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B0C4DE><colcolor=#000000> 워릭 백작 부인 데이지 그레빌 Daisy Greville, Countess of Warwick |
|
|
|
이름 |
프랜시스 이블린 그레빌[1] (Frances Evelyn Greville) |
출생 | 1861년 12월 10일 |
잉글랜드 런던 버클리 스퀘어 | |
사망 | 1938년 7월 26일 (향년 76세) |
잉글랜드 에식스 리틀 이스턴 이스턴 로지 | |
배우자 |
제5대 워릭 백작 프랜시스 그레빌 (1881년 결혼 / 1924년 사망) |
자녀 | 레오폴드, 마조리, 찰스, 메이너드, 머시 |
아버지 | 찰스 메이너드 |
어머니 | 블랜치 피츠로이 |
형제 | 블랜치 |
[clearfix]
1. 개요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의 정부(情婦)이자 워릭 백작부인.원래 이름은 프랜시스지만 데이지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2. 생애
2.1. 백작 부인이 되기까지
데이지 그레빌은 제3대 메이너드 자작 헨리 메이너드의 아들 찰스 메이너드와 블랜치 피츠로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어머니 블랜치 피츠로이의 가계가 특기할 만한데, 먼저 블랜치의 어머니는 찰스 2세의 정부로 유명한 넬 그윈과 바바라 팔머의 후손이다. 그리고 블랜치의 아버지는 마찬가지로 찰스 2세의 정부인 루이즈 드 케루알의 후손이다. 외가 쪽을 통해 데이지는 유명한 로얄 미스트리스 3명의 피를 이어받은 셈이다.데이지의 아버지는 자작이 되지 못하고 일찍 사망하였다. 데이지는 할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을 상속녀가 되었으며 어머니가 백작과 재혼하면서 재산과 집안 어디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는 사교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이상적인 신붓감인 데이지를 아들 레오폴드 왕자의 짝으로 눈여겨 보았다. 그러나 데이지는 레오폴드 왕자의 부관인 프랜시스 그레빌이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프랜시스 그레빌은 제4대 워릭 백작의 장남으로, 브룩 경이라고 불렸다.[2] 데이지와 프랜시스는 1881년 4월 30일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데이지는 결혼 후 레이디 브룩으로 불리다가 1893년에 프랜시스가 백작위를 물려받으면서 워릭 백작 부인이 되었다.
2.2. 남성 편력
데이지는 아이를 낳고 화려한 사교계 생활을 즐겼다. 그녀의 남편 프랜시스 그레빌은 후에 에드워드 7세가 되는 웨일스 공과 가까운 무리들 중 하나였다. 데이지는 자연스럽게 웨일스 공과 어울리며 그의 정부가 되었다. 데이지는 아름답고 재치있지만 경박하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다. 웨일스 공의 아내 덴마크의 알렉산드라는 남편의 애인에 대해 반응하는 일이 적었지만 워릭 백작 부인이 웨일스 공의 정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통을 터뜨리며 동생이 있는 러시아로 가버렸다. 데이지와 에드워드 7세가 연인이었던 시간은 10년 정도로 추정되며 이후 두 사람은 좋은 친구 사이로 지냈다.그러나 데이지는 웨일스 공 외에도 애인을 두었다. 데이지는 사교계에서 여러 사람과 어울리고 남자들을 만났다. 그 중 데이지가 가장 열렬히 사랑한 인물은 해군 장교인 찰스 베레스포드이다. 그러나 베레스포드에게 있어 데이지는 잠깐 즐기는 상대일 뿐이었다. 1889년에 데이지는 베레스포드의 아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화가 나 베레스포드에게 따지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이 편지는 베레스포드의 아내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다. 데이지는 자신의 불륜 사실이 상세히 적힌 편지를 돌려받으려고 했지만, 베레스포드의 아내는 그 대가로 데이지가 런던을 떠날 것을 요구했다. 곤란해진 데이지는 웨일스 공을 이 문제에 끌어들였다. 웨일스 공은 베레스포드의 아내를 회유하다가 잘 되지 않자 베레스포드 부부의 사회적 지위를 언급하며 위협했다. 이 사실을 안 찰스 베레스포드는 분노해 웨일스 공을 소파에 밀쳐버리는 무례를 범했다. 두 사람은 얼마 안 가 화해했지만 이전같은 사이로 돌아가지 못했고, 이 사건은 굉장한 스캔들로 남았다. 상류계급에게 있어 정부 한두명을 두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죄악시 되는 일로, 절대 공개적으로 드러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런데 데이지는 이를 편지에 적어 보내는 몹시 경솔한 짓을 한 것이다. 사람들은 데이지를 비웃으며 '수다쟁이 브룩(Babbling Brooke)'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이후 데이지는 조셉 레이콕이라는 백만장자 난봉꾼과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조셉은 데이지를 만나는 동시에 다운셔 후작 부인과 만났다. 그리고 다운셔 후작 부인이 남편에게 이혼당하자 그녀와 결혼했다. 그럼에도 데이지는 조셉을 계속 만났지만 이 관계는 소모적이었으며 데이지의 안 좋은 평판을 더욱 키울 뿐이었다. 웨일스 공도 두 사람을 떨어뜨리려고 했고, 결국 데이지는 조셉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2.3. 자선 활동
복잡한 남자 관계가 어느 정도 정리된 후 데이지는 자선사업에 몰두했다. 데이지는 모든 아이들이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얻어야 함을 주장했다. 사회주의 당에 가입한 데이지는 여성과 빈민 아동의 교육과 빈민층의 복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무료 배급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기금을 모으는 활동에 힘썼다. 또한 각종 기술 학교와 농업 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는 데이지에게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과 에드워드 7세의 원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그러나 자선 활동을 하면서도 데이지는 그전까지의 화려한 생활을 고수했다. 이러한 행보는 데이지의 개인 자산이 거덜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2.4. 말년
에드워드 7세가 사망한 뒤 데이지 그레빌의 경제 사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빚이 점점 불어나자 데이지는 에드워드 7세와 주고받았던 편지를 팔기로 결심했다. 이는 왕실의 권위를 크게 손상시킬 수 있는 일이었기에 조지 5세는 거액을 주고 편지들을 샀다.[3] 그럼에도 데이지의 채무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감옥에 갈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자 데이지는 회고록을 써서 책으로 내기로 했다. 선왕의 정부가 쓴 회고록에 어떤 내용이 들어갈지 알 수 없었기에 영국 왕실은 전전긍긍했다. 왕실에서는 빚을 줄여준다는 조건을 내세워 데이지의 회고록을 검열하기로 했다. 검열을 걸쳐 『Life's Ebb and Flow』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데이지의 회고록은 에드워드 시대를 가장 잘 묘사한 회고록으로 평가받는다.1938년 7월 26일에 데이지 그레빌은 76살의 나이에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유해는 워릭에 위치한 세인트 메리 대학 교회에 안장되었다.
3. 자녀
|
워릭 백작 부인 데이지 그레빌과 아들 메이너드, 1906년 |
3남 2녀의 자식을 두었다. 이 중에서 장남인 제6대 워릭 백작 레오폴드 그레빌만이 남편 프랜시스 그레빌의 자식으로 여겨진다. 이후에 낳은 두 아이는 찰스 베레스포드의 아이이며, 마지막으로 낳은 두 아이는 조셉 레이콕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