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외젠 들라크루아 Eugène Delacroi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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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페르디낭 빅토르 외젠 들라크루아 (Ferdinand Victor Eugène Delacroix)[1] |
출생 | 1798년 4월 26일 |
프랑스 제1공화국 샤랑통생모리스[2] | |
사망 | 1863년 8월 13일 (향년 65세) |
프랑스 제2제국 파리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묘지 | 파리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 |
신장 | 142cm[3] |
직업 | 화가 |
사조 | 낭만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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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들라크루아의 팔레트는 프랑스의 위대한 팔레트다. 그만큼 풍부한 색채를 사용한 화가는 없다. 우리는 모두 들라크루아를 통하여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폴 세잔
폴 세잔
프랑스의 화가. 19세기 낭만주의 예술의 최고 대표자로 손꼽히는 화가이다. 그의 라이벌로 불리는 앵그르가 신고전주의의 완벽함을 추구했다면 들라크루아는 외곽선의 명료성과 세밀하게 본을 뜬 형태보단 그들의 색과 운동에 대한 강조에서 영감을 얻었다.
2. 생애
1798년 프랑스 파리 근교의 샤랑통 생 모리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샤를 프랑수아 들라크루아는 혁명정부에서 나름 명성이 있는 외교관이었고, 어머니는 유명한 궁정 가구업자의 딸이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들라크루아를 임신할 무렵에, 아버지 찰스는 성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였는데다가, 네덜란드에 파견을 나간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 대다수 사람들은 외젠이 찰스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가 외교관이자 들라크루아 집안과 친하게 지냈던 탈레랑의 아들일 것이라 의심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예술을 사랑하는 집안 분위기에 따라 음악과 연극, 고전 등에 관심을 가졌으며, 아버지가 외젠이 7살 때 사망하자 탈레랑이 그의 후견이 되었고, 8살 때 리세 앵페리알에 입학했다. 1814년 어머니가 사망하여 누나 집에서 살다, 1815년에는 숙부의 소개로 유명한 화가인 게랭 남작의 제자가 되었다.이듬해에 파리 보자르에 들어갔고, 이 시기에 루브르 미술관에 드나들면서 루벤스와 제리코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 1819년 테오도르 제리코(Theodore Gericault)(1791년 ~ 1824년)의 작품《 메두사호의 뗏목》을 보고서 결정적으로 낭만주의를 신봉하게 되었다.[4] 이어 1822년에는 처음으로 낭만주의 그림인《 단테의 작은 배》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것으로 미켈란젤로와 루벤스를 떠올리게 하는 비애감이 살아 있는 작품이다.
들라크루아는 1824년 그리스 독립 전쟁에 공감하여《키오스 섬의 학살》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키오스 섬에서 그리스 인들이 투르크 인들에게 대량 학살당한 사건을 그린 것으로 1824년에 파리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이다. 1827년《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을 발표했고, 이어 1830년 파리에서 일어난 7월 혁명에 동참했으며,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그렸다.
들라크루아는 1832년 프랑스 정부 사절단에 끼어 모로코를 방문했는데, 그 방문 후 그의 그림에서는 색채를 효과적으로 쓰는 법과 붉은색과 녹색, 푸른색, 오랜지색을 적절히 배합하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귀국 후 1834년에 완성한 《알제의 연인들》은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와 같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프레데리크 쇼팽과 조르주 상드와도 친분이 있어 그들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으며, 상드의 아들인 모리스 디드방을 가르치기도 했다. 1835년부터 1861년까지 들라크루아는 많은 수의 대형 벽화를 제작했으며, 작품에 몰두하다 건강을 해쳐 1863년 세상을 떠났다.
3.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iberty Leading the People) |
4. 여담
- 키가 유난히 작은 편인데, 당시 웬만한 단신도 150cm는 넘었는데 반해 그는 142cm밖에 되지 않았다. 옛날 사람이 오늘날보다 작기는 하지만, 그의 신장은 그때 당시 프랑스 여성 평균 신장보다도 10cm는 더 작은 키이다. 위에서 언급되었다시피 그는 탈레랑의 사생아로 추정되는데, 공교롭게도 키가 작기로 유명한 나폴레옹 3세 역시 탈레랑의 핏줄, 즉 탈레랑의 사생아 플라오 백작과 루이 나폴레옹의 부인 오르탕스 사이의 사생아라는 의심이 있다. 여담으로 플라오 백작의 아들 모르니 공작은 나폴레옹 3세의 심복이자 들라크루아의 주요 후원자이기도 했다.
[1]
실제 발음은 '페흐디낭 빅토흐 외젠 들라크화'에 가깝다.
[2]
현재
일드프랑스에 위치한 '생 모리스'다.
[3]
증거
[4]
실제로 제리코와 들라크루아는 게랭 밑에서 배운 선후배 관계로 들라크루아는 제리코에게 금전적 지원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