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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루 1세 | 페드루 2세 |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레오폴디네 | 로이히텐베르크의 아멜리 | 양시칠리아의 테레사 크리스티나 | |||
황제 · 황위 계승자 | }}}}}}}}}}}} |
<colbgcolor=#FAFAD2><colcolor=#000000> 브라질 제국 페드루 1세의 황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레오폴디네 Maria Leopoldine von Österrei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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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독일어 |
마리아 카롤리네 요제파 레오폴디네 프란치스카 페르디난다 (Maria Caroline Josepha Leopoldine Franziska Ferdinanda) |
포르투갈어 |
마리아 카롤리나 조제파 레오폴지나 프란시스카 페르난다 (Maria Carolina Josefa Leopoldina Francisca Fernand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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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97년 1월 22일 | |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 쇤부른 궁전 | ||
사망 | 1826년 12월 11일 (향년 29세) | |
브라질 제국 리우데자네이루 상 크리스토방 궁전 | ||
배우자 | 페드루 1세 (1817년 결혼) | |
자녀 | 마리아 2세, 미겔, 주앙 카를루스, 자누아리아, 파울라, 프란시스카, 페드루 2세 | |
아버지 | 프란츠 2세 | |
어머니 |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 | |
형제 | 루도비카 엘리자베트, 마리 루이즈, 페르디난트 1세, 마리아 카롤리네, 카롤리네 루도비카, 클레멘티나, 요제프 프란츠, 마리아 카롤리네, 프란츠 카를[1], 마리아 안나, 요한 네포무크, 아말리에 테레지아 |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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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 프란츠 2세의 딸이자 브라질 제국의 페드루 1세의 첫 번째 황후.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와 파르마 여공작 마리 루이즈의 동생이다.
2. 생애
2.1. 유년기
1797년 1월 22일에 쇤부른 궁전에서 프란츠 2세와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의 6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애칭은 폴디(Poldi). 10명이 넘는 형제자매들 중에서 언니 마리아 루도비카와 가장 친했다.마리아 레오폴디네는 여러 언어와 그림, 음악, 역사, 승마 등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0살 때 어머니를 잃고 모데나의 마리아 루도비카 베아트릭스를 새어머니로 맞이하게 되었다.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교육을 잘 받은 여성이었던 마리아 루도비카 베아트릭스를 매우 따랐다.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새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예술적 소양을 크게 키울 수 있었다.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궁중의 엄격한 교육 아래서 박애적이고 지적인 여성으로 성장했다. 특히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6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아름다운 금발과 크고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으나, 살찐 체형에 합스부르크 가문 특유의 주걱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입술이 튀어나와 보이는 걸 많이 신경쓰곤 했다.
2.2. 결혼
19살이 되는 1816년에 포르투갈 왕국과의 혼담이 오가게 되었다. 그 대상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 인해 브라질로 피신가 있는 상태인 브라간사 왕가의 왕세자 페드루였다. 미남자로 유명한 페드루와의 혼사에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매우 설레어하며 브라질에 대해 공부했다. 그러나 프란츠 2세는 탐탁지 않아 했는데, 페드루는 20살이 되기도 전에 정부(情婦)를 임신시킬 정도로 문란하고 바람기 많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이 결혼을 적극적으로 추진시킨 오스트리아 대사마리아 레오폴디네는 소문대로 잘생긴 페드루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는데, 페드루는 그리 좋은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통치 가문의 공용어인 프랑스어를 잘하지 못해 부부는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리고 페드루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프랑스 출신 댄서와 만나고 다녀서 페드루의 아버지 주앙 6세가 그녀를 추방시켜야 했다. 그러나 지적인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페드루에게 정치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1819년, 훗날 마리아 2세가 되는 첫 자식 마리아를 출산했다. 이후 매년 임신과 출산을 반복했다.
2.3. 브라질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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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대신 섭정으로 각료회의에 참석한 마리아 레오폴디네, 1822년 |
1821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몰락하고 브라간사 왕가는 포르투갈 왕국으로 돌아갔다. 포르투갈과 브라질에는 자유주의의 영향이 퍼져 사람들은 입헌군주제를 요구했으며, 브라질은 더이상 식민지로 남지 않고 포르투갈과의 연합왕국을 형성할 것을 요구했다. 페드루와 마리아 레오폴디네 또한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주앙 6세는 전제군주로 남고자 했고 사람들은 반발했다. 브라질인들은 포르투갈로부터의 독립을 희망하며 페드루가 브라질의 군주가 되길 바랐다.
페드루는 브라질로 향해 독립을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수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섭정직을 맡았다. 1822년 9월 2일, 각료회의에서 남편 페드루 대신 다른 중임들과 회의했다. 회의 결과 브라질의 독립을 지원하기로 결정되어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당시 상파울루 지방에 있던 페드루 왕자에게 전령을 보냈고, 이는 1822년 9월 7일 브라질 독립으로 이어졌다. 10월 17일에 브라질 제국이 선포되면서 페드루는 브라질의 페드루 1세로 즉위하고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브라질의 황후가 되었다. 브라질의 첫 황후이자 브라질에 애정을 가지고 독립을 지원한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브라질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마리아 레오폴디네의 인생은 황후가 된 후 불행으로 치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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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황후 마리아 레오폴디네, 1822년 |
페드루 1세는 상파울루에서 한 하급장교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페드루 1세는 도미틸라 데 카스트로(Domitila de Castro)라는 이름의 이 여성을 정부로 삼고 리우데자네이루의 궁에 불렀다.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원치 않았지만 페드루 1세는 도미틸라를 황후의 시녀로 만들고 산토스 여후작 작위를 주었다. 페드루 1세는 도미틸라와의 애정을 과시하면서 점점 마리아 레오폴디네를 함부로 대했다. 페드루 1세와 도미틸라의 딸은 황녀들과 같은 교육을 받았다. 득의양양해진 도미틸라는 마리아 레오폴디네의 머리 꼭대기에 오르려 들었다.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도미틸라를 "매혹적인 괴물"이라고 칭했다. 페드루 1세는 자신의 정부에게 불만이 있는 마리아 레오폴디네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궁인들은 황후를 동정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녀로서 자부심이 강했던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이런 모욕을 참을 수 없어 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친정 가족들은 마리아 레오폴디네의 상황을 이해하려 들지 않고 답장도 잘 하지 않았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1826년부터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1826년 3월 10일, 주앙 6세가 사망하면서 페드루 1세는 포르투갈의 페드루 4세를,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포르투갈의 왕비를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즉위하고 약 2달 후 페드루 1세는 딸 마리아 2세에게 포르투갈의 왕위를 물려줬다.
2.4. 사망
일설에 따르면 1826년 12월 1일, 페드루 1세는 임신한 마리아 레오폴디네의 배를 걷어차 조산을 초래했다. 아이는 죽었으며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열흘 뒤인 12월 11일에 숨을 거두었다. 브라질인들은 황후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고 페드루 1세를 비난했다. 하지만 당시 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전선에 있었기 때문에 이는 사실이 아니다.[2]마리아 레오폴디네의 유해는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아주다 수녀원에 안장되었다. 이후 수녀원이 없어지자 성 안토니오 수도원에 이장되었다가 1954년에 상파울루에 있는 브라질 독립기념비[3]로 옮겨졌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레오폴디네 (Maria Leopoldina of Aust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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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2세 (Franz II) |
<colbgcolor=#ffffe4,#323300>
레오폴트 2세 (Leopold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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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1세 (Franz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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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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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Maria Louisa of Spa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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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3세 (Carlos I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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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Maria Amalia of Saxon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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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 (Maria Theresa of Naples and Sicil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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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도 1세 (Ferdinando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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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3세 (Carlos I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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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Maria Amalia of Saxon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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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 (Maria Carolina of Aust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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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1세 (Franz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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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ia) |
3.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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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있는 마리아 레오폴디네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마리아 2세 (Maria II) |
1819년 4월 4일 | 1853년 11월 15일 |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오귀스트 |
페르난두 2세 슬하 6남 2녀[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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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 |
베이라 공 주앙 카를로스 (João Carlos, Prince of Beira) |
1821년 3월 6일 | 1822년 2월 4일 | |
2녀 |
아퀼라 백작부인 자누아리아 (Princess Januária, Countess of Aquila) |
1822년 3월 11일 | 1901년 3월 13일 |
아퀼라 백작 루이지 슬하 3남 1녀 |
3녀 |
파울라 공주 (Princess Paula) |
1823년 2월 17일 | 1833년 1월 16일 | |
4녀 |
주앵빌 공비 프랑수아즈 (Francisca, Princess of Joinville) |
1824년 8월 2일 | 1898년 3월 27일 |
주앵빌 공 프랑수아 왕자[5] 슬하 1남 2녀 |
2남 |
페드루 2세 (Pedro II) |
1825년 12월 2일 | 1891년 12월 5일 |
테레사 크리스티나 슬하 2남 2녀 |
4. 여담
- 사망하기 3일 전에 언니 마리 루이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 합스부르크 가문의 희생자'라 부르며, "나는 곧 남편의 폭력에 의해 죽을 거야"라는 비통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 아이러니하게도 남편 페드루 1세는 첫 아내인 마리아 레오폴디네에게 가정폭력을 휘두르다 못해,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면서 2번째 아내인 로이히텐베르크의 아멜리에게는 잘 대해 주었다. 마리아 레오폴디네의 죽음 이후 반성했다는 말이 있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 브라질의 에스피리토 산토에 위치한 시정촌인 산타 레오폴지나가 마리아 레오폴디나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2021년에 브라질에서 발견된 신종 공룡인 '베르타사우라 레오폴디네(Berthasaura leopoldinae)'는 브라질의 여성 과학자 베르타 루츠와 마리아 레오폴디네의 이름을 합쳐서 명명되었다. 기사
[1]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아버지
[2]
다만 평소에 황후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이것이 그녀가 젊은 나이에 사망한 주요한 원인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기에 페드루 1세가 재혼을 하려 하자, 다른 여러 나라의 공주들은 청혼을 거절하였으며 이에 페드루는 마리아에게 심하게 대한 것을 후회하고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말대로
로이히텐베르크의 아멜리와 재혼한 후 도미틸라를 궁정에서 내보낸 뒤 불륜도 저지르지 않고 아내에게만 충실했다고. 살아있을 때 잘할 것이지
[3]
독립기념관 역할이다.
[4]
페드루 5세,
루이스 1세,
작센의 게오르크 왕자비 마리아 아나, 호엔촐레른 공비 안토니아 등
[5]
루이필리프 1세의 3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