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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스 이그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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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생
2.1. 초기 경력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2.3. 7년 전쟁과 말년

1. 개요

프랑스 왕국 부르봉 왕조의 육군 원수. 베르슈니 백작. 헝가리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가 실패하여 프랑스로 망명한 뒤 프랑스군 장성으로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에서 활동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이그나스는 헝가리 왕국의 고위 귀족 가문 출신이다. 그는 1689년 8월 3일 에페례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니콜라우스 베르슈니 백작이었고 어머니 크리스티나는 트란스카르파티아 출신의 귀족 가문인 드루게트 가문 출신 호모나 백작부인이었다. 그의 가족은 에페례시의 궁전을 소유하고 있었다. 베르슈니는 2살 때 친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니콜라우스 백작의 둘째 부인인 크리스티나 카스키 백작 부인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1703년 라코치 페렌츠 2세 합스부르크 가문에 저항하는 봉기를 일으키자, 라코치와 절친한 관계였던 니콜라우스 베르슈니 백작은 즉시 호응하여 반란군의 사령군이 되었다. 이그나스는 이 어려운 시기에 처음에는 코시체에서 아버지와 함께 지내다가 나중에는 라코치의 궁정에 있었다. 그 후 그는 에페례시, 커셔, 운그바르의 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학업을 채 마치지 못한 채 반란군에 가담하여 라코치의 근위병 부대에 복무했다.

1708년 8월 3일, 트렌첸 전투에 참가한 이그나스는 라코치가 말이 총에 맞아 죽는 바람에 낙마하여 말 밑에 깔려 기절하자 즉시 말을 치운 뒤 라코치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갔다. 그 후 라코치 왕자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그를 처음엔 기수로 임명했다가 나중엔 근위대 소령으로 진급시켰다. 1711년 황제군이 반란을 진압하자, 라코치는 헝가리를 떠나면서 이그나스를 프랑스로 보내 루이 14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친서를 전달하게 했다.

1712년 9월 1일, 루이 14세는 이그나스를 근위 기병대 중위로 임명했다. 이그나스는 곧이어 대위로 진급했고, 같은 해 12월 31일에 라츠키 후사르 부대의 연대으로 전출되었다. 1713년, 이그나스는 라츠키 후사르 연대와 함께 라인강에서 황실군과 전투를 벌였고 1718년 12월 1일에 대령으로 승진했다.

1719년 사국 동맹 전쟁 동안, 이그나스는 스페인 전역에 참가해 폰트라비 요새를 포위하여 7월 16일에 함락시켰다. 그 후 산 세바스티안 요새 포위전에 참가하여 8월 1일 공략에 성공했고 우르헬 전투와 로즈 전투에서 연이어 용맹을 떨쳤다. 1720년 5월, 이그나스는 마르세유에서 생 루이스 기사단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고 6월 12일 그의 이름을 붙일 후사르 연대를 만들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리하여 창설된 '베르슈니 후사르'는 오직 헝가리인들로만 구성되었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지배받고 있는 헝가리에서 직접 채용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는 당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지배권이 이야되었던 에르데이 공국으로 가서 헝가리인을 모집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기에, 나중에는 독일인도 받아들여야 했다.

1725년 6월 1일, 이그나스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이었다가 프랑스로 망명한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의 최고 재무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이그나스는 '베르슈니 후사르' 연대와 함께 야전에 나섰다. 그는 켈 포위전에 참가해 10월 28일에 함락시켰고 1734년 2월 20일에 소장으로 진급하는 동시에 베윅 원수 휘하의 라인강 방면 프랑스군에 배속되었다. 같은 해, 그는 필립스부르크 요새와 마인츠 포위전에 참가했고 1735년에는 쿠아뉘 원수 휘하 라인강 방면 프랑스군에 배속되었다.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뒤, 이그나스는 1738년 3월 1일에 야전군 사령관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그는 스타니스와프 1세의 궁정에 남아있었고, 같은 해 4월 21일에 시종 무관으로 임명되었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한 1741년, 이그나스는 보헤미아 왕국을 침공한 프랑스군에 배속되었다. 그는 짧은 기간 동안 바이에른에서 세귀르 원수의 지휘를 받았고 11월 26일부터 프라하 공략전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는 곧 황제군의 역습을 피해 보헤미아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이끌고 프라하로 후퇴해야 했다.

1742년 5월, 이그나스는 피세크 전투에 참가했고 프라우엔베르크 구원전에도 참가했다. 이후 프라하로 돌아와 도시 방위를 맡았고 8월 22일 여단을 지휘하여 간신히 포로들을 데리고 갔다. 그해 12월, 베르슈니는 그림 벨 아일 공작 샤를 루이 오귀스트 푸케의 지휘하에 프라하에서 프랑스 본토로 철수하는 고난의 여정에 참가해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프랑스에 돌아왔다.

1743년 3월 16일 아군의 후퇴를 성사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생 루이 사령관 십자 훈장을 수여받은 그는 같은 해 4월 윔스, 오펜하임, 아샤펜부르크를 지나 마인강으로 진군하는 노아유 제독의 군대에 합세했고 6월 27일 데팅겐 전투에서 조지 2세가 이끄는 영국-네덜란드-헤센 연합군과 맞붙었으나 패배를 면치 못했다. 이후 이그나스는 주력군의 라인강을 향한 후퇴를 엄호했고, 12월 8일 모든 프랑스 후사르 연대의 군 감찰관에 임명되었다.

1744년, 이그나스는 노아유 원수의 지휘 아래 플랑드르 전역에 참가했다. 그러다가 루이 15세가 친정에 나섰을 때 중장으로 진급했고 서멜스하임과 비쉬윌러 전투에 참가했고 연말에는 하부 라인 강변 방면군에서 복무했다. 이후 1745년 전역에서, 이그나스는 마인 강변을 사수하는 프랑스군에서 복무했고 겨울 동안 자르게민 방면 프랑스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746년 5월, 이그나스는 플란데런으로 보내져서 32개 드래곤 연대와 18개 후사르 연대가 집결한 대규모 기병대를 지휘했다. 그는 앤트워프, 몽스, 샤를루아 요새 포위전을 수행하고 있는 루이 드 부르봉-콩데 장군 휘하 기병 예비군단을 맡았고 8월 14일에는 모리스 드 삭스 원수의 지휘하에 멘헤이그 강을 수비하는 군대를 맡았다. 이후 그의 군단은 콘티 원수의 군대에 배속되었고, 8월 20일 후사르 3개 대대와 척탄병 2개 대대를 이끌고 헤이슨 수도원으로 진격하여 오스트리아 수비대를 수도원 바깥으로 몰아내고 도주하는 적을 뫼즈강을 따라 추격했다. 10월 11일, 로쿠스 전투에 참가한 이그나스는 기병 사단 전체를 이끌어 아군의 승리에 기여했고 11월 1일 자르게민으로 돌아와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 이 시기 그는 파리의 동쪽에 위치한 루잔시에 작은 성을 쌓았다.

1747년, 이그나스는 32개 기병 분대 지휘를 맡아 7월 2일 라우펠드 전투에 참가하여 영국군을 상대로 성공적인 돌격을 이끌어내 아군의 승리에 일조했다. 그 후 그는 로렌 일대의 군사령관으로 복무했고 1748년 3월 11일 루네빌에서 발표된 포고령에 따라 스타니스와프 1세 궁정의 컴메르시 주지사 겸 사냥꾼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6월, 이그나스는 이탈리아에서 활동 중인 그림 벨 아일 공작의 군대에 배속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어떠한 전투에도 참가하지 못하고 10월 23일 컴메르시로 돌아왔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뒤, 이그나스는 1753년 8월 25일 오랫동안 프랑스를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생 루이 대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2.3. 7년 전쟁과 말년

7년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757년, 이그나스는 루이 15세가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한 군단을 지휘했다. 그의 군단은 주로 헤센카셀에서 싸웠으나 오스트리아까지 이르지 못했고, 그는 11월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1758년 3월 15일, 이그나스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프랑스군 원수로 진급했다. 그러나 이후로는 고령의 나이 때문에 더이상 전장에서 활약하지 못했다.

1759년 11월 26일 후사르 연대군 감찰관 직무를 사임한 그는 그가 건설한 루잔시 성에서 말년을 평온하게 보내다가 1778년 1월 9일 숨을 거두었다. 향년 89세. 그는 생전에 안나 카타리나와 결혼하여 12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 중 1744년 6월 17일 뤼네빌에서 태어난 프란츠 안톤 라디슬라우는 프랑스 육군에서 복무해 야전군 사령관의 직책까지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