 혹독히 훈련해 음역을 넓혔다. 우리는 마치 전투를 치르듯 앨범을 만들었다. 사실 우리는 그처럼 성공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마이클은 그 앨범(Off The Wall)을 계기로 10대용 버블 검 팝에서 벗어나 1980년대 팝음악의 심장에 자신의 깃발을 확고히 꽂았다. 그때부터 나는 마이클을 “내 작은 동생”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지금 세상의 모든 사람처럼 그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 뛰어난 아티스트는 발소리 나지 않는 고양이 같은 우아함으로 무대를 누볐고, 음반업계의 기록을 경신했으며, 세계 전역에서 문화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우리는 80년대에 절정기를 누렸다. 다시는 어느 누구도 그런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리라고 장담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음악 산업을 영구히 바꿔 놓았다. 그런데 어떻게 마이클이 나를 떠났단 말인가? 그는 내 영혼의 일부였다.
ㅡ퀸시 존스 2009년
마이클이 2009년 세상을 떠난 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의 음악은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세계 최대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인 유튜브가 2016년 2월부터 서비스를 선보인 아티스트 통계 자료에 의하면 잭슨은 월 평균 1억 2,000만 이상의 조회수를 꾸준히 기록하여 주간 인기 아티스트 Top 100 순위에서 서비스가 실시된 이래 2018년 5월까지 단 한 주도 빠지지 않고 119주 연속 머물렀다. 세계 최대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인 스포티파이에서도 2016년 소울 장르 최다 스트리밍을 기록, 2018년 5월까지도 월 평균 1,600만 이상의 리스너를 기록하면서(잭슨5/잭슨즈까지 포함하면 2,400만 이상) 월간 최다 스트리밍 아티스트 Top 100 순위에 이름을 계속 올렸고 세계 최대 스크로블링 사이트인 last.fm에서도 주간 인기 아티스트 Top 100 순위에 마찬가지로 계속 이름을 올리고 있다. 또 빌보드 연말 결산 자료에 의하면 마이클은 '앨범차트 Top 200'에서 그해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아티스트 순위에 2013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70위 안에, 그리고 발매되고 18개월 이상된 앨범 중 '앨범차트 Top 200'에서 밀려난 앨범들을 대상으로 판매량을 집계한 카탈로그 결산에서도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아티스트 Top 10 순위에 2012년을 제외하고는 계속 이름을 올렸으며 앨범/싱글 판매량, 라디오 에어플레이, 스트리밍 등을 종합한 순위로서 2014년에 처음 생긴 '아티스트 100 차트'에서는 2018년 5월까지 누적 기준 169주 동안 차트에 머물렀다. 한편 세계 음반 판매량 정보 사이트 'Chartmasters'에 의하면 마이클은 디지털과 스트리밍 세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역대 가장 많이 다운로드/ 스트리밍된 아티스트 순위에서 각각 18위/27위를 기록했다. 여기에 위키피디아 최다 검색어 순위에서도 마이클이 1억 100만 페이지뷰로 미국, 트럼프, 오바마, 인도, 2차 세계전쟁 다음으로 6위에 이름을 올렸으며 앨범 순위에서도 1,400만 페이지뷰로 Thriller 앨범이 1위 그리고 칸예 웨스트, 테일러 스위프트의 앨범과 함께 600만 페이지뷰로 Bad 앨범이 공동 29위에 랭크됐다. 마이클의 음악은 현재까지도 다른 뮤지션들에 의해 많이 차용되고 있는데 실제로 음악 분석 전문 사이트 'Whosampled'에 의하면 마이클은 가장 많이 샘플링/커버/리믹스된 아티스트 순위에서 각각 9위/6위/4위에 랭크됐다. 이외에도 구글 트렌드 통계 자료를 보면 마이클은 인물 전체를 통틀어 매달 미국에서 가장 많이 검색된 인물 50위 안에도 꾸준히 들고 있는데 올해 3월에는 22위를 기록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당시 시대를 산 사람들이 증언하길 산골 밭에서 일하는 할머니/할아버지들도 알 정도였다고 말했다. KBS 연예가중계가 2015년 전국 성인남녀 무작위 1,0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남성 팝 아티스트 부문에서 1위로 선정됐고 2018년에도 같은 조사방식으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댄스가수 부문에서 국내가수들을 모두 제치고 1위로 선정됐다. 일본에서는 태풍 마이클이 별명이라고 한다. 그럼 북한은 어떨까? 김정은은 마이클 잭슨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고 MBC가 보도했는 데 어린 시절을 유럽에서 살았으니 이상할 거는 없다. 그러나 가디언의 보도를 보면 찰스 젠킨스라는 한국전쟁 포로는 2004년에 탈출해서 2008년 기자와 인터뷰 할 때 90년대 이전에 그가 접한 한국음악 이외의 유일한 음악은 러시아로부터 수입된 민족주의 노래 뿐이었다고 말했다. 그 결과, 밀수입된 마이클 잭슨의 카세트 테이프가 그의 손에 들어오게된 90년대 중반까지 그는 마이클 잭슨이 누구인지도 몰랐다고 한 것을 보면 북한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아프리카에 까지도 잭슨의 이름이 알려져 인종차별을 해소하고 있다고 보도되었고 아프리카의 흑인 빈민촌 소년인 제이콥은 제 2의 마이클 잭슨이 되기 위해 춤을 따라 하고 있다니 아프리카의 빈민촌에도 그의 이름은 유명했었으며 물론 당대의 공산주의 국가들에서도 소련은 마이클을 백인에게 영혼을 판 악마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었다. 가만.. 러시아인들도 사실상 거의 백인 아닌가.. 아마존 주민들도 마이클 잭슨은 알아본다.

멕시코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하여 멕시코시티 광장으로 1만 4천명이 집결하여 잭슨의 노래에 맞춰 춤을 선보였는데 이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플래시몹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 게다가 잭슨은 월드 투어가 열린 나라마다 지도자를 만났던 유일한 가수다. 25개국 국가 수장들과 파파라치들을 만났으며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에서는 5개의 부족장들과도 만났다. 특수부대까지 출동한 대통령급 경호 대접을 받았다.

이런 뜨거운 인기를 얻었지만, 93년 성추행 사건 이후에는 부정적인 반응들이 대부분이었다. 80년대 후반 Wacko Jacko 논란으로 이미지에 피해를 입은 적은 있지만 그건 당시까지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의 65%가 마이클 잭슨을 인간적으로 존경한다고 할 만큼, 93년 성추행 사건 이전까지만 해도 마이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많이 긍정적이었지만, 93년 사건 이후 그리고 결혼과 이혼의 반복과, 후에 있었던 또 한 번의 사건으로 인해 명예가 크게 실추됐다. 2005년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의 40%는 마이클이 더 이상 음악 활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응답했고 70%나 마이클을 부정적이라고 응답했다.

하지만 마이클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반전됐는데 2014년 Yougov라는 기관에서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인들의 60%가 잭슨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가장 위대한 로큰롤 뮤지션으로 2위로 뽑는 등 실추된 명예가 회복되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파일:external/cdn.yougov.com/michael2.jpg
당신은 마이클 잭슨에 대해 긍정적/부정적이십니까?
2003년 갤럽 조사 - 긍정 18% 부정 65%
2014년 Yougov 조사 - 긍정 61% 부정 32%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로큰롤 뮤지션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출처 : 파일:56b0bbe7090c76b00a2a.jpg
1위 엘비스 프레슬리 36%
2위 마이클 잭슨 21%
3위 존 레논 9%

참고로 2002년 'ABC'에서도 같은 여론조사를 했었는데 결과는 엘비스가 40% 였고 마이클 잭슨이 2% 였다.

한상철 팝 칼럼니스트는 “가장 거대한 임팩트(impact)를 가진 지구상 가장 완벽한 팝 뮤지션”이라고 평가하였으며 팝 DJ 김광한 씨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로큰롤의 제왕이라면 마이클 잭슨은 장르를 초월한 황제이다"라고 평가하였다. 뉴욕 록 라디오 방송국 WNEW-FM의 피디인 찰리 캔달씨는“그가 굉장한 목소리와 다양한 스타일을 가졌으며, 귀신같이 춤을 잘 춘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는 모든 연령대와 모든 종류의 팝 청취자들에게 어필하죠. 이런 가수는 한 시대에 한 명 나올까 하는 가수죠”라고 평가하였으며 <빌리지 보이스>는“지금까지 스스로 작사, 작곡, 프로듀싱, 어레인지먼트, 의상, 스타일, 안무, 퍼포먼스, 영상, 자신의 이미지 로고 등을 직접 소화해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고독하겠지만 팝은 천재를 만난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각종 매체에서 선정하는 최고의 아티스트 순위에서 상위권에 위치해 있다. 2007년 Q 매거진 편집자 선정 '음악사를 바꾼 21인'(무순위)에 마이클이 포함됐고 2010년에는 VH1에서 200명의 음악전문가와 현역 가수들을 상대로 한 투표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Top 100' 2위를 차지했다. 롤링 스톤은 2004년 로큰롤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특집 기사를 내보내는 가운데 롤링 스톤 선정 100대 아티스트에서 마이클을 35위로[2], 2008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100'에서는 25위[3]로 선정했다. 또한 빌보드는 마이클을 2015년 편집자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알앤비 아티스트 Top 35'에서 1위 그리고 2016년에는 12명의 브라질 음악평론가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완벽한 아티스트 Top 50'에서 2위에 랭크했다. 2014년에는 영국 의회가 설립 80주년을 기념하여 각계각층의 저명한 전문가 25명이 선정하고 전 세계 10,000명의 성인에게 투표를 실시하여 순위를 정한 '지난 80년간 세상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사건 Top 80'에 9.11 테러, 컴퓨터 발명, 핵 개발 등의 사건들과 함께 마이클 잭슨 음악의 영향력이 49위에 뽑혔다. 2017년에는 ThoughtCo 매거진의 마크 에드워드 네로 음악평론가가 작성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울&알앤비 아티스트 20인'에서 1위에 선정됐고 우리나라에서는 1999년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음악전문가 81명과 청취자 1,556명을 대상으로 투표를 실시한 '20세기 최고의 팝 아티스트'에서 전문가와 청취자 모두 마이클이 3위에 올랐다.

간혹 인터넷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비틀즈,마이클 잭슨'이란 말의 의미를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 데 이 3명은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단순히 음악적 경계를 떠나 하나의 대중문화 Icon이 된 전설 3인방(추가적으로는 프랭크 시나트라도 여기에 드나, 한국에서는 시나트라의 존재감이 거의 없기에 언급 조차 안 된다.)을 뜻할 때 자주 쓰이는 것이다. 즉, 이 아티스트들이 다른 아티스트보다 더 위대하다거나 그런 걸 뜻하는 건 아니다. 엄밀히 정의하자면 로큰롤의 태동 시기인 50년대,60년대와 팝의 시대인 80년대는 비교하기에는 대중음악은 사회-정치적 문화와도 긴밀히 연관되기 때문에 비교할 수도 없다.

마이클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개선될 여지가 많다. 90년대 중후반부터는 논란이 되는 사생활 문제와 'Wacko Jacko' 이미지 때문에 평단이나 미디어들, 대중들에게 하도 까여서, 지난날의 명성들이 먹칠을 당했지만 그러나 마이클이 사망하고 나서는 그의 음악적 커리어를 재조명하는 분위기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2004년 쓰인 롤링 스톤의 마이클 잭슨 바이오 그래피를 보면 내용이 가관인 데 첫 줄에 천재라고 썼으면서도 뒤에는 괴물이라고 마이클을 디스함과 동시에 전체적인 내용에서 음악 이야기는 거의 하지도 않고 이게 가십 기사인 지 헷갈릴 지경. 그래도 최근 나온 바이오 그래피는 그때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다.

최종적으로 여러 비평 사이트와 미국 언론들의 마이클에 대한 평가를 정리하면 이렇다. '1970년대 Jackson 5 시절부터 뛰어난 가창력으로 인기 아이돌이 됐으며 Thriller 앨범의 대성공으로 80년대의 팝 음악계의 음악 산업을 뒤흔들었고 지금까지 팝 뮤지션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우리 대부분이 공유할 수 있는 마지막 팝 스타로 그의 음악은 굉장히 유비쿼터스하다.[4] 아마 오늘날의 대중문화 영웅들은 성취할 수 없는 수준(유명세,팝적 인기)이자[5] 제임스 브라운 이후 그의 음악과 춤은 흑인음악의 가장 강력한 절정 중 하나이다.[6] 그러나 역설적으로 감당치 못 할 수준의 엄청난 성공과 재능은 그를 은둔 생활로 몰았으며 사생활 문제는 그를 너무 멀리 보냈다.[7]'

[1] 음반 판매량은 정확한 집계가 절대 불가능하며 마이클의 음반 판매량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추정치 5억장이기에 7억 5천만은 뉴욕타임즈에서 잘못 보도한 것이다. [2]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순위는 아티스트들간의 우열을 내림차순으로 정리한 순위가 아니다. 순위를 보면 80년대와 90년대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들의 순위는 최고가 20위권~30위권대이다. 이 말은 즉슨 80년대와 90년대가 긴 록앤롤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음악적 영향력이 50~70년대 록앤롤 시대를 만든 선구자 아티스트들보다 낮다는 것으로 롤링 스톤 평론가(엄밀히 말해 다 평론가는 아니다, 롤링 스톤은 업계 관계자들에게 투표하라고 했다고 소개했었다.)들은 평가했다는 것이다. 즉 마이클 잭슨이 80년대 팝의 역사에서 음악 산업을 뒤흔든 위대한 전설 중 한 명이 됐지만 그 영향력이 선대 로큰롤 선구자들과 비교하면 로큰롤 음악사에서 가지는 영향력은 낮다고 본 것이다. [3] 이 외에도 위대한 ~ 시리즈를 몇 차례 더 뽑았는데 롤링 스톤의 이런 순위들은 당연하게도 위의 설명한 것처럼 로큰롤 역사 관점에서 본 것이기 때문에 50~70년대 로큰롤을 확립한 선구자들이 높은 순위를 차지할 확률이 높다. 여기서 SInger는 좀 더 목소리,보컬로서의 의미를 둔 것인데 가창력 순위는 절대 아니니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4] 유명한 록 평론가 robert christgau의 마이클 사망 이후 글에서 발췌 [5] 뉴욕타임즈 [6] 빌리지 보이스 [7] 거의 모든 언론에서 언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