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1 06:39:15

로랑 그바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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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우푸에부아니 앙리 코낭 베디에 로베르 게이 로랑 그바그보
<rowcolor=#fff> 제5대
알라산 와타라 }}}}}}}}}
코트디부아르 제4대 대통령
쿠두 로랑 그바그보
Koudou Laurent Gbagbo
파일:external/i.telegraph.co.uk/Gbagbo_2486173b.jpg
<colbgcolor=#3cb371><colcolor=#fff> 출생 <colcolor=#000,#ddd> 1945년 5월 31일 ([age(1945-05-31)]세)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마마
국적 파일:코트디부아르 국기.svg 코트디부아르
재임 기간 제4대 대통령
2000년 10월 26일 ~ 2011년 4월 11일 (11년)
소속 정당 아이보리인 대중전선
영부인 시몽 그바그보
자녀 아들 미셸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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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트디부아르의 역사학자, 노동운동가, 독재자.

본래 역사학을 전공하던 인물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으나 이후로 선거를 계속 연기하면서도 남북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여주었고 2010년 선거에서 패배한 뒤에도 코트디부아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지 않고 버티는 과정에서 제2차 코트디부아르 내전을 일으켜 3천여명의 민간인들을 숨지게 한 인물로, 결국 전범 재판에 넘겨졌다.

2. 생애

사실 로랑 그바그보는 정치경력 초반에는 독재적인 경력과는 거리가 먼 민주화 운동가였고, 노동운동을 조직하다가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정권에 의해 탄압받아서 프랑스로 망명간 전력도 있었다. 이후 1980년대 말에 코트디바우르의 일당제가 풀어지면서 1990년에 첫 대선에 출마했지만 정치초년생이었던 그바그보는 이 부문에 있어서 우푸에부아니가 7년 5개월만 살것이라는 식으로 선거운동을 하는 미숙함을 보였고 펠릭스 우푸에부아니에게 크게 밀려 20%의 득표율을 얻는데 그쳐 낙선했고, 이후 국회선거에서 야당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1992년에 모종의 이유로 구속되었다가 1993년에 사면되었다.

그러다가 우푸부에부아니가 1993년 12월 7일에 사망한 이후 그의 후계자인 앙리 코낭 베디에가 뒤를 이었지만 역시 내분이 벌어졌고 1995년 선거법 개정과정에서 베디에가 타지에서 출생했음에도 코트디부아르 대선에 출마한다는 이유로 1995년 대선을 보이콧했다. 투오 포지에가 쿠데타를 일으켜 로베르 게이가 1999년 집권했다. 당초 로베르 게이가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로랑 그바그보도 같이 출마했지만 로랑 그바그보가 코트디부아르 남부 지역의 표를 얻으며 로베르 게이를 앞지르자 로베르 게이는 이에 불복했다. 이는 시위로 이어졌고 결국 게이는 물러났다. 이후 내전이 발발했고 로베르 게이는 사살되었다. 이후 북부 지역 주민들에게 행패부리는 민병대를 방관했고 결국 분노한 북부 지역 주민들로 인해 내전이 악화되었다. 이 때문에 경제 재건이 힘든 상태라 내전으로 엉망이 된 경제가 다시 제대로 돌아갈 틈이 없었다. 한편 2005년 10월에 로랑 그바그보의 임기가 끝났지만 국가가 불안하다는 등의 이유로 수차례 대선을 연기해오다가 계속되는 압박에 결국 2010년 선거를 치르게 되었으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2010년 11월 28일 실시된 코트디부아르 대선 결선 투표로 코트디부아르 내전이 재발하고야 말았다. 코트디부아르 선거관리위원회는 공화당(RDR)의 알라산 와타라 전 총리가 54.1%의 지지율을 얻어 45.9%에 그친 로랑 그바그보 당시 코트디부아르 대통령을 투표수에서 앞질렀다고 12월 2일 발표했다. 하지만 하루 뒤 그바그보 대통령이 장악한 헌법위원회가 7개 선거구에 대해 선거부정 및 무효표를 주장하며 그바그보의 승리를 선포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고 12월 4일 두 사람은 각각 자신들만의 대통령 취임선서를 강행하고, 12월 5일에는 총리도 따로 지명했다. 이에 일부 지역에서는 와타라 전 총리 지지자들이 거리 시위를 벌였으며, 북부 반군 신세력(FN)이 같은 북부 출신인 와타라를 위해 선거 부정을 도왔다고 주장하며 개표 결과를 인정하지 않자 이에 내전이 날 것이란 우려가 커졌는데 결국 내전으로 번지고 말았다.

대선 불복을 선언하여 내전을 일으키고 한창 깽판을 쳐대다가, 불리해지니 휴전하자고 협상을 제시했으나 곧바로 도주했다. 이에 열받은 와타라 측은 그를 체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그바그보 체포 작전이 밤부터 시작되었는데, 작전은 프랑스군 헬기의 대통령 관저를 무력화시키는 공격이 끝난 오전 3시부터 시작됐다.

결국 그바그보는 경제수도 아비장에서 체포됐는데. AP 통신은 그바그보 대통령 관저 공격에 참여한 알라산 와타라 측의 한 군인의 말을 인용했는데, 그바그보 대통령이 검거될 당시에는 그는 매우 지친 상태였으며 다른 한 전사가 쳐서 그바그보를 손바닥으로 때렸다고 한다. 목격자는 와타라 대통령 측 군인들이 그바그보가 피신해 있던 대통령궁 안에 최루가스를 뿌린 뒤 수색작업을 시작했는데 "그바그보는 책상 앞에 앉아있다 와타라 측 군인과 마주쳤을 때 처음 한 말이 '나를 죽이지 말라'"였다고 증언했다고. 죽기는 싫은가보네?

이런 가운데 코트디부아르 TV는 그바그보가 상반신에 흰색 속옷을 걸친 채 한 실내로 이끌려 들어가는 모습을 방영하며 그바그보가 체포되었다는 중계를 했다.

하지만 아비장 주민들은 여전히 수백명의 그바그보 측 잔당들이 배회할 것을 우려해 시민들은 거리에 나서는 것을 꺼렸는데, 실제로 이날 밤 시내 일부 지역에선 간간이 총성이 들렸다고 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그바그보가 사로잡히자 “로랑 그바그보 전 대통령의 불법 권력 장악이 마침내 끝났습니다. 이는 선거후 불안정으로 인해 너무 오랫동안 고통받았던 코트디부아르 국민들의 민주주의 의지의 승리입니다.”라고 말했다.

한편 와타라 대통령은 법무장관에게 그바그보에 대한 사법절차에 착수하도록 요구할 것이라며 그의 신병이 안전하도록 모든 조치가 취해질 것이라고 말했으며 그는 또 국민들에게 침착할 것을 요구하면서 무장한 민병대에 무장해제를 요구하며 내전은 마무리되었다. 그바그보는 현재도 재판 중인 상태다.

3. 기타

파일:external/gdb.voanews.com/DB67C1C0-0BD8-44E1-91D4-B40F2C56BBCE_w300_r1_s.jpg
시몬 그바그보

아내 시몬 그바그보는 로랑 그바그보의 아내인데, 남편보다 오히려 한술 더 떠 폭압적인 정치를 했다(...).

증언에 의하면 "그바그보 대통령은 좀 우유부단한 경향이 있었으나 아내는 강경했고 남편 보다 과격한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녀는 단순한 퍼스트레이디 이외에 공식적인 정치적 역할을 했고 늘 신문을 장식했다"고 증언했다고...

결국 코트디부아르 법원이 2015년 3월 10일 시몬 그바그보에게 징역 20년형을 선고했는데, 코트디부아르 법원은 시몬 그바그보가 2010년 대통령 선거 후에 국가 안보를 해치고 무장 폭력배들을 조직해 폭력 사태를 일으켜 3천여 명을 숨지게 한 혐의에 대해 유죄가 인정된다는 죄목을 인정해 이런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