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2년에 그려진 라마르크의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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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어: Theory of Use and Disuse한자: 用不用說
자주 사용하는 기관은 발전하고 안 쓰는 기관은 퇴화한다는 진화론의 일종. 생물이 살아있는 동안 환경에 적응한 결과로 획득한 형질(획득 형질)이 다음 세대에 유전되어 진화가 일어난다는 주장이다. 라마르크주의라고도 한다.
찰스 로버트 다윈의 자연 선택과 대비되는 면이 있다. 풀어쓴다면 사용(用)-비사용(不用) 가설(說)이라고 할 수 있다.
진화론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일반인들이 진화론 하면 가장 바로 떠올리는 진화 방식이 이 직관적인 용불용설이다. 하지만 진화 과정은 일직선상으로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마치 고등생물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니다. 진화는 표현하자면 계단식으로 상승하고 그 끝에는 우월한 존재가 위치해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나뭇가지가 목적과 방향 없이 맹목적으로 뻗어나가고 때로는 뒤엉키기도 하는 나무와 같다.
2. 역사
용불용설과 유사한 이론은 중세 아랍의 자연철학자 알 자히즈가 처음 주장하였으나, 그가 왕실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은 것과 별개로 해당 주장은 그가 살던 시대를 넘어서는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19세기에 용불용설은 처음으로 주목받게 되는데, 그마저도 너무 혁신적인 이론이었기에 처음부터 주목받은 건 아니었다. 프랑스의 장바티스트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가 1809년에 발표한 <동물철학>에서 주장했다. 이 책자에서 기린은 높은 곳에 있는 먹이를 먹기 위해 노력과 경험을 통해 목을 계속 늘어뜨렸고 그 결과 지금처럼 길어졌다는 의견을 넣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철저하게 묻혔고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엉망이 된 프랑스에서 라마르크는 늘그막에는 동물원 수위를 하면서 어렵게 살아갔다. 라마르크는 거의 항상 생활고에 시달렸고 말년에는 눈까지 어두워졌다. 그의 연구는 언제나 웃음거리가 되었으며 동료 학자들로부터도 비웃음당했다. 심지어 장례식 때까지도 비난받았을 정도였다. 당대 상당히 존경받았던 고생물학자인 조르주 퀴비에(Georges Cuvier, 1769~1832)가 장례식 조사를 읽는답시고 죽은 라마르크를 비웃은 것.[1]
이런 비웃음 속에서도 라마르크는 1829년 85살로 숨을 거둘 때 남겨진 다섯 남매[2]에게 언젠가 자신이 이룩한 연구가 재평가될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파리의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며 큰 딸인 코르넬리가 다음과 같이 위로하는 말이 묘비에 적혀 있었다고 한다.
"뒤에 세상 사람들은 반드시 아버지를 칭찬해줄 겁니다. 그리고 당신의 유한을 풀어줄 것입니다.'[3]
그의 무덤은
1830년
7월 혁명 와중에 사라져서 현재는 가묘로 남아있다. 왜 이런가 하면 자녀들도 가난에 시달려서 겨우 돈빌려가면서 장례식도 열었지만 혁명 와중에 이장되던 통에 여러 시체들과 섞여서 대충 묻었기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처럼 시신 행방을 지금도 알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이걸 안 다섯 자녀들은 슬퍼했고 하나둘 이들도 가난에 시달려 세상을 뜨면서 죽을 때도 아쉬워했다.비웃음 속에 잊혔던 이 학설은 다윈의 진화론이 나오면서 재평가된다. 당시 프랑스 과학협회는 진화론 이전에 프랑스에서도 이런 학설을 주장한 선구자가 있다고 하여 부랴부랴 유족을 찾았는데 다섯 남매 중 막내딸만 70대 나이로 살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가 훈장을 수여받고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뜻이 30년만에 빛을 보았다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코르넬리가 아버지를 위로하며 묘비에 남겼던 예언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아쉽게도 코르넬리도 이걸 못보고 죽은 다음이었지만 말이다.
결론적으로 그의 용불용설에는 문제점이 있다고 판명되었지만, 여전히 라마르크는 체계적인 학설로서 최초로 진화론을 제시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3. 문제점
용불용설은 다윈주의 진화론과는 엄연히 다른 분야의 것이었으며 어떻게 보면 다윈주의 진화론은 용불용설을 깨부수는 이론이었다. 현대 생물학에선 부모대에서 후천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봐야 그것이 유전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본다. 다윈은 용불용설에 대해 어느 정도 옹호적인 자세를 취했으나, 독일 학자 바이스만이 생쥐 꼬리를 계속 자르고 그 생쥐들의 후손 꼬리의 길이를 확인하는 실험을 통해 획득 형질이 유전됨을 부정했다.밀렵꾼들이 상아를 노리고 코끼리를 학살하자 전반적으로 코끼리들의 상아가 짧아지고 있다. 크고 멋진 상아는 인간에 의해 생존에 불리한 형질이 되어버렸고 이것이 지속적으로 환경압으로 작용하다 보니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압력이 정말 오랜 기간 지속된다면 먼 훗날의 인류가 보게 될 코끼리들은 아에 상아가 없어지거나 작아진 종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는 용불용설의 사례인 줄 오해할 수 있으나, 이는 쥐꼬리를 자르는 게 아니라 긴 꼬리를 가진 쥐들만 죽여버리는 것과 같다. 이는 인간이 형성한 인위적인 '환경'으로 인해 큰 상아를 만드는 유전자가 제거된 결과이니 용불용설의 사례가 아니다.
4. 재발견?
획득 형질은 유전되지 않음이 밝혀져 현대 진화 이론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 식물의 메틸화된 유전자가 그대로 유전되는 것이 후성유전학을 통해 확인되면서 재조명받고있다.다세포 생물이 아닌 미생물이나 박테리아에서는 환경압에 의해 당대에서 특정 유전자의 복제 수가 달라진다거나 하는 현상은 보고되고 있다. 즉 100% 틀린 이론은 아니다. 아울러 후성유전학이 각광을 받으면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이 재조명을 받고있다고 한다. 후성유전 중에는 당대에 획득한 형질이 후대에 영향을 주는 현상도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의 세계-뇌의 비밀] (9) 경험도 유전된다 2017. 06. 29.
그러나 후성유전학은 용불용설이 아닌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가깝다. #
5. 여담
생물학과 별개로, "정보의 진화"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이 용불용설과 흡사한 점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관련 TED 강연밈 이론도 어떻게 보면 다윈식 진화보다는 이 쪽에 가까울지도?
소련에서 트로핌 리센코라는 과학자가 이 설을 주장하면서 농업에서 전면적으로 춘화처리(종자를 추운 곳에 얼린 후 심는 것)를 해서 종자를 만들겠다고 하다가 망했다. 이 농업 실패가 소련에서 니키타 흐루쇼프가 퇴진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춘화처리 자체는 유용한 방법으로, 겨울을 버티는 작물들을 봄이나 여름에 심을 때 무조건적으로 행해지며 춘화처리를 하지 않을 경우 식물이 생식생장을 하지 않고 영양생장만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용불용설에 따라 한번 춘화처리를 한 종자의 자손은 다시 춘화처리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를 적용해 상당수 작물이 생기란 곡물은 안생기고 잎만 무성하게 자라는 등 한 나라의 농업을 말아 잡순 사건이다. 자세한 건 트로핌 리센코 문서 참조. 그런데 정작 리센코 본인은 용불용설을 배척했으며, 자신의 이론은 획득 형질 이론이라고 믿었다. 획득 형질 이론이란 앞서 언급된 후성유전학의 한 형태로 용불용설과는 다른 이론이다. 문제는, 리센코의 주장은 이 후성유전학의 관점으로도 틀린 내용이었다는 것.
이렇듯 결점이 많아 사실상 다른 것으로 대체된 구형 이론이지만 현대에도 생물학자들이 용불용설에서 자유롭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라는 문제가 있기도 하다. 이렇게 되는 원인은 용불용설이 가장 직관적인 이론이라는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훈련을 많이 받은 생물학자라 해도 조금만 방심했다간 가설을 세우는 단계에서 용불용설을 살짝이나마 뒤섞을 위험이 있어 많은 연구자들이 이 오류를 피하려고 골치를 썩는다.
가령 시뮬레이션 쪽을 활용하는 생물학도들의 경우, 시중에 나와있는 관련 소프트웨어마다 진화 과정을 지나치게 랜덤으로 설정해놓은 거 아닌가 하는 불만을 가지는 일이 많은데, 이 또한 이쪽으로 쓰일 소프트웨어도 결국에는 사람이 프로그래밍하는 것이기에 개발자들 입장에서는 행여나 진화 과정을 코딩할 때 용불용설 비슷한 원리를 집어넣게 될까 걱정이 앞서므로 생기는 일이다.
2009 개정 교육과정 이래로 중학교 과학 및 고등학교 생물학 파트에서 해당 설이 틀린 내용으로 나온다. 7차 교육과정까지는 가설로 소개되었지만 딱잡아 틀렸다곤 서술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설'의 뜻을 모르는 해당 세대( 1995년 이전 출생자 및 대부분의 14 이전 학번)는 학문에 대한 오해 지식을 갖기 쉬웠다.
[1]
참고로 퀴비에는 종의 정착을 주장하며 진화론을 반대했고 흑인에 대하여 원숭이에 가깝다고 여기며
인종차별을 해왔다. 유럽으로 끌려와서 서커스 구경거리로 비참하게 살던 흑인 여인
사라 바트만(Sarah Baartman, 1789~1815)이 죽자 짐승이라는 걸 밝히겠다고 해부하던 자이니 말 다했다. 뭐 해부하니 백인이건 흑인이건 몸 속 장기와 신체기관은 다 똑같더라며 마지못해 사람이라는 걸 실망하며 인정했지만 말이다.
[2]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했으며, 여덟 명의 자식이 있었으나 다섯 명만이 그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3]
그의 딸은 장례식장에서 "세월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줄 것입니다."라고도 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