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2-15 19:30:23

라라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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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쿠스 강과 시가지

1. 개요2. 역사
2.1. 중세2.2. 스페인령 라라슈2.3. 라라슈 공방전 (1689년)2.4. 프랑스 격퇴2.5. 근현대
3. 관광
3.1. 메디나 (구도심)3.2. 리쿠스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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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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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어 العرايش
베르베르어 ⴰⵄⵔⵉⵛ
영어, 스페인어 Larache

모로코 북부의 도시. 현지 지명은 엘아라이쉬지만, 세간에서는 서구권에서 부르는 라라슈로 더 알려져 있다. 아실라 크사르 엘케비르에서 각각 남쪽과 서북쪽으로 25km, 테투안에서 서남쪽으로 75km, 케니트라에서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13만명이다. 역사가 유구한 리쿠스 강 하구의 항구 도시로, 모로코 북부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이다. 중세와 근대 모로코 술탄들이 성벽과 구도심을 조성하였는데, 17세기와 20세기 스페인의 지배를 받으며 유럽 양식이 더해져 안달루시아처럼 다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프랑스의 소설가 장 주네가 사랑했고 매장된 도시로, 지금도 많은 유럽인들이 방문한다. 메디나 (구도심)과 동쪽 외곽의 리쿠스 유적이 주요 볼거리이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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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쿠스 유적

루쿠스 강 동안의 언덕에는 기원전 1180년부터 베르베르 인들의 도시가 있었고, 기원전 7세기 카르타고와 비슷한 시기 페니키아인들이 정착하였다. 고대 카르타고 시절 리쿠스는 남쪽의 셸라, 모가도르와 함께 카르타고 인의 주요 대서양 거점 중 하나였다. 카르타고 멸망 후 일대는 마우레타니아 왕국령이 되었고, 유바 2세와 프톨레마이오스 대에 리쿠스에는 수공업 지구가 더해지는 등 중시되었다. 근해의 풍부한 참치 조업량과 비옥한 루쿠스 강의 흑토에 기반한 포도 수확 덕에 리쿠스는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이자 대서양 무역의 주요 거점 중 하나로 번영하였다. 서기 40년 마우레타니아 왕국은 로마 제국에 병합되었고, 일대는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니아 속주로 편성되었다. 다만 로마 지배로의 과도기에 벌어진 아이데몬의 반란기에 도시 일부, 특히 신전 구역은 파괴를 겪었다.

반란을 진압한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서기 50년, 리쿠스에 콜로니아 (식민도시) 지위를 내리며 극장과 포룸을 세우고 로마식 도시로 재건하였다. 4세기간 이어진 로마 제국기 리쿠스는 내륙의 볼루빌리스와 함께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니아의 양대 도시로 번영하였고, 기존의 어업에 염업도 함께 발전하여 상업적 활발함을 더하였다. 3세기 무렵 리쿠스는 기독교화되었고, 도시 상부에 교회가 세워졌다. 하지만 로마 제국의 쇠퇴와 함께 유목 민족들이 자주 침공해오며 리쿠스는 3세기 말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4세기에는 시가지는 절반 가량으로 축소되어 성벽잉 둘러졌다. 다만 도시 자체는 이슬람 정복 후까지 이어졌고, 8세기 이드리스 왕조에 의해 군사 기지로 활용되었다. 당시 지명은 토춤미스였고, 13세기 무렵에는 모스크도 세워졌다. 비슷한 시기 현재의 도심부는 항구 옆에 형성된 작은 마을에 불과하였다.

2.1. 중세

앞서 살펴보았듯 중세 초기까지 루쿠스 강 하구 일대는 미래의 라라슈가 될 어촌과 토춤미스 (리쿠스)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던 1471년 아실라와 탕헤르의 포르투갈 인들이 남하하여 원주민들을 축출하였고, 이후 일대는 한동안 폐허로 남아있었다. 1489년 2월 포르투갈 인들은 와타스 왕조의 술탄 아부 압달라 모하메드로부터 루쿠스 강이 와디 엘마카진과 합류하는 곳의 하중도를 할양받아 그곳에 그라시오사 성채를 세웠다. 하지만 얼마후 아부 자카리야 모하메드 엣-셰이크 엘-메흐디의 와타스 군이 목재로 강을 봉쇄하고 성채를 포위 공격하였다.

외부와 고립된 포르투갈 수비대는 1489년 8월 하메즈 조약으로 성채를 넘기고 떠났다. 그리고 1491년 물라이 엣-나세르가 루쿠스 강 하구의 언덕에 카스바 (성채)를 세웠고, 안달루스 난민들이 유입되며 해적 기지로 쓰였다. 16세기 초엽 사드 왕조의 술탄 무함마드 앗-셰이크는 해당 성채를 중심으로 한 도시를 세웠고, 기존 토춤미스 주민들도 방어에 용이한 이곳으로 이주해왔다. 이렇게 세워진 라라슈는 점차 모로코의 주요 항구이자 해적 거점 중 하나로 성장하게 된다.

2.2. 스페인령 라라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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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년 스페인 제국의 라라슈 접수

아흐마드 알 만수르 사후 그의 두 아들인 모하메드 앗-셰이크 엘마문과 지단 아부 마알리는 각각 페스와 마라케쉬를 거점으로 내전을 벌였다. 1608년 패배한 엘마문은 스페인으로 망명하여 펠리페 3세에게 엘아라이쉬 (라라슈) 할양을 대가로 군사 원조를 얻어내었다. 스페인은 라라슈에 대한 야욕이 있었는데, 과거 후안 데 멘도자 휘하의 원정대가 파견되었고 1608년에도 알바로 데 바잔이 점령을 시도한 바 있다. 1610년 엘마문은 스페인에서 출항, 탕헤르를 거쳐 라라슈를 당도하고 스페인 군을 맞이할 준비에 나섰다. 그리고 같은해 11월 20일 (과거 라라슈 점령을 시도한) 후안 데 멘도자 휘하의 3천 스페인 군대는 라라슈를 저항 없이 접수하였고, 이어서 페스까지 장악하였다. 다만 외세에 땅을 내어준 엘마문에 대한 민중과 성직자들의 반발은 컸고, 그는 1613년 암살당하였다. 다만 스페인은 라라슈를 그저 무역 거점 정도로만 활용하였다.

2.3. 라라슈 공방전 (16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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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수비대가 농성 끝에 항복한 라라슈 시타델

알라위 왕조의 술탄 물라이 이스마일은 중앙 집권을 확립, 내부를 안정시킨 후 외세가 장악하고 있는 해안을 수복하고자 하였다. 1681년 우선 스페인에게서 메흐디야 ( 케니트라)를, 1684년 영국에게서 탕헤르를 수복한 그는 다음 목적으로 라라슈를 선정하였다. 스페인 당국 역시 수년 전부터 이스마일이 공공연히 라라슈가 공격 대상이라고 밝혀왔기에 1688년 들어 성채를 보강하고 2천의 수비대와 2백문의 대포를 배치해 둔 상태였다. 1689년 7월, 카이드 알리 벤 압달라 휘하의 3만 알라위 기병대는 라라슈로 진격하였고 이듬달 도시를 완전히 포위하였다. 봉쇄를 이어가며 알라위 군은 10월 10일까지 성벽 밑에 2개의 지뢰를 매설하는데 성공하였다.

11월 6일, 지뢰의 격발과 함께 붕괴된 성벽 틈새로 알라위 군이 진입하자 스페인 군은 내성인 시타델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11월 11일, 스페인 수비대는 항복하였다. 전투 결과 2천의 수비대 중 4백여가 전사하고 1600명은 포로가 되었으며, 알라위 측은 40문의 대포를 노획하여 메크네스로 개선하였다. 메크네스에서 이어진 협상에서 1백여 스페인 지도부는 본국 귀환이 허가되었으나 이스마일은 그들을 계속 잡아두었고, 스페인 측에 그 10배에 달하는 모로코인 포로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스페인은 500명의 모로코인 포로와 에스코리알 서고의 아랍어 서적 5천권 양도를 제안하였고, 이스마일은 사절 모하메드 알-와지르 알-하사니를 마드리드로 보내 서적을 검토하게 하였다.

하지만 스페인 사제들은 해당 서적들이 1671년 에스코리알 화재 시에 전소되었다고 거짓말하였고, 결국 1691년 2월 스페인 당국은 이스마일의 원안대로 1천 모로코인 포로와 1백의 스페인령 라라슈 지도부를 교환하기로 합의, 그해 9월 세우타에서 성사되었다. 이스마일은 스페인이 나이 들고 병약한 모로코 인들을 풀어주고 건장한 이들은 붙잡고 있다며 푸념하였지만 이번에는 약속을 지켰다. 한편 포로로 남은 1천 6백의 스페인 포로들은 절반 가량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자유를 찾았다. 물라이 이스마일은 기세를 이어가 1692년 아실라를 점령, 모로코에 남은 유럽 세력을 세우타, 멜리야, 엘자디다, 카사블랑카를 제외하고는 모두 수복하였다.

2.4. 프랑스 격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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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5년 프랑스 함대의 라라슈 포격

7년 전쟁으로 아메리카 식민지를 잃은 프랑스는 마그레브, 특히 모로코 해안에 관심을 기울였다. 명분상으로는 전시를 틈타 유럽 상선들을 약탈하던 바르바리 해적 퇴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새 식민지 개척이 목표였다. 1765년 6월 프랑스 함대는 10일간 살레를 포격했으나 함포의 사정거리가 항구에 미치지 않아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메디야 (케니트라)로 향했으나 항구에 건물이 하나 뿐인 것을 보고 다른 목표의 모색에 나섰다. 21일 52개의 함포를 갖춘 우티르를 포함한 16척의 프랑스 전함과 수 척의 갤리엇 등으로 구성된 프랑스 함대는 뒤샤포 드 베네 지휘 하에 라라슈 앞바다에 나타났다. 25일 저녁 프랑스 함대는 하구에 정박 중이던 모로코 전함과 성채를 동시에 공격하려 했으나 풍랑 때문에 공격을 다음날로 미루었다. 26일 프랑스 함대는 라라슈의 해안 포대를 기습, 파괴하였고 항구의 선박들을 불살랐다.

다음날 새벽 프랑스 함대는 하구의 모로코 전함을 공격하여 방화에 성공했으나 수비대 측이 불을 끄는데 성공하였다. 이후로도 프랑스 측은 해당 전함을 공격하려 했으나 파도 방향이 바뀌고 강물이 줄어 접근이 어려워졌다. 뒤샤포 제독은 휘하 함장들과의 회의 끝에 소형 선박들에 병사들을 태워 공격하기로 하였다. 함대를 최대한 하구 근처까지 근접시키고 정오까지 라라슈 시내를 포격한 후 오후에 소형 선박들을 항만 건물 파괴조와 지원조로 나누어 파견하였다. 프랑스측 보트들이 하구에 진입한 순간, 바위 뒤에 엄폐하고 있던 모로코 선박들이 나타났고 양측은 포화를 주고 받았다. 하지만 선봉의 갑작스러운 정지 때문에 뒤엉킨 프랑스 보트들은 이내 모로코 선박들에 포위되었다.
그 결과 16척의 프랑스 선박들 중 7척이 나포되었고, 200 ~ 300명이 전사했으며 48명이 포로가 되었다. 모로코 측은 30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라라슈 원정은 프랑스 해군 사상 최악의 실패 중 하나로 귀결되었고, 1767년 프랑스와 알라위 왕조는 무역 협정을 맺으며 적대 관계를 청산하였다. 다만 포로들은 석방되지 않았고, 당시 한창 건설 중이던 에사우이라 공사 현장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2.5.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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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령 모로코 시기의 누에스트라 셰노르 델 필라르 교회 스페인령 모로코 시기 도시의 중심이던 해방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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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광장 (구 에스파냐 플라자)와 구도심 일대 20세기 이전 라라슈 성벽 전경 (케비바트 ~ 엔나스르 성채)

17-18세기의 혼란 후 라라슈는 한세기 이상 안정을 누렸다. 프랑스를 몰아낸 모하메드 3세 국왕은 라라슈의 시장을 확장하고 나시리야 모스크를 세우는 등 도시에 관심을 기울였다. 19세기에는 1829년 오스트리아 함대가 해적들에 대한 보복으로 포격을 가한 것 외에는 큰 사건이 없었다. 당시 라라슈는 유대인 2백명과 유럽인 20여명을 포함한 인구 3천 5백의 항구 도시였다. 그러던 1911년 6월 8일, 스페인 군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이어진 스페인령 모로코 시기 구도심 주위로 에스파냐 플라자 등 현대적인 시가지가 조성되었다.

3.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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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라슈 위성 사진
    라라슈의 볼거리는 크게 항구 서쪽의 구도심 (메디나)와 루쿠스 강 동안의 언덕에 자리한 리쿠스 유적으로 나뉜다.

3.1. 메디나 (구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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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에 세워진 '유대인 성탑' 전통 시장
  • 라라슈의 메디나는 크지 않아 빠르게 둘러 본다면 한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비록 페스나 마라케쉬처럼 화려하거나 거대하지는 않지만, 외부의 영향이 적어 모로코 자체의 정취를 느끼기에는 더 좋다. 본 항목에 소개된 장소들 외에도 유적은 많다. 18세기에 세워진 대사원과 마드라사, 1차 스페인 지배기에 세워진 프란치스코회 예배당을 개조한 안와르 모스크, 알라위 왕조기 조선소, 스페인령 모로코 시기의 산 호세 교회와 시계탑, 갖은 창고 건물과 병원 및 예배당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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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시리야 모스크
    18세기 알라위 술탄 물라이 모하메드 3세가 프랑스 원정군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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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엔나스르 (라칼리크 / 산타마리아) 성채
    1578년 술탄 아흐마드 알 만수르 앗-다하비가 사로잡은 이탈리아 / 포르투갈인 기술자를 동원하여 메디나 외곽에 세운 성채로, 승리를 뜻하는 엔나스르라 명명되었다. 17세기 스페인 지배가에는 유럽의 산타 마리아 성채 (Castillo de Santa María de Europa)라 불렸고, 인접한 유대인 성탑과 함께 카스바 성문을 수비하였다. 본래 완연한 삼각형 모양이었으나 스페인령 모로코 시기 북동쪽 부분이 철거되었다. 현지 별명인 라칼리크 (اللقلق)는 성채가 날개를 핀 황새와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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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크 엘-사게르 (조코 데 치코)
    해방 광장을 통해 이어지는 18세기의 시장으로, 양옆의 회랑은 스페인 지배기에 복원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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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엘케비바트 성채 (حصن القبيبات)
    1578년 술탄 아흐마드 알 만수르가 크사르 엘케비르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르투갈인 포로들을 동원해 세운 성채로, 르네상스 양식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름인 엘케비바트는 '돔들'이란 의미로, 돔 형태의 감시탑들이 솟은 것에서 기인한 것이다. 다만 20세기 들어 거의 방치되고 있는 상태라 당국의 관심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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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쿠스 유적에서 바라본 시가지

3.2. 리쿠스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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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적지 전반
    페니키아-카르타고, 마우레타니아, 로마, 이슬람 시기 도시 유적이 층층이 쌓여 있다. 그중 1948년부터 주력적으로 발굴된 것은 성벽이 둘러진 로마식 도시로, 팍스 로마나 시기 마우레타니아 지역의 번영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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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룸 유적
    식민 도시로 격상된 클라우디우스 황제기에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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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전 유구
    후일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내부의 원통형 아치가 남아있으며, 현지 유목민들의 창고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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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택가 유구
    볼루빌리스보다 대체적으로 더 면적이 넓다. 이는 고대 시기 리쿠스의 번영을 나타낸다. 큰 규모의 저택들은 회랑으로 둘러진 안뜰을 지닌 ㅁ 자 형태의 페리스타일이었고, 내부에는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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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 시대 극장
    1세기 무렵 도시를 두른 성벽 동쪽에 세워진 직경 32m의 극장으로, 거의 원형을 띠고 있다. 모로코 독립 후인 1963년에 발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