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23:34:31

로체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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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체스터
Rochester
파일:Rochester_view.jpg
도시 정보
지역
[[영국|]][[틀:국기|]][[틀:국기|]] 켄트주
인구 62,982명
시간대 UTC+0 (GMT)
위치

1. 개요2. 로체스터 성
2.1. 성의 역사
2.1.1. 초창기2.1.2. 1차 귀족 전쟁 (First Barons' War) 시절2.1.3. 헨리 3세 시절2.1.4. 후기 역사
3. 로체스터 대성당(Rochester Cathedral)

1. 개요

로체스터는 영국 켄트 주의 도시이다.

로영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교구인 로체스터 교구가 이 도시의 로체스터 대성당에 기반을 두고 있다. 로체스터에는 전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 된 교육 시설인 왕의 학교(The King's School)가 있으며, 영화 아이언클래드의 배경이 되는 로체스터 성이 있다.

런던과 매우 가깝기 때문에 고성이나 요새, 유서 깊은 성당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방문할만한 가치가 있다.[1]

2. 로체스터 성

로체스터 성은 영국 남동부 켄트 주 로체스터의 메드웨이 강 동쪽 기슭에 있는 중세 요새이다. 이 성은 서유럽에서 가장 잘 보존된 성 중 하나이다. 이 성에서 12세기에 사용되던 요새의 망루와 석조 건축 구조에 대해서 엿볼 수 있다.

잉글랜드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메드웨이 강은 런던에서 남쪽으로 불과 50km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이 성은 메드웨이 강의 하류를 끼고 있다. 또한 이 성은 왓링 도로[2](Watling street)와 연결되어 있었다. 정리하자면, 로체스터 성의 주인은 메드웨이 강을 따라 런던으로 대규모의 병력과 물자를 쉽게 수송할 수 있었고 왓링 도로를 따라 켄트, 머시아, 웨섹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성의 규모에 비해 많은 전투가 발생했으며 이 중 1215년에 발생한 제1차 남작 전쟁은 아이언클래드라는 이름으로 영화화 되었다.
로체스터 성 (Rochester Castle)
파일:로체스터성.jpg
[clearfix]

2.1. 성의 역사

2.1.1. 초창기

노르망디의 공작이었던 윌리엄 1세가 영국왕 해럴드를 참살하고 영국의 왕위에 오른 후인 11세기에 건축되었다. 이 성은 요충지를 방어하기 위해 건설되었으며 많은 양의 군대와 보급을 수용하기 위한, 순수히 군사적 목적으로 건축되었다. 초창기 로체스터 성에 대한 기록이 모두 소실되어 성의 위치, 구조, 구성 재료 등 정보를 알 수 없으나 사용된 비용과 시간, 건축된 시대를 생각하면 메드웨이 강 근처 툭 튀어나온 암석 언덕인 볼리 언덕(Boley hill)에 목재 울타리와 진흙 벽으로 건축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정복왕 윌리엄이 사망하자 큰아들인 로버트는 노르망디 공작 지위를, 작은아들인 윌리엄은 잉글랜드 왕위를 받았다. 이 상속은 노르망디와 잉글랜드를 분리하는 결정이었다. 이 결정은 잉글랜드에 대한 노르망디 귀족들의 영향력을 상실시켰기 때문에 노르망디 귀족들은 큰 불만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로버트를 부추겨 잉글랜드의 왕인 동생을 향해 왕위 계승 전쟁을 일으키도록 만든다.

이 전쟁에서 오도 주교는 로버트를 지원했다. 오도 주교의 로체스터 성은 잉글랜드 내부의 로버트 지지자들, 즉 반군의 본부가 되었다. 런던과 가깝지는 않을지라도 언제든지 강을 통해 런던에 병력을 보낼 수 있는 로체스터 성의 존재는 윌리엄 왕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윌리엄 왕은 1088년에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로체스터 성을 공격했다. 긴 포위전 끝에 성 안에 질병과 기아가 만연하자 반란군은 항복했다. 오도 주교는 석방됐지만 모든 영지를 몰수 당했고, 이 과정에서 로체스터 성의 소유권도 왕에게로 넘어갔다.

1127년에 헨리 1세가 로체스터 성을 켄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드 코르베일에게 하사했다. 왕은 대주교가 해당 성을 주교의 자식들에게 상속할 수 있으며 성을 확장하거나 개조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현재 21세기 관광객이 로체스터 성에서 볼 수 있는 망루와 탑, 석조 구조물들은 모두 대주교 윌리엄 드 코르베일이 건축한 것이다. 이러한 증축은 코르베일이 사망한 1138년의 3년 후인 1141년에 완료되었다.

2.1.2. 1차 귀족 전쟁 (First Barons' War) 시절

영국의 존 왕은 노르망디를 탈환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1214년 부빈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실패했다. 그가 패전 후 영국으로 돌아오자, 몇 달 후 영국 북부의 영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링컨, 엑서터 뿐만 아니라 런던까지 점령했다. 반란군과 존 왕은 켄터베리 주교의 중재 하에 마그나 카르타라는 합의문을 작성해 왕권을 제한하고 재판, 세금 등에 대한 규칙을 정하는 것으로 평화 협정을 체결한다. 그러나 이 마그나 카르타는 교황에 의해 무효화 됐으며 곧 1차 귀족 전쟁이 발발한다.

반란군 편이었던 벨부아르 군주 윌리엄 도비니가 로체스터 성을 점거한다. 로체스터 반란군의 숫자는 약 95명~145명 정도로 추산된다. 성이 적의 손에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존 왕은 용병을 이끌고 로체스터 성으로 진격해 10월 13일에 성을 포위한다. 존 왕은 포위하고 상대가 자멸할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섰다. 처절한 공성전이 시작됐고 이 공성전은 그때까지의 영국사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5개의 투석기가 밤낮으로 돌을 퍼부었고, 이후 약화된 성벽을 공격군이 곡괭이와 수레를 이용해서 무너뜨리면서 성의 외벽 방어선이 뚫린다. 수비대는 건재했던 내성으로 후퇴했다. 내성은 투석기로 부수기에 너무 튼튼했기 때문에 존 왕은 이들을 성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썼다. 불을 이용해 성의 한 모서리를 무너뜨리는데는 성공했으나 수비대는 건물의 절반을 포기하면서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자 존 왕은 내성에서 물과 식량에 대한 접근이 어렵다는 점을 이용해 공격을 포기하고 지연전을 시작한다. 곧 요새 내부는 기아 상태에 빠졌고 이들은 11월 30일에 항복한다. 존 왕은 이들을 전부 처형하려고 했으나 지휘관들의 설득에 어린 시절부터 왕을 섬겼던 석궁수 한 명만 본보기로 처형하고 나머지 반란군들은 감옥에 수감시킨다.
1차 귀족 전쟁 (First Barons' War)
파일:FirstBarons'Warnce.jpg
프랑스 루이 왕자가 존 왕의 잉글랜드 군을 패퇴시키고 성으로 입성하는 모습
반란군은 프랑스 국왕 필립 2세의 아들인 루이 왕자를 설득해 그를 반란군 지도자로 추대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같은 언어, 정치체제, 문화를 공유하는 나라로 느슨한 봉건제 시스템 아래 두 국가간의 구분이 모호했다[3]. 또한 루이 왕자는 영국왕이었던 헨리 2세의 손자였기 때문에 영국 왕위를 주장할 권리가 있었다. 루이 왕자는 아버지와 교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을 이끌고 잉글랜드 켄트에 상륙한다.

존 왕은 로체스터 성 점령 후 켄트에 계속 주둔해 있었다. 정찰병의 보고를 듣고 달려온 존 왕과 잉글랜드 국왕군은 그들의 눈으로 무수히 많은 프랑스군이 켄트 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목격했다. 존 왕은 런던을 포기하고 잉글랜드의 옛 수도이자 색슨족의 심장이라고 불리던 윈체스터로 도주한다. 여전히 반란군이 주를 이루던 켄트 지역이 루이 왕자를 환대했고, 루이 왕자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런던으로 무혈 입성한다. 이 과정에서 로체스터 성 또한 반란군 소유로 다시 넘어간다.

2.1.3. 헨리 3세 시절

공성전 과정에서 로체스터 성이 반파되었기 때문에 헨리 왕은 1217년부터 20년 동안 680파운드를 사용해 성을 수리한다. 이 성의 수리가 왕의 재산으로 이루어졌고,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잉글랜드 왕실이 로체스터 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헨리의 통치는 1258년에 위기를 맞는다. 웨일즈에서의 패전, 기근, 교황과 관계 악화라는 3가지 악재가 겹치자 영국 귀족들은 위원회를 만들어 국가 통치권을 왕에게서 박탈한다. 그러나 프랑스가 이 일에 개입했고 내전을 꺼리던 위원회가 1261년에 통치권을 헨리에게 반환한다. 하지만 1264년, 레스터의 백작 시몬 드 몽포르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왕당파와 반란군 간의 내전이 발생한다.

로체스터 성은 치안관 로저 드 레이본이 지키고 있었다. 그는 헨리의 명령에 따르는 왕당파였다. 1264년 4월 17일에 허트포드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가 이끄는 반란군이 로체스터 성을 공격했다. 메드웨이 강을 건너려는 반란군의 시도는 두 차례 실패하고 세 번째 시도에서 성공한다. 반란군의 양방향 공격에 로체스터 수비군은 외벽을 잃고 내성으로 쫓겨 들어간다. 반란군은 공성 무기로 내성을 일주일 동안 쉬지 않고 공격했지만 끄떡 없었다. 이들은 지지부진한 포위 공격을 계속하다가 4월 26일 헨리 3세와 에드워드 왕자가 이끄는 구원병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후퇴한다.

2.1.4. 후기 역사

로체스터 성은 무너진 상태로 100년 이상 방치된다. 성의 치안관들은 수리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에서 석조 구조물을 빼와 다른 곳에 팔거나 새로운 건축물을 짓는데 사용했다. 이외에도 자연 풍화, 폭풍, 호우 등 재해로 인해 로체스터 성은 큰 피해를 입는다. 1360년에 치안관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로체스터 성은 망루, 문루, 중앙 홀, 주방, 마구간 빼고 다 무너졌다.> 라고 적혀있다.

1314년 3월부터 6월까지 영국군에게 생포된 스코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드 버그가 로체스터 성에 감금됐었다.

에드워드 3세(1327년~1377년)는 로체스터 성의 복원을 결심한다. 복원은 1367년 5월부터 1370년 9월까지 진행되었고, 총 2262 파운드의 비용이 들었다. 복구는 방어 구조물 위주로 진행되었다. 로체스터 성 내부에는 헨리 3세가 지은 왕실 주거용 공간이 있었는데 이 공간은 방치되었다가 철거된다.

리처드 2세(1377년~1400년)는 성의 수리와 추가적인 구조물 건설에 500파운드를 사용한다. 당시는 백년 전쟁 중이었는데, 프랑스군이 켄트 해안에 도착해 메드웨이 강을 타고 런던으로 올라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시대에 메드웨이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 바로 옆에 좁고 높은 석조 구조물이 건설되었다. 이 망루는 적군이 메드웨이 강을 건너거나 강을 타고 북상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로체스터 성은 1381년에 마지막 전투를 치룬다. 와트 타일러가 일으킨 농민 반란( 와트 타일러의 난) 시기에 로체스터 성은 반란군에 의해 포위되어 함락되었다. 1384년에 66파운드, 1395년에 91파운드가 이때 입은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사용된다.

찰스 디킨스가 로체스터에 살았는데, 디킨스는 이 성을 "영광스러운 기둥 - 위태로운 벽 - 비틀거리는 아치 - 음침한 구석 - 흔들리는 돌[4]"이라고 묘사했다. 19세기에는 미스터리 문학이 발달하면서 많은 폐허 건물이 괴담, 신화, 전설 이야기를 얻었는데 로체스터 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로체스터 성에서는 새하얀 여자가 귀신을 쫓아다닌다는 괴담이 돌았다.

1884년에 시의회는 성을 6572파운드에 매입했다. 성은 소소하게 유지보수 되다가, 1961년 시의회는 로체스터 성을 완전히 복원하기로 결정한다. 총 3만 파운드의 예산으로 폐허, 무너진 벽, 돌 파편, 덩쿨과 잡초 등이 제거되거나 재건되었고 이 결과 현재의 로체스터 성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로체스터 성은 1984년에 영국 국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로체스터 성은 역사적인 건물인 동시에 고고학 유적지로써 가치가 있었고, 영국은 이 성을 1등급 등록 문화재로 지정했다.

3. 로체스터 대성당(Rochester Cathedral)

로체스터 대성당
파일:RochesterCathedral.jpg
정식 명칭은 "그리스도와 동정 마리아의 대성당(Cathedral Church of Christ and the Blessed Virgin Mary)"이다. 이 대성당은 성공회 로체스터교구의 모교회이다. 로체스터 교구는 영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교구이다.

로체스터 교구는 608년에 이교도였던 남부 영국인을 카톨릭으로 개종시킨 선교사 중 한 명인 유스투스(Justus)에 의해 설립됐다. 로체스터 교구의 첫 번째 주교인 유스투스는 켄트의 왕 에델버트로부터 허가를 받아 부지에 사도 안드레아스에게 바치는 성당을 건설했다. 성당은 높이 13m, 너비 8.5m로 건설되었다. 로체스터 교구는 이 성당에서 도시민을 위한 미사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사제 학교로서 사제와 합창단 또한 양성했다. 이 학교는 추후에 성당으로부터 분리되어 로체스터 왕립 학교(Rochester King's School)라는 이름의 사립 학교가 되었다. 이 사립 학교는 캔터베리 왕립 학교 다음으로 영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학교이며 대학 진학률이 90%가 넘는 명문 학교이다. 이 학교를 다닌는 학생들은 학교 생활을 위해 로체스터 대성당을 자주 사용한다.





[1] 시간이 촉박하다면 이곳 대신 윈체스터를 방문해야 한다. 윈체스터는 색슨족의 심장 같은 도시이며 잉글랜드의 수도였고, 알프레드 대왕이 바이킹들의 침략을 저항하기 위한 장소였다. 윈체스터에도 대성당과 고성이 있으며 이곳의 역사적 가치는 로체스터의 가치를 상회한다. [2] 영국의 역사적인 도로로 잉글랜드 지역을 북서쪽에서 남동쪽까지 관통하여 연결한다. 고대~중세시대에 사용되던 고속도로 느낌 [3] 영국과 프랑스의 사이가 틀어지게 되는 계기는 14세기 백년 전쟁 이후 [4] glorious pile – frowning wall – tottering arches – dark nooks – crumbling ston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