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라틴어: Lucius Julius Caes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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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46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아프리카 속주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아버지)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국 재무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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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먼 친척으로, 카이사르의 내전 때 옵티마테스파의 편에 서서 카이사르와 대적했다가 아프리카에서 피살되었다.2. 생애
기원전 64년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이며,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먼 친척이다. 그는 기원전 54년 사르데냐 총독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를 속주민 학대 혐의로 기소하였으며, 기원전 50년 재무관을 역임했다.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한 기원전 49년 1월, 폼페이우스의 지시에 따라 아리미눔(현재 리미니)에서 카이사르를 만나 폼페이우스의 뜻을 전달했다. 이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를 왕래하며 서로의 제안을 전달했지만, 결국 평화 협정을 맺는데 실패했다.그 후 아프리카로 이동한 그는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가 시칠리아레서 2개 군단을 이끌고 안퀼라리아 마을 근처에 상륙하자, 10척의 군함을 이끌고 안퀼라리아에서 22마일 떨어진 클루페아에서 적 함대를 기습했다. 그러나 기습은 실패했고, 그는 함대 전체를 포기하고 가장 가까운 해변에 상륙한 뒤 하드루멘툼으로 달아났다. 그 후 그곳에서 농성하다가 쿠리오가 누미디아 국왕 유바 1세와의 전쟁에서 전사하자, 아프리카에 그대로 남아 소 카토 휘하의 감찰관으로서 옵티마테스 파를 위해 일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사로잡힌 카이사르 장병들과 노예들에게 매우 잔인하게 행동했으며, 서커스에서 포획된 야생 동물을 손수 도살했다고 한다.
기원전 46년 탑수스 전투에서 옵티마테스파 군대가 카이사르에게 패하고 카토가 자살한 뒤, 우티카에서 카이사르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그해 말 돌연 카이사르를 따르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카이사르가 지시했다는 설, 그의 악행을 전해들은 장병들이 분노해 독단적으로 살해했다는 설이 제시되지만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버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들과는 달리 로마에 남아서 카이사르를 위해 일했으며,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뒤 '해방자'를 자처한 카이사르 암살자들과 조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사이를 오가며 양자간의 화해를 이루고자 노력했다. 또한 기원전 43년 3월 초에는 안토니우스와 데키무스 브루투스 간의 휴전을 주선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안토니우스가 무티나 내전에서 패배하고 갈리아로 도주한 뒤에는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한 게 옳다고 밝혔으나, 이로 인해 제2차 삼두정치가 결성된 후 척결 대상으로 낙인찍히자 은신했다. 안토니우스는 나중에 자신의 어머니이자 루키우스의 여동생인 율리아 안토니아의 간곡한 설득을 받아들여 그를 용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