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5 23:32:40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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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
(영어: George Maniakes, 그리스어: Γεώργιος Μανιάκης)
출생 998년
사망 1043년
직위 텔루크 군사총독, 이탈리아 속주 총독
반란 대상 콘스탄티노스 9세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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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마케도니아 왕조의 반란자. 군사적 역량이 탁월한 장군이었지만, 지나치게 독선적이고 과격한 언행으로 인해 지배층에게 배척당하자 콘스탄티노스 9세에게 반역을 꾀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2. 생애

아르메니아계 군사귀족 가문 출신의 동로마 장군이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자이자 역사가, 정치인인 미하일 프셀로스는 그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는 키가 3m가 채 안 돼서 사람들이 언덕 꼭대기나 높은 산을 보듯 눈을 들어올려야 했다. 그의 태도는 부드럽지도, 유쾌하지도 않았지만, 언제나 폭풍우를 연상시켰다. 그의 목소리는 천둥처럼 들렸고, 손은 벽을 허물거나 청동문을 부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사자처럼 뛸수 있었고, 눈살은 끔찍했다. 그의 모든 것은 과도했다. 그를 본 사람들은 그에게서 절제되었다고 볼 법한 어떤 인상착의도 발견하지 못했다.

1030년, 로마노스 3세는 알레포를 치기 위해 출전했다가 아자즈 전투에서 기습 공격을 받고 패퇴했다. 이후 사라센 기병대 800명은 동로마 진영에서 노획한 전리품을 가득 실은 채 텔루크 ( 가지안테프)로 다가왔다. 그들은 황제가 전사했고 제국군 전체가 괴멸되었다는 과장된 소식을 전하며 이튿날 아침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보복하겠다고 협박했다. 당시 텔루크 군사 총독이던 그는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며 사라센 진영에 많은 음식과 술을 보내주고 자신과 병사들은 동이 트자마자 항복하고 시가 소유한 금과 보물을 내놓을 것이라 약속했다. 사라센군은 크게 기뻐하며 술을 마음껏 마셨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이튿날 새벽 기습을 가해 곯아 떨어진 사라센 기병 800명을 순식간에 도륙하고 모든 시신에서 코와 귀를 잘라냈다. 이후 그는 패주한 로마노스 황제를 카파도키아에서 만나 800개의 코와 1600개의 귀를 내놓았다. 그러자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그를 하(下) 메디아의 군사 총독으로 임명해 유프라테스 상류 유역의 모든 도시들을 다스리게 했다. 이후 사라센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했고 1032년엔 에데사를 공략했다.

1038년, 이탈리아 속주 총독으로 임명된 그는 아랍인들을 시칠리아 섬에서 몰아낼 임무를 부여받았다.( 마니아케스의 시칠리아 원정) 그의 군대는 칼라브리아와 마케도니아에서 차출된 정규군, 케카우메노스가 지휘하는 아르메니아 보병 500명과 기병 300명, 랑고바르드군, 그리고 노르만 용병 300~500명, 바랑인 친위대로 구성되었다. 그는 1038년 늦여름 시칠리아에 도착한 뒤 사라센군을 상대로 밀어붙어 삽시간에 메시나를 손에 넣었고, 레르모로 가는 북부 해안 도로와 메시나를 잇는 고개를 통제하는 중요한 요새인 로메타도 격전 끝에 함락시켰으며, 1040년에 시라쿠사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시라쿠사를 공략한 직후, 그는 문제에 부딪쳤다. 먼저 노르만 용병대가 전리품 분배에 불만을 품고 군대를 떠났으며, 살레르노 공국이 파견한 랑고바르드군 대장 아르두인이 생포한 말을 바치라는 요구를 거절하자 그를 붙잡아 두들겨 팼다. 이에 열받은 아르두인은 원정군을 이탈했다. 게다가 황제의 매제인 스테파노스와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그는 스테파노스가 해안가의 도시들을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사라센군이 도시를 탈출하는 걸 허용한 것에 분노해, "네놈이 남자인지 의심스럽다"면서 황제에게 즐거움이나 주는 자(즉 남색 상대라는 의미)일 뿐이라고 조롱했으며, 심지어 공개적으로 채찍질을 했다. 스테파노스는 복수를 결심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을 보내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결국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가 투옥되었다. 그 후 스테파노스가 원정군 총사령관을 맡았으나 얼마 안가 병사했고, 환관 바실리오스가 그 뒤를 이었지만 변변치 못해 원정군의 사기가 뚝 떨어지는 걸 막지 못했다. 결국 원정군은 힘을 잃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042년에는 마지막 전초기지인 메시나를 다시 뺏겨 시칠리아 재정복이 무산되었다.

1041년 말 미하일 5세가 즉위한 뒤, 반역을 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석방되었다. 그는 1042년 4월 이탈리아로 돌아가 아르이로스를 지도자로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킨 노르만 용병대를 상대로 맞섰다. 그런데 로마노스 스켈로스와 땅 문제로 갈등을 빚으면서 또 문제가 터졌다. 스켈로스는 아나톨리아에서 드넓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는데, 그의 토지와 인접했고 이로 인해 땅 경계선을 놓고 오래도록 분쟁을 벌였다. 스켈로스는 자신의 아름다운 여동생 스켈레리나에게 콘스탄티노스 9세를 찾아가 호소하게 하였고, 제멋대로 그의 집을 뒤지고 그의 아내를 유혹하기도 했다. 급기야 그에게 아풀리아의 지배권을 자신이 갖는 걸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더는 참지 못하고 스켈로스를 처단한 뒤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104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다가 테살로니카 인근에서 환관 스테파노스 파르게메노스가 지휘하는 제국군과 맞붙었다. 미하일 프셀루스의 기록에 따르면,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전사했다고 한다. 살아남은 반란군은 당나귀에 등을 댄 채 원형 경기장에서 행진하는 굴욕을 감내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