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도보통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1권 | 찌르는 무기 | 장창(長槍), 죽장창(竹長槍), 기창(旗槍), 당파(鐺鈀), 기창(騎槍), 낭선(狼先) |
2권 | 베는 무기 | 쌍수도(雙手刀), 예도(銳刀), 왜검(倭劍), 교전(交戰)1 | |
3권 | 제독검(提督劍), 본국검(本國劍), 쌍검(雙劍), 마상쌍검(馬上雙劍), 월도(月刀), 마상월도(馬上月刀), 협도(挾刀), 등패(藤牌) | ||
4권 | 치는 무기 | 권법(拳法), 곤방(棍棒), 편곤(鞭棍), 마상편곤(馬上鞭棍), 격구(擊毬), 마상재(馬上才) | |
1:흔히들 왜검교전이라고 이야기하나 무예도보통지에는 '교전' 이라고만 되어 있다. | }}} |
1. 개요
馬上才마상육기의 하나. 무예도보통지 4권이자 맨 마지막에 실린 무예. 말 위에서 일종의 재주를 부리는 기예이며, 정조 시대에는 조선의 모든 기병들이 필히 익혀야만 했던 매우 기본적인 무예였다.
2. 설명
격구와 더불어 왜 무예인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많으나 이는 오늘날의 무술에 대한 잣대로 과거를 바라보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당시는, 말 위에서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신체의 탄력이 곧 기마궁술, 기마창술, 기마검술로 연결되는 매우 기초적인 훈련으로 볼 수 있는 시대였다. 말 위에서 몸을 격렬하게 움직일 수 있는 탄력이 없으면 앞의 마상 무술들은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한민족의 기마술이 매우 대단했으며 북방기마민족설에 대한 실질적인 역사자료가 되기도 하는데,[1] 조선이 좁은 반도였고 기마부대를 그렇게 폭넓게 운용할 이유가 별로 없는데도 꾸준히 육성하고 무예의 일환으로 다룬 것에는 의미가 있다.
조선시대의 마상재 중에는 상당히 수준이 높고 위험한 기술들이 많았다. 특히 일본에 통신사로 가서 시연을 보였던 기병들은 칭송이 일본열도를 뒤흔들 정도였으며, 통신사가 올 때 꼭 마상재 하는 사람들을 보내달라고 할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더 나아가 마상재는 전국시대와 에도 막부를 거치며 의장용 마술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던 일본의 마술에 깊은 영향을 주기도 했는데, 카와고에 번(현재의 사이타마 현)에서 새로이 성립된 마술 유파인 조선류요마술(朝鮮流要馬術)이 그 대표적인 예시이다. 조선류요마술은 그 창시자 가문인 유사씨와 친분 관계가 있던 나카야마 요시타케에 의해 일본 제2의 말 생산지였던 토사 번(현재의 고치현)으로 전파되면서 더욱 유명해져 서양 마술이 들어오는 19세기 말 전까지 토사 번을 대표하는 세 가지의 마술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출처: 이명진,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마상재(馬上才) 공연과 일본의 마술(馬術) : 조선류요마술(朝鮮流要馬術)을 중심으로, 영남대학교 대학원, 2019년 2월
마상무예를 연마하는 말들은 전체적으로 다리가 짧으며 몸이 튼튼한 호마를 사용하였다.
지금도 무예도보통지의 마상재 캡쳐 짤들은 조선시대 과거 제도가 얼마나 빡빡했는지 농담삼아 강조할 때 자주 언급된다. 말 등에서 꼿꼿하게 선 다음 옆으로 각각 1회씩 윈드밀을 도는 삽화를 보면 문과뿐만 아니라 무과 역시 고인물 판이었으리라는 상상이 되는 것이다.
요즘에는 기병이 거의 사라져서 보기 힘들지만, 여전히 비슷한 남아있는 곳이 있는데, 인도 육군의 오토바이 묘기다.
3. 매체에서의 등장
태왕사신기에서는 수지니가 마상재의 동작들을 응용해서 활을 쏘는 장면이 있는데 상황과 관계없어서 뜬금없는 장면 중 하나.
[1]
한민족 북방기마민족설의 또다른 증거자료로 한복이 있다. 한복의 스타일은 북방유목민족적 요소가 많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