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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웨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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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 부주임
정체 李維漢
건체 李维汉
한국식 독음 이유한
영문 Li Weihan
본명 호우루(厚儒)
화생(和笙)
출생 1896년 6월 2일 청나라 후난성 창사부 창사현
사망 1984년 8월 11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png
학력 후난성 제1사범학교 졸업
직업 정치가
종교 없음( 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중일전쟁 및 국공내전 시기2.3.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3. 가족관계4. 참고 문헌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1919년 프랑스로 유학가서 중국 공산당 유럽지부의 건립 작업에 참여했고 중국으로 귀국해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앙위원회에서 활동하다가 대장정에 참가했다. 중일전쟁 시기 산시성 영변구 정부비서실장을 지냈고 국공내전 시기 중국 공산당 중앙 도시공작부 부부장을 맡았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공산당 중앙 통전부장을 역임했다. 문화대혁명 때 박해받았으나 마오쩌둥 사망 후 복권되었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파일:Li_Weihan.jpg
1920년대 리웨이한

1896년 4월 21일, 리웨이한은 후난성 창사부 창사현의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916년, 그는 후난성 제1사범학교에 입학했고 1917년 여름에 졸업하였지만 학교에 남아 초급부 주임을 맡았다. 1918년 4월, 리웨이한과 마오쩌둥, 차이허썬(蔡和森) 등은 신민학회를 창립했다. 이후 리웨이한은 1919년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근근히 일하면서 차이허썬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전파받았다. 1922년 6월, 그는 저우언라이, 자오스옌(趙世炎) 등과 함께 유럽 주재 중국년공산당을 설립하고 행정 조직과 선전 공작 업무를 맡았다. 이후 1922년 말에 귀국해 마오쩌둥과 치이허썬의 소개로 중국 공산당에 입당해 중국 공산당의 초기 당원 중 한 명이 되었다.

1923년 4월, 리웨이한은 상하이 공산당 중앙으로 전근되어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 중공 상하이구 집행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25년 1월엔 중국 공산당 4대 위원회에 출석하여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에 당선되었고 1927년 5월엔 중국 공산당 5대 대회 후 중앙정치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뒤이어 중앙사무총장에 선임되었다. 1927년 7월 12일,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공산당 중앙 개편이 시행되어 임시 중앙 상무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때 리웨이한은 임시 중앙상무위원회의 위원 5인 중 한 명이었다.

1927년 8월 7일, 리웨이한은 취추바이와 함께 8,7 회의를 주재하여 의장을 맡았다. 그가 주재한 이 회의에선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라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무력 투쟁을 위주로 혁명활동을 전개하기로 했으며 국민당과 협조하는 노선을 추구한 천두슈 등의 실권을 박탈했다. 리웨이한은 회의 후 중국 공산당 임시 정치국을 구성하고 상무위원과 조직부장을 맡았다. 1928년 4월 중국 공산당 대표들이 제 6차 중국 공산당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을 때, 리웨이한과 런비스, 라등현(羅登賢)은 상하이에서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대표하여 국내 업무를 처리하도록 지시받았다. 6대 회의 이후, 그는 중앙 순시원을 맡아 상하이 근무지를 시찰했다.

리웨이한은 1929년 봄부터 중국 공산당 장쑤성 위원회 겸 상하이 위원회 조직부장을 역임했으며 후에 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1930년 9월 중국 공산당 3기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중국 공산당 장난성 당서기 겸 상하이 서기를 역임했다. 1931년 1월 중국 공산당 4중전회 때는 중앙위원 및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직에서 물러났고 회의 후 모스크바로 가서 공부했다.

1933년, 리웨이한은 귀국하여 강서 소구에 가서 중국 공산당 중앙조직부 간사를 맡고 후임 부장을 지냈다. 이때 그는 28인의 볼셰비키 핵심 일원으로서 코민테른의 지침을 중국에 그대로 적용하기 위해 자신과 맞지 않는 현지 간부들을 숙청하려는 보구의 뜻에 따라 뤄밍(羅明), 덩샤오핑에 대한 비판에 동참했다. 그후 1934년 6기 5중전회에서 후보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었다.

1934년 10월, 국민혁명군의 초공작전에 대한 보구, 오토 브라운 등의 야심찬 반격 작전이 대실패로 끝나고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의 수도 루이진이 함락될 위기에 몰리자, 공산당은 대장정을 감행했다. 이때 리웨이한은 대장정에 참가하여 군사위 2종대 사령관 겸 정치위원을 지냈다. 1936년 9월, 그는 중국 공통정변 소수민족 공작위원회 서기를 맡았고 1937년 1월 중국 공산당 산시성 당서기를 역임했다. 1937년 3월, 그는 중국 공산당 대중공작위원회 서기를 맡았으며 뒤이어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 교장을 맡았다.

2.2. 중일전쟁 및 국공내전 시기

1938년 4월, 리웨이한은 산북공학 부총장으로 전임되었다. 그해 7월, 그는 산시성의 순읍현(栒邑縣) 산북공학 분교 교장을 맡았다. 또한 1939년 1월부터 중국 공산당 중앙간부 교육부 부부장, 산북공학교장, 중국 공산당 서북 공작위원회 비서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민족 문제제강>과 <몽골민족 문제제강>의 초안을 작성했는데, 두 제강 모두 중앙의 토론을 거쳐 비준되었다. 1940년 10월, 리웨이한은 중국 공산당 중앙선전부 부부장 겸 중앙연구원 신무연구실과 교육연구실 주임을 맡았으며 1942년부터 정풍운동에 참가했다. 1942년 9월엔 중국 공산당 서북중앙국 위원, 산시성 영병구정부 사무총장을 지내면서 생산을 발전시키는 데 전념했고 문화교육 및 위생사업과 소수민족 사업을 전개했으며 "3.3제"[1]에 기반한 지방 정권을 건설했다.

1946년 4월, 리웨이한은 중국 공산당 대표단에 참가해 충칭과 난징, 상하이 등지에서 저우언라이를 보필해 국공협상을 진행했다. 그후 1946년 말 중국 공산당 중앙도시공작부 부부장을 역임했으며 1948년 5월에 부장을 역임했다. 1948년 10월, 도시공작부는 중공중앙 통일전선공작부로 개칭되었으며, 리웨이한은 부장을 맡아 중국 공산당의 통일전선사업, 민족 공작, 종교 철폐 사업을 주관했다. 1949년 4월, 그는 중국 국민당 평화협상 대표단에 참가했고 그해 6월 15일 신정치협상회의 준비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 신정협 준비위원회 상무위원회 사무총장에 추천되었고 이와 동시에 정협 대표 후보자로 지명되었다.

2.3.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파일:Zhou_and_Mao.jpg
1954년 12월 21일부터 25일까지 열린 제2차 전국정협 제1차 전체회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저우언라이, 리웨이한, 마오쩌둥.

1949년 10월, 리웨이한은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 정무원 비서장,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1951년 5월, 그는 중앙인민정부 수석전권대표로서 티베트 지방정부 전권대표와 단판을 벌여 <17개항 협정>을 조인했다. 1952년 12월, 그는 <만주족이 소수민족인가 아닌가에 관한 의견>을 발표했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만주족은 중국 내 소수민족 중 하나로서, 일률적으로 민족 우대정책을 누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후 1953년 11월 중재위 부주임을 맡았고 1954년 9월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된 후 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11월엔 국무원 제8판공실 주임을 맡았고 1956년 중국 공산당 8대 회의에 출석해 중앙위원에 당선되었다.

리웨이한은 이 기간동안 중국 공산당 통전부장을 계속 맡았다. 그는 국가 자본주의를 저급에서 고급으로의 단계식 발전으로서 진행해야 하며, 중국의 상공업에 대한 제한 및 개조를 평화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환매제도 및 공사합영을 실시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점진적으로 완료하자고 제안했다. 또한 그는 통일 전선 사업은 교육방법 및 사상 개조 위주의 방침을 추진할 것을 제시했고 민족 업무 방면에선 연방제는 중국의 현실에 적합하지 않으며 통일된 중화인민공화국 내에서 소수민족 자치구역을 허용하는 대안을 채택할 것을 건의했다. 그리고 종교 업무 방면에서, 리웨이한은 지금은 종교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되 차츰 종교의 착취 문제를 개혁해나가야 하며 종교는 반드시 사회주의 제도에 순응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62년 중국 공산당 북대하 회의, 베이징 공작회의와중국 공산당 8기 10중 전회에서, 리웨이한은 장기간 비판을 받았다. 중앙통전부는 부무회의 범위 내에서 그의 정책 사상 검사를 실시했으며, 특히 그가 1956년 이래 제기해온 통일사업과 민족 업무에 대한 이론 관점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1964년 5월,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 중앙공작회의에서 중국이 수정주의를 야기할 정책을 추진해서는 안되며 제2의 흐루시초프는 더더욱 나와서는 안된다며 리웨이한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회의 후 중앙 통전부가 리웨이한에 대한 2차 비판에 나서자, 리웨이한은 부무회의에서 자신이 과거에 "반당", "반중", "반마오"의 오류를 저질렀다고 자아비판했다. 결국 1964년 12월, 그는 중국 공산당 중앙통전부장,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원장, 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직에서 해임되었다.

문화대혁명 시기, 리웨이한은 홍위병에 의해 규탄대회로 끌려가 온갖 모욕과 구타를 받았고 호북성 함녕시에 보내져 노동개조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러다가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문화대혁명이 종식되자, 그는 1979년에 정계에 복귀해 제5차 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1980년 12월 19일, 리웨이한은 중앙통전부의 부무회의에서 자신의 종교관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1. 종교의 근원은 자연 억압과 사회 억압에 대한 무지와 무능이다.
2. 종교 신앙은 역사의 산물로서, 그것은 역사에서 발생, 발전, 소멸된 것이다.그것은 근원의 소멸에 따라서 소멸되기 때문에, 자연히 소멸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보살은 국민 자신이 만든 것이니, 그들 스스로가 버리고 갈 수밖에 없다. 행정적인 방법은 종교적 감정을 조장할 수 있을 뿐, 결코 종교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종교의 보루가 장기간 존재할 것이다.
3. 종교는 일정한 사회생활로, 반드시 상응하는 종교 활동 장소가 있어야 한다.
4. 종교는 대중성, 민족성, 국제성, 복합성, 장기성 등 5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5. 종교는 역사상 핍박당하던 인민의 단결과 투쟁의 연결고리이자 깃발이었다. 따라서 종교에 대해 역사를 가지고 바라봐야지, 간단하게 부정해서는 안 된다.
6. 민주적인 개혁과 소유권 개혁이 끝나면 종교적 모순은 점차적으로 노동자들의 민간신앙과 불신 사이의 모순으로 진화 할 것이다.
7. 종교적 신념의 자유와 정책 개혁의 자유를 조화시켜라. 자녀의 종교적 신념을 비판하되 종교 신앙의 자유라는 깃발을 우리 손에 쥐어야 한다.
8. 행정과 종교를 분리하고, 종교와 교육을 분리해야 한다.
9. 평화적인 개혁으로 종교 제도를 개혁하고 봉건적 착취와 특권을 폐지해야 한다.
10. 당내에서 무신론 교육을 실시하고 대중에게 단계적으로 과학 보급 교육을 실시한다.
11. 반혁명을 억제하고 제거하기 위해 종교계를 단결시키고, 교육하고, 변화시켜야 한다.
12. 붉은 교직 종사자를 양성하고, 정치적으로 우리를 기대게 하는, 학식이 풍부한 학자를 양성한다
13. 종교는 과학이 아니지만, 종교 문제는 하나의 과학으로 연구해야 한다.

1982년 9월 13일, 리웨이한은 중국 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 부주임에 취임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84년 8월 11일, 리웨이한은 베이징에서 병사했다.

3. 가족관계

리웨이한의 첫번째 부인은 조문옥(曹文玉)이다. 1914년 봄에 결혼해 1남 3녀를 낳았으나 리웨이한이 1919년에 프랑스로 유학을 간 뒤 이혼했다. 그녀는 1961년에 사망했다.

1933년 덩샤오핑의 아내였던 진웨이잉(金維映)은 덩샤오핑과 이혼하고 당시 공산당 중앙조직부장이었던 리웨이한과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1941년모스크바의 정신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중 독일군 폭격기이 떨어뜨린 폭탄에 맞아 사망헀다. 첫째 아들은 일찍 죽었고 둘째아들 리티에잉(李鐵映)은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재직했다.

리웨이한은 1942년에 오경지(吳景之)와 결혼해 세 자식을 낳았지만 리티에림(李鐵林)을 제외하고 모두 일찍 죽었다. 오경지는 현재도 살아있으며, 리티에림은 중앙기구편성위원회 판공실 주임을 맡았다.

4. 참고 문헌


[1] 중국 공산당이 1940년부터 채택한 변구(邊區) 각급 정권기관의 조직원칙. 마오쩌둥은 항일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항일통일전선의 확대와 강화에 있다고 보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진보세력을 증진시키고 중간 세력을 회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변구 정권을 조직할 때 공산당은 1/3의 의석을 차지하고 다른 당파 및 무소속의 진보세력이 1/3, 중간세력이 1/3의 의석을 차지하는 제도를 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