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9 09:26:19

리처드 멘터 존슨

<colcolor=#0d1635>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ececec, #fff 20%, #fff 80%, #ececec)"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에런 버 조지 클린턴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엘브리지 게리 대니얼 D. 톰킨스 존 C. 칼훈 마틴 밴 뷰런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리처드 멘터 존슨 존 타일러 조지 M. 댈러스 밀러드 필모어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윌리엄 R. 킹 존 C. 브레킨리지 해니벌 햄린 앤드루 존슨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스카일러 콜팩스 헨리 윌슨 윌리엄 A. 휠러 체스터 A. 아서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토머스 A. 헨드릭스 리바이 P. 모턴 애들레이 E. 스티븐슨 개릿 A. 호바트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찰스 W. 페어뱅크스 제임스 S. 셔먼 토머스 R. 마셜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캘빈 쿨리지 찰스 G. 도스 찰스 커티스 존 낸스 가너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헨리 A. 월리스 해리 S. 트루먼 앨번 W. 바클리 리처드 닉슨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린든 B. 존슨 휴버트 험프리 스피로 애그뉴 제럴드 포드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넬슨 록펠러 월터 먼데일 조지 H. W. 부시 댄 퀘일
제45대 제46대 제47대 제48대
앨 고어 딕 체니 조 바이든 마이크 펜스
제49대 제50대
카멀라 해리스 J. D. 밴스
}}}}}}}}}}}}

<colbgcolor=#ececec,#fff><colcolor=#0d1635>
미합중국 제9대 부통령
리처드 멘터 존슨
Richard Mentor Johnson
파일:Vice President R. M. Johnson.png
출생 1780년 10월 17일
미국 버지니아주 베어그래스[1]
사망 1850년 11월 19일 (향년 70세)
미국 켄터키 프랭크퍼트
재임기간 제9대 부통령
1837년 3월 4일 ~ 1841년 3월 4일
서명 파일:리처드 멘터 존슨 서명.svg
부모 아버지 로버트 존슨
어머니 제미나 존슨
배우자 줄리아 친
자녀 2명
학력 트랜실베니아 대학교
종교 개신교 ( 침례회)
정당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제9대 부통령.

2. 생애

1780년 오늘날의 켄터키 루이빌인 당시 버지니아주 베어그래스에서 11명 중 5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트랜실베니아 대학교를 졸업한 후 변호사로 활동하였으며, 1804년에 켄터키 주 하원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806년에는 연방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연속 6선에 성공했다. 미영전쟁이 발발하자 켄터키에서 의용군을 모집해 대령으로 참전했고, 테쿰세를 전사시켰던 템스 강 전투에도 참여하는 등 공적을 세웠으나 부상을 입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하원으로 완전히 복귀해 군사 관련 업무, 미망인과 고아들을 위한 연금 확보, 서부 내 기반시설 확충 등에 주력했다.

1818년 초에 하원에서 은퇴할 의사를 밝힌 후 Class 3 상원의원 선거에 도전하여 낙선하였으나, Class 2 현직 상원의원이 사임한 후 그 궐석을 채울 후임자로 선출되었다. 1822년에 상원의원 재선에 성공한 후, 1824년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에는 헨리 클레이, 클레이와 존 퀸시 애덤스의 연대 이후에는 앤드루 잭슨을 지지했다. 1828년에 민주공화당 내 잭슨 파벌이 민주당을 창당했을 때 합류했고, 세번째 임기에 도전하였으나 사실혼 관계였던 혼혈 노예 Julia Chinn과의 관계 때문에 재선에 실패하고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하원에 복귀한 존슨은 우체국 및 우편 도로 위원회 위원장(21~22대 의회), 군사위원회 위원장(22~24대 의회)을 역임했고, 1832년 대선 출마를 시도하였으나 잭슨이 재선 출마를 결정하면서 출마를 포기했다.

1836년 대선에서 마틴 밴 뷰런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했는데, 선거 자체는 민주당이 승리하였고 마틴 밴 뷰런도 선거인단 과반을 훌쩍 넘긴 170표를 얻으며 대통령 당선을 확정지었으나 정작 존슨 본인은 버지니아 선거인단(23명) 전원이 불충실한 선거인단으로 다른 인물에게 투표한 탓에 과반에 1표 미달하는 147표를 확보하는 데 그쳤다. 결국 상원이 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고, 상원 표결에서 33:16[2]로 휘그당 프랜시스 그레인저를 꺾고 부통령에 선출되었다.[3] 부통령이 된 이후에는 별다른 정치적 행보를 보이지 않았고, 1840년 대선에서 민주당은 존슨을 포함한 어떤 부통령 후보도 공식 지명하지 않은 채 윌리엄 해리슨- 존 타일러의 휘그당에 패배하여 정권을 내주었다.

부통령직에서 퇴임한 후 존슨은 켄터키 주 하원의원을 두 차례(1841~1843, 1850) 역임한 것 이외에는 상원의원 선거(1842),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1844), 켄터키 주지사 선거(1848) 등에서 낙선했고, 1850년 11월에 주 하원의원으로 복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 오늘날 켄터키 루이빌. [2] 당시 상원 정원은 52명이었으나 3명이 결석했다. [3] 미국 역사에서 상원이 부통령을 선출한 사례는 해당 사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