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 베르탱 Rose Bert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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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6E6FA><colcolor=#000000> 본명 |
마리 잔 로즈 베르탱 Marie-Jeanne Rose Bertin |
출생 | 1747년 7월 2일 |
프랑스 왕국 아브빌 | |
사망 | 1813년 9월 22일 (향년 66세) |
프랑스 제국 에피네 쉬르 센느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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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패션 디자이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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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역사에 이름을 남긴 최초의 디자이너이자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전담 디자이너다.2. 생애
1747년 7월 2일에 태어난 로즈 베르탱은 하류층으로서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지내다가, 파리에 갔다. 파리에서 그녀는 Mademoiselle Pagelle이라는 모자 제작사의 도제로 지내다가, 뛰어난 실력으로 그녀의 파트너가 되었다. 1770년에 셍토노레(Saint-Honoré)[1] 거리에 ‘르 그랑 모골(Le Grand Mogol)’이라는 첫 부티크를 차렸다.2.1. 마르샹드 드 모드
당시 프랑스는 루이 14세 시기의 바로크 양식을 거쳐 루이 15세 시대의 로코코 양식까지 모든 유럽의 문화와 패션의 선두주자이자 중심지로 손꼽혔다.특히 18세기 중엽에 들어서 여성 패션이 급격히 발전하면서 디존의 남성 상인 겸 디자이너인 마르샹 드 모드 뿐만 아닌 모자나 리본, 드레스, 패션 소품 등 여성복을 취급하는 여성 상인 겸 디자이너 ‘마르샹드 드 모드(La Marchande de modes)’가 등장한다.
이후 귀족들뿐만 아닌 부르주아 계층들도 패션에 관심을 가지면서 소비시장이 커지면서 유행을 선도하는 귀부인들 사이에서 마르샹드 드 모드가 운영하는 부티크(Boutique) 들이 패션계에 중심이 되기 시작했고 그 중심인물이 바로 로즈 베르탱 이었다.
2.2. 왕비의 디자이너
1772년, 로즈 베르탱은 자신의 단골 손님이자 당시 기혼 여성 중 영향력이 높던 샤르트르 공작부인(Duchesse de Chartres)[2]의 중개로 그 해 여름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만나 왕실의 전속 상인인 모드상의 신분을 얻게 된다.퐁파두르 부인으로 대표되는 왕의 정부들이 패션을 주도한 이전 시기와 달리 루이 16세 시기에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패션의 선두주자로 나섰고 로즈 베르탱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전속 디자이너로서 매일 만나 왕비와 최신 직물과 드레스를 의논하였다. 당시 1년에 대략 300벌 정도의 드레스를 구입했고, 1780년대 궁정 재무 기록에 따르면 마리 앙투아네트의 의상비의 절반 이상이 베르탱에게 지불되었다.
파리의 패션 선도자 답게 왕비의 초상화에 그려진 대부분의 옷은 구녀의 작품이며 대표적으로 마리가 유행시킨 벼룩색 드레스, 세 갈레 퍼브의 로브 아 라 폴로네즈, 트리아농 궁에서 입던 모슬린 재질의 슈미즈 아 라 렌이 있다. 또한 과거 미용사로 일한 경험을 살려서 깃털을 이용한 코샤크 헤어와 다양하고 높은 푸프를 선보이기도 했다. 당연히 왕비의 복식은 다른 궁전 귀부인들 더 나아가 프랑스 패션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로 인해 로즈 베르탱은 ‘의류대신(Minister of Modes)’라는 별명을 얻었다.[3]
모드상의 신분은 물론 왕비의 패션 디자이너라는 명성까지 더해져 그녀는 생토노레가의 점포에 30명이나 되는 재봉사를 고용하는 등 승승장구하여 파리 더 나아가 프랑스와 유럽을 대표하는 유명 패션 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린다.
3. 비판
엄청난 유명세로 승승장구하던 그녀는 프랑스 시민들의 비난의 표적이었다. 첫번째로, 왕비에게 조달하는 의상이 지나치게 호화롭고 비쌌기 때문에, 왕실의 사치와 낭비를 부추겼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의 의복은 다른 디자이너보다 훨씬 높은 가격이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실력과 안목에 대해 통상적인 보수보다 높은 가격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둘째로, 미천한 출신의 여성이 높은 신분의 귀부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은 신분제가 엄격한 프랑스 사회에서는 심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화려한 의상실에 유럽 각국의 귀족과 왕족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귀족들을 소파에서 앉은 채로 맞이하며 오만방자하게 행동했다고 한다.
4.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이 시작될 때 즈음에, 그녀는 왕당파, 귀족과 혁명세력 모두에게 지탄받았다. 시민들에게는 사치를 일삼는 귀족들 중 하나로, 귀족들에게는 근본 없는 오만한 자로 비판을 받았다. 혁명 팸플릿에서는 그녀를 ‘사치품을 만들어 부패를 초래한 자이자 부패 그 자체(a corrupt and corrupting merchant of luxury)’로 묘사했다.5. 최후
결국 1792년에 로즈 베르탱은 왕비가 처형되기 며칠 전에 영국 런던으로 망명한다. 이후 1795년 2월에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혁명으로 인해 베르탱의 스타일은 더이상 유행이 아니었고 결국 그녀는 1813년 9월 22일에 사망했다고 한다.6. 매체에서의 등장
- 경국의 재봉사 로즈 베르탱: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본인 피셜과 작중에선 아름답지 않다는 설정이지만 정작 작화에서는 지적인 미인으로 그려진다. 패션 디자이너로서 실력이야 말할 것 없고 물론 탁월한 해결책을 내놓고 남성 도움 없이 재봉실을 차린 불리한 조건을 이겨내고 다양한 사업 아이템을 개발해 성공하는 상당한 능력자 여성으로 묘사된다. 전체적으로 사랑보단 일을 좋아하는 워커홀릭에 사업과 성공에 대해 물불 안가리는 면모가 부각되긴 하나 주인공 답게 폴리냑 부인에게 순진하게 넘어간 마리 앙투아네트를 걱정하고 자격지심에 빠져있던 오를레앙 공작 부인 루이즈 마리를 격려해주는 등 선한 모습도 가지고 있다.
- 이노센트: 젊은 시절에 뒤바리 부인의 직장 동료였던 것으로 묘사된다. 일은 잘하지만 뚱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뒤바리 부인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쳐 심기가 불편해진 뒤바리 부인에게 못생긴 바느질꾼은 남자의 사랑을 받지 못할거라는 조롱을 받지만, 정작 작화에서는 뒤바리 부인과 유사하게 생긴 미형으로 그려진다.
- 베르사이유의 장미: 초반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패션 디자이너로 등장하며 한참 사치에 몰입하던 앙투아네트의 상황을 묘사하기 위한 캐릭터로 쓰였다.
- 마리 앙투아네트(뮤지컬): 레오나르와 더불어 개그캐릭터로 나온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는 말을 그녀가 한 것으로 나온다. 여기서는 바렌 도주 때 독일로 망명하다가 왕가를 데리러 온 호위대와 만나는 바람에 의도치않게 마리 앙투아네트의 도주를 방해하게 된다.
- 니시야마 아키노스케의 라노벨 '파워 앙투아네트'에서는 어린 미소녀가 되었다. 하지만 와이어를 무기로 군인들을 도륙해버리는 등, 본작에 등장하는 마리 앙투아네트[4] 못지않게 흉악하게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