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바빌로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Вави́лов Nikolai Ivanovich Vavilo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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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7년 11월 25일 |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 |
사망 | 1943년 1월 26일(향년 55세) |
소련 러시아 SFSR 사라토프 | |
국적 | 소련 |
학력 | 모스크바 농업대학 |
직업 | 생물학자, 농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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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식물학자로, 종자은행의 개념을 처음 창안한 사람이다.2. 생애
1887년에 상인 집안의 자녀로 태어났다. 1910년에 모스크바 농업대학을 졸업한 뒤에 러시아 제국 농무성의 응용식물분류국에 취직하였고, 1916년에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종자를 확보하기 위한 탐험에 나섰다.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은 뒤인 1920년에는 페트로그라드의 응용식물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당시 바빌로프는 전 세계의 수많은 품종을 모아 잘 정리해서 작물과 식물을 총망라한 보물 창고를 만들기를 원했고, 이를 통해 종자은행의 개념을 처음 고안하게 된다.1926년에 남유럽 각국으로 종자 확보를 위한 탐험에 나서면서, 작물의 종자를 확보하기 위한 기나긴 여정을 시작했다. 1927년에는 에티오피아 제국을 방문하고 당시 황제였던 자우디투 여제와 그녀의 아들인 황태자 하일레 셀라시에를 알현하였으며, 에티오피아 황실의 지원 하에 현지의 작물 종자를 확보하여 소련으로 보냈다. 1929년에는 한국[1]과 일본, 중국에서 종자를 수집하였고, 1930년대에는 미국을 포함한 아메리카 각국을 돌면서 종자들을 확보하였다. 이런 종자 확보를 위한 여행의 와중에 유전변이의 상동계열 원칙을 발표하고, 재배식물의 기원중심지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는 등, 농학자로서 상당한 업적을 남기면서, 영국의 왕립학회의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으며, 귀국 후에 세계 최초의 종자은행인 파블롭스크 실험국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종자 확보를 위한 탐험을 마치고 소련으로 귀국했다가, 그를 질시하던 유사과학자인 트로핌 리센코[2]의 모함을 받으면서 당시 독재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의심을 샀고, 결국 1940년에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 잔인한 심문을 400회 이상 받았고, 소련의 농업을 파탄내려 했다는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으나, 그럼에도 바빌로프는 결코 거짓된 자백을 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기근을 퇴치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던 선구적인 식물학자이자 식물유전학자였던 그는 55세가 되던 해인 1943년에 영양실조로 감옥에서 숨을 거뒀다. 허나, 종자은행 설립에 대한 그의 소망은 세계 최초의 종자 은행인 파블롭스크 실험국의 설립으로 실현되었고, 뒷날 세계 각국의 협력으로 노르웨이의 스발바르 제도에 세워진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를 통해 재차 빛을 보았다.
3. 업적
- 유전변이의 상동계열의 법칙 발견
- 식물, 특히 작물의 원산지를 추적하는 식물지리적 미분법 창안과 유전자중심설 발표
- 재배식물의 발상지 고안(중국, 인도·동남아, 중앙아시아, 중근동, 에티오피아,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 바빌로프 의태
4. 기타
그와 그의 동료들의 인간찬가적인 일화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 시리즈인 코스모스에서 그의 일생을 다룬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