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2 00:36:23

뤼벡 성모 마리아 성당 벽화 위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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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서깊은 성당의 프레스코화3. 의문스러운 인물에게 맡겨진 복구작업4. 공개된 벽화, 그리고 밝혀진 진상5. 사건 이후

1. 개요

1951년부터 1952년까지 독일에서 일어난 위작 사건.

2. 유서깊은 성당의 프레스코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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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베크 독일의 항구도시로 뤼벡에 있는 성모 마리아 성당(Marienkirche)은 쾰른 대성당 만큼의 인지도는 없어도 한자동맹 시대 번영의 상징으로 독일에서 아주 유서깊은 대성당으로 꼽히는 성당이다. 현재는 개신교 루터교회 소속이다.

그런데 그런 성당이 1942년 연합군의 소이탄 폭격으로 성당 안쪽 벽의 회칠이 벗겨지면서 13세기에 그려진 프레스코화 벽화가 발견되었다. 마침 1951년에 성모 마리아 성당의 건립 70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에 성당 보존연구원들은 이 프레스코화를 복구할 것을 제안했고 독일 정부도 이를 받아들여서 벽화 복원 작업이 추진되었다.

3. 의문스러운 인물에게 맡겨진 복구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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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벽화의 복구 작업 중인 디트리히 페이

그런데 독일 정부는 디트리히 페이(Dietrich Fey)라는 인물에게 복구작업을 맡겼는데 이런 결정에 독일의 중세 미술 전문가들과 미술 복원사들 사이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왜냐하면 디트리히 페이는 원작에 충실하라는 원칙을 무시하고 자기 주관을 과도하게 집어넣는 식으로 복구해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목사조차 페이가 복구작업을 맡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다.

그럼에도 독일 정부는 페이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고 페이는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의 무명화가 로타르 말스카트를 고용해 함께 복구작업을 진행했다.

4. 공개된 벽화, 그리고 밝혀진 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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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을 받고 있는 로타르 말스카트

1951년 성당 건립 700주년에 맞춰서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프레스코화가 완벽하게 복원되어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이날 공개에는 독일 총리인 콘라트 아데나워를 비롯한 수많은 내외귀빈들이 참석했고 세계 언론들도 앞다투어 이 벽화의 복원 소식을 타전했지만 막상 복원된 벽화를 지켜본 미술 전문가들은 이건 중세의 벽화라고 할 수 없다면서 강하게 페이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런 비난의 목소리는 벽화를 복원했다는 것에 묻혀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런데 그 이듬해인 1952년에 페이에게 고용되어 함께 복원작업을 진행한 로타르 말스카트(Lothar Malskat,1913~1988)가 복원은 있지도 않은 사실이며, 내가 그 그림들을 다 그렸다고 폭로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사실을 믿지 않자 결국 말스카트는 직접 자신의 변호사를 통해 페이와 자신을 위작과 사기 혐의로 고소하게 했다.

결국 위작과 사기혐의로 페이와 말스카트는 기소되었고 말스카트는 이 자리에서 중요한 증언을 했는데 애당초 성당 벽화는 전쟁 당시 성당 지붕이 불타 없어진 탓에 햇빛에 그대로 노출되었고 페이와 말스카트가 복구하러 나섰을 때는 이미 거의 원래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페이는 복구를 밀어붙였고 말스카트에게 복구를 빙자한 창작을 시켰기 때문에 자신은 위작을 만들었다고 자수했다.

사실 자세히 살펴본 벽화는 어처구니 없는 내용이 많았는데 성녀는 말스카트의 여동생 얼굴을 그대로 그려넣었는가 하면 심지어 칭기즈 칸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성인으로 그려지는 황당한 묘사도 있었다. 2016년 12월 25일 서프라이즈 방영분에 따르면 선지자의 얼굴에는 말스카트의 아버지 얼굴을, 성모 마리아의 얼굴에는 오스트리아의 여배우 한시 크노텍을, 수사들은 지역 일꾼들을, 대주교의 얼굴에는 자기 자신의 자화상을 넣었다고 한다.

말스카트는 자신이 전부 작업했음에도 모든 공로와 영광은 페이에게 돌아간 데다 페이가 약속한 만큼의 돈을 주지도 않자 격분해 자신이 성당 벽화를 위조했다고 자폭성 폭로를 해 버렸다.

5. 사건 이후

결국 페이는 징역 20개월, 말스카트는 18개월을 선고받았다. 말스카트는 이 사건으로 돈 한 푼 받지 못했으나 중세풍의 그림을 잘 그리는 실력을 인정받아서 이후 여러 군데에서 중세풍 디자인을 의뢰해 와 되려 더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1966년에 귄터 마인케 감독이 그를 모델로 한 영화를 만들기도 했으며 양철북으로 유명한 작가 귄터 그라스가 말스카트룰 모델로 소설 La Ratte를 1985년에 쓰기도 했다.

여담으로 위조된 성당 벽화를 보고 온갖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그 자신이 미술품 수집가이기도 했고 나름 미술에 조예가 있다고 자부하던 인물이었지만 위조 벽화에 그만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이 양반은 이후에 선물받은 그림을 몰래 내다 팔아서 그림의 원주인이 그 그림을 다시 사들인 뒤 보여주는 굴욕을 더블로 당하기도 했다.[1]

[kakaotv(300231174)]

2016년 12월 25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 성당 측은 사건 이후 벽화를 지워 버려 벽화는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1] 어처구니없게도 원주인에게 그림 값을 얼마에 주고 샀냐고 물은 후 자기가 팔아들인 값보다 얼마나 비싼지를 따지고 있었다고 한다. 여러모로 금전적인 문제로는 놀라울 정도로 파렴치했던 그다운 일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