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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마이클 튜트 (Michael Tuite) |
생년월일 | 1966년 12월 27일 |
사망 | 2003년 12월 6일 |
신장 | 208cm |
체중 | 150kg |
출생지 | 미국 뉴 저지주, 오션 그로브 |
별명 | |
피니쉬 무브 | 초크슬램 |
커리어 |
NWA 뉴저지 하드코어 챔피언 1회 NJCW 헤비웨이트 챔피언 1회 PCW 헤비웨이트 챔피언 1회 AAW 헤비웨이트 챔피언 1회 PWI 2000년 PWI 500 단식 레슬링 선수 500명 중 126위 |
1. 개요
전 WCW, TNA 프로레슬러2. 커리어
제리 튜트는 더 월이란 닉네임으로 WCW에서 주목받던 빅 맨이었으나 메인 이벤터로 성장하지는 못한 다소 불운한 선수이다. 아이언 마이크 샤프의 프로레슬링 스쿨에 입교해 훈련을 받으면서 뱀뱀 비겔로우와 친구가 되었다는 그는 1999년 WCW의 파워 플랜트에 들어와 기량을 연마하다가 당시 WCW의 부킹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던 케빈 내쉬의 눈에 들어 WCW TV에 정식으로 데뷔하게 된다. 그는 베를린의 바디가드인 더 월로 등장했다. 이후 베를린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그는 독립적으로 활약했지만, 더 월 기믹으로 더는 발전이 없었다. 하지만 WCW가 빈스 루소중심 체제로 재편되면서 그는 뉴 블러드의 일원으로 가세하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뉴 블러드 각본이 흐지부지 사라진 이후, 그는 다시 MIA에서 써전트 에이월로 활약했던 그는 그 무렵 약물 남용으로 죽을 뻔 한 적도 있다고 한다.이후 WCW가 WWE에 매각된 이후, 그는 WWE가 그의 계약을 승계하면서 WWE 소속이 되었지만, 사생활 문제가 발단이 되어 WWE에서 방출되었다. 하지만 WWE는 그가 사생활 문제를 정리하고 돌아올 경우 그를 받아주겠다는 언질을 주었다고 한다. 그 후 메이져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못하던 제리 튜트는 제프 제럿 父子가 주축이 되어 만든 NWA-TNA에 진출해 잠시 활약하게 되었다. 더 월은 그 곳에서 맬리스라는 닉네임으로 활약하며 켄 샴락과 NWA-TNA 타이틀을 다투기도 했으나 패한 바 있다. 이후 맬리스는 한시적이었던 NWA-TNA 생활을 청산하고 명실공히 No.1 단체인 WWE에 진출을 추진하면서 몇 차례 다크 매치를 통해 기량을 타진받았지만, 맬리스는 WWE 무대에도 서보지 못하고, 다시 NWA-TNA로 돌아와 예전처럼 맬리스 기믹으로 잠시 활약하게 된다. 하지만 TNA 계약의 특성상 그는 TNA에서 전속으로 뛰는 대신, XPW등을 비롯한 인디 단체와 일본 등지를 오가며 활약했다. 그러다 2003년 3월 19일 NWA-TNA PPV에서 맬리스는 트리플 X (Triple X = Low Ki, Elix Skipper & Christopher Daniels) 와 브라이언 리& 슬래쉬 경기에 난입해 트리플 X를 공격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다. 그러다 그는 예전에 경험을 쌓은 적이 있었던 全日本 프로레슬링으로 돌아가 다시 기간테스라는 이름으로 뛰었다. 그는 또한 PCW 라는 단체에서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다 2003년 12월 5일, 그는 기간테스로 全日本 프로레슬링 쇼에 출전해 불 뷰캐넌, 저스틴 크레더블과 한 팀이 되어 아라야 노부타카, 혼마 도모아키, 미야모토 카즈시의 팀을 물리쳤는데, 바로 다음 날인 12월 6일 라 팔카, 노사와 등과 식사를 함께 한 후, 1시간쯤 뒤에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때가 그의 나이 고작 36세. 심장마비라는 死因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그는 아마도 약물 남용의 후유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데이빗 본 에릭이 1984년 2월 10일 사망한 이래 19년만에 全日本 프로레슬링 투어 도중 사망한 선수로 기록되었다.
유달리 많은 레슬러들이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한 2002년, 제리 튜트 또한 제대로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이승을 등지고 말았다. 한때 언더테이커나 케인 같은 빅 몬스터로 주목받았던 그 였기에 그의 죽음은 더욱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프로레슬러들이 무심코 행하는 약물 남용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사건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