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2-09 08:00:52

디시인사이드 제주도 식민지 음모론 제기 사건


파일:대한제국 제주도 발문.jpg
대한제국 제주도 식민지로 주장했다는 근거의 제시문. 모의고사의 보기 형태로 제시된 글을 촬영한 형태로 여러 커뮤니티에 올라왔다.
해당 실시간 베스트 글.

1. 개요2. 제주도의 역사
2.1. 고려시대2.2. 조선~대한제국
3. 사진 내용의 사실 여부4. 사진의 발문의 출처?5. 참조

1. 개요

디시인사이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마이너 갤러리에서 한 유저가 상단의 사진과 함께 "대한제국은 제주도를 식민지로 간주하였다"는 주장을 한 것을 시작으로, 이것이 여러가지 유머나 시사 화제를 게시하는 싱글벙글 지구촌 마이너 갤러리 에펨코리아 등 다른 커뮤니티로 확산되어 인터넷상에서 논란이 된 사건이다.

해당 글의 댓글을 비롯해서, "당대 다른 열강들은 다들 엄청난 세력 확장을 했는데 대한제국은 겨우 자기 나라 땅인 제주도를 식민지라고 규정하고 그걸로 제국이라고 하냐" 는 식의 국까 소재로 사용되며 주기적으로 게시되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대의 어떤 사료에도 대한제국이 그러한 선언이나 내부결정을 했다는 기록이 없으며, 그 이전에 식민지의 경영을 칭제건원의 조건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논의는 물론, 제기조차 되지 않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만의 음모론성 논란이다. 위 글의 이미지조차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의 내용인지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2. 제주도의 역사

곧 종래의 17현을 제주 본읍과 대정·정의 양현으로 통합 및 정비를 하였는데, 1416년 5월 제주목에는 동도 도현에 신촌현·함덕현·김녕현·토산현·호아현·홍로현, 서도 도현에 귀일현·고내현·애월현·곽지현·귀덕현·명월현·예래현·산방현·차귀현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주현인 제주목에는 그 정무를 행사하는 곳인 대촌현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속현이 15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의 예래현 문서에서 1416년 통폐합 직전 상황을 기술한 단락. 제주도는 늦어도 1416년 이래 완전히 본토와 행정적으로 통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전 역사는 후술.
탐라국 제주도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제주도는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의 나라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여말선초에 한반도의 집권국가에 완전히 예속되었다.

2.1. 고려시대

1105년 숙종 시기에 탐라국은 탐라군으로 개칭되면서 속국 지위가 박탈되었고, 본토에 있는 중앙 정부의 통제권에 들어왔다.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지방관과 탐라 현지인은 갈등을 빚었으며 결국 1168년 양수의 난으로 폭발했다. 하지만 '성주'는 여전히 대를 이어 세습되었고 어느 정도의 자치권은 계속 허용되었다. 고려 말 목호의 난 진행 과정에서도 목호 측과 고려 진압군 측 모두 명목상 탐라의 지배자인 탐라 성주를 회유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고려 중기 이후의 탐라는 사실상 고려에 복속했지만 아직 독립국가의 성격도 일부 가진 이중적인 정체성을 가진 지역이었다.

2.2. 조선~대한제국

조선시대에 들어선 1402년, 명칭이 제주도가 되었으며 마지막 성주인 고봉례(高鳳禮)가 삼국시대 이래로 제주를 지배한 고씨와 양씨가 세습한 성주와 왕자의 명칭이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개정하여 줄 것을 청하며 인부(印符)를 조선 조정에 반납했다. 제주도판 판적봉환. 그래서 1404년부터 성주는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개칭되었고, 이로써 그나마 이름만 유지하다가 조선에 완전히 편입되어 전라도 관할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을 설치, 완전하게 중앙 정부의 지휘를 받는 행정 구역이 되었다.
우리  태조(太祖)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耽羅國)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貢納)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 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禮樂)과 법도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고종실록, 고종 34년 10월 13일의 반조문[1] 출처
남쪽으로는 탐라국(耽羅國)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貢納)으로 받게 되었다.
공납(貢納)이란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조세 제도 중 하나였으며, 이는 제주도가 조선 이래 본토와 동등한 행정구역으로서 존속하였음을 방증한다. 따라서 이는 제주도가 식민지였다는 근거로 삼을 수 없다.

3. 사진 내용의 사실 여부

해당 보기에서는,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제국 성립의 근거로 제주도가 조선의 식민지임을 밝혔다.
라고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의 원 사료는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고종이 제주도를 식민지라고 밝혔다.", 또는 "대한제국의 선포 근거는 제주도가 식민지이기 때문이다."는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다음으로, "이재수의 난"은 신축민란으로 불리는, 실재했던 제주도의 민란이다. 그러나 해당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해당 사건이 제주도가 조선의 식민지로 취급되어 행해졌다고 보기 어려우며, 따라서 "제주도가 식민지로서 수탈당했다."의 근거로 삼기 어렵다.

이와 관련하여 주요 논문 데이터베이스에서 '제주도'와 '식민지'라는 키워드로 등장하는 유일한 논문은 가톨릭대학교 홍기돈의 '근대 이행기 민족국가의 변동과 호모 사케르의 공간 -현기영의 ≪변방에 우짖는 새≫, ≪바람 타는 섬≫을 중심으로-' #라는 논문 뿐인데, 이는 국문학 논문으로서 역사학 논문이 아님은 차치하고서라도 대한제국이 제주도를 식민지라고 간주했다는 주장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
제국이 성립하려면 식민지를 거느리고 통치해야 할 터, 황제로 즉위하는 고종은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 태조께서 왕위에 오르신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의 계에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을 거두어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받게 되었다. 그러니까 여진족(말갈족)을 몰아내고 차지한 4군 6진 지역과 탐라국이 있었던 제주섬이 (내부) 식민지로 규정되었던 셈이다.

특이하게도, 해당 논문에서 홍기돈은 실제 식민지와 관련한 사료는 하나도 없이, 오직 자신의 의견만으로 '식민지로 규정되었던 셈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고종이 "북쪽으로는 말갈의 계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탐라국을 거두었다"라고 발언했기 때문에 이것이 곧 제주도가 식민지라는 증거이며, 이를 토대로 황제국을 선포한 증거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오직 홍기돈의 위 국문학 논문에만 나타나고 있으며, 실제로 주류 사학계에서 이러한 주장이나 해석을 시도한 학자는 없다.

4. 사진의 발문의 출처?

발문의 형태로 볼 때, 수능 형식의 모의고사에서 볼 수 있는 보기로 보이나, 해당 발문이 사설 모의고사나 교육청 모의고사 등에 실제로 실려 있는지는 확인된 바가 없다. 실제로 저러한 글이 실존하는지도 확인된 바가 없으며, 단순히 "이런 보기가 실제로 존재하고[2], 누군가 사진까지 찍은 형태니 당연히 사실이 아닐까?" 라고 넘겨짚기 쉽다.

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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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축할 만한 일에 관한 글을 뜻함. [2] 물리적으로 종이에 인쇄되었다는 의미이지, 이런 글이 실제로 어떠한 모의고사에 실렸는지는 확인된 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