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9:33:19

노명우(1915)

성명 노명우(盧命愚)
생몰 1915년 5월 6일 ~ 1973년 5월 20일
출생지 충청남도 부여군 관암면 합송리
사망지 충청남도 부여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노명우는 1915년 5월 6일 충청남도 부여군 관암면 합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0년 3월 고향에서 19명의 동지들과 더불어 강문인회(錦江文人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꾀했고, 1931년 봄 이호철· 유기섭·장창선(張昌善)·오기영(吳麒泳) 등과 함께 부여군 홍산면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고 항일운동을 펼 것을 목적으로 농민조합의 조직에 착수했지만 일본의 감시가 심해 중단했다.

이후 이들은 전영철(田泳哲)·강도형(姜道馨) 등의 동지를 규합하여 부여군 내의 마정리, 금송리, 조현리, 장하리, 중정리 등 각 부락에 야학을 개설하고 농민층 청소년들에게 한글과 산술 등의 초등교육을 실시했으며, 토론회를 개최하여 사회주의 사상과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힘썼다. 또한 노명우, 이호철, 유기섭, 오기영 등은 1931년 10월 사회주의 실천방법의 연구단체로서 비밀결사 공산주의연구협의회(共産主義硏究協議會)를 조직했다. 이들은 1933년 봄 동 협의회를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실천단체인 무산주의협의회(無産主義協議會)를 결성하여 부여군 내의 농민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는데 주력했다.

1933년 4월, 무산주의협의회는 기존의 홍산노동조합(鴻山勞動組合)을 적색노조로 개편함과 동시에 여러 차례에 걸쳐 비밀모임을 갖고 1933년 5월 부여농민구락부연합회(扶餘農民俱樂部聯合會)를 조직했다. 부여농민구락부연합회는 이호철, 오기영, 전영철, 유병철(柳秉哲), 유인철(柳寅喆), 최재봉(崔在鳳) 등을 각자가 거주하는 지역의 지부조직 책임자로 삼고 조직확대에 힘썼다. 이들은 또한 동년 7월 청년들을 규합하여 부여농민조합연합회(扶餘農民組合聯合會)의 지부로서 대야구락부(大也俱樂部)를 위장 조직하여 항일 농민운동에 힘썼다.

그러나 얼마 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노명우는 1935년 11월 2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출옥했다. 이후 부여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3년 5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노명우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4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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