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6 18:37:40

리처드 오언

<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리처드 오언
Richard Owen
출생 1804년 7월 20일
잉글랜드 랭커셔주 랭커스터
사망 1892년 12월 18일
잉글랜드 런던 리치먼드 파크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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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생물학자
학력 에든버러 대학교

1. 개요2.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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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생물학자. 공룡(恐龍, Dinosaur)이란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 사용한 생물학자이다. 당대에도 천재라고 인정받아 명성높은 프랑스의 해부학자인 조르주 퀴비에가 제자로 받아들였고, 고생물학자 및 온갖 생물 연구, 화석 연구, 논문 저술 등등으로 경 작위와 훈장도 받았을 정도로 유능한 학자이자 나이 서른 초반에 영국 왕립대학교 교수가 될 정도의 인재였으며 스웨덴, 네덜란드 왕립연구소와 미국 국립연구소에서 드물게 외국인 회원으로 임명될 정도로 해외에서 인정받았다. 이후로도 온갖 동물 연구라든지 화석 연구에 엄청난 업적을 남겼으며 1856년에는 대영박물관 자연관장에 임명된 한편 20년의 노력끝에 1881년, 영국 자연박물관 설립에도 공헌했다.

2. 성격

"그렇게 재능 있는 사람이 그렇게 비열한 짓을 하던 것이 안타깝다"
기디언 만텔(Gideon Mantell,1790~1852)
"그렇게 재능을 가진 오언이건만 그에게 후계자같은 제자들조차 하나도 없다는 게 신기하다. 그만큼 그의 성격이 엉망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찰스 다윈
"그는 가장 뛰어난 척추동물학자이자 고생물학자이지만...가장 기만적이고 혐오스러운 사람이었다."
리처드 브로크 프리먼(Richard Broke Freeman, 1915년 4월 1일 ~ 1986년 9월 1일)

그러나, 이런 업적을 다 말아먹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그의 성격이었다. 이기적인데다 오만방자했던 오언은 다윈을 비롯한 동료 과학자들과 시사건건 반목해왔다. 특히 오언은 기디언 만텔이 오랜 세월 동안 연구하며 이룩한 이구아노돈에 대한 연구 공로를 빼앗으려 했고 만텔이 죽은 이후인 1860년 4월 Edinburgh Review 란 잡지에서 익명으로 만텔의 업적을 비하하고 자신을 변호하는 짓을 벌였다. 심지어 이런 이기적인 태도는 제자들에게도 얄짤없었다.

오언의 이런 성격은 죽을때까지 그의 발목을 잡았는데 만텔의 업적을 빼앗으려던 것이 들켜 학계에서 온갖 비난을 받으며 만장일치로 마흔이란 한창 나이에 대학교수에서 쫓겨나야했고 익명으로 쓴 기사도 들통나 온갖 비난을 받아야 했다. 심지어 20년 넘게 노력하며 크게 이바지한 자연사박물관의 초대 박물관장 임명안 투표에서도 오언을 임명하는 것에 대해 반대표가 많았을 정도.

그나마, 여왕이 중재하여 가까스로 초대 박물관장에 올랐으나 이미 70대 후반에 당시로도 엄청 나이가 든 상태였기에 사실상 명예적 보상이나 다름없었고 그 와중에도 박물관 관계자들과 크고 작은 다툼을 계속 벌인 끝에 3년만에 관장에서 물러나야 했다.

끝내 오언은 학계에서 철저하게 버려져 늘그막을 쓸쓸하게 살다 죽었고 장례식에도 친척과 유족 일부만 참여하는 등, 이룬 업적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최후를 맞았다. 그랑 반목하던 찰스 다윈이 죽을때, 영국 여러 언론이 대문짝만큼 크게 보도하고 장례식도 사회 각계층 인사들이 참가하며 화려하게 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러진 것이랑 대조적이다. 다윈이 죽을때, 더 타임스만 해도
이젠 영국이 다윈을 위대하게 포장하는 데 안달이 났다. 물론 그는 당연히 그럴 자격이 있는 인물이다.
라고 기사를 낼 정도였지만 오언은 그런 거 전혀 없이 언론도 조용하게 짧막히 보도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