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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삼 요한


<colbgcolor=#a52a2a><colcolor=#fff> 남종삼 세례자 요한
(南鍾三)
파일:성남종삼세자요한성화.jpg
성 남종삼 요한 성화
이름 남종삼 (南鍾三)
본관 의령 (宜寧)
출생 1817년
충청도 충주
사망 1866년 3월 7일 (50세)
서소문 밖 사형장에서 참수
종교 가톨릭 ( 세례명: 세례자 요한)
증조부 남규로(南奎老)
조부 남리우(南履佑)
부모 (양아버지) 남상교(南相敎) 아우구스티노[1]
(생부) 남탄교(南坦敎)
이조이 필로메나[2]
자녀 (장남) 남명희(南明熙)[3]
(차남) 남규희(南揆熙) 프란치스코 [4]
외 2녀 데레사, 막달레나 [5]
시복 1968년 10월 6일, ( 교황 바오로 6세)
시성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6]
축일 9월 20일

1. 개요2. 생애 및 활동사항3. 사후4. 시복. 시성5. 묘소6. 주보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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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후기 홍문관교리 · 영해현감 · 승지 등을 역임한 가톨릭 순교자.
한국 103위 순교성인'(韓國百三位殉敎聖人) 중 한명 이다.
한국 성인 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른 분이다

2. 생애 및 활동사항

세례명 요한.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증오(曾五), 호는 연파(煙波) 또는 중재(重齋). 남탄교(南坦敎)의 아들로 충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큰집인 남상교(南尙敎)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제천에 거주하며 남인계의 농학자로 충주 목사를 지낸 아버지 남상교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높은 학문을 성취한 남종삼은 22세 때인 1838년(헌종 4)에 과거에 급제해 일찍이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영해현감(寧海縣監) 등 지방 장관을 거쳐 철종 때에는 승지(承旨) 벼슬에 오르고 고종 초에는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하였으므로 자연 당시의 실권자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도 친교를 가졌다.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아버지 남상교의 영향이 컸는데, 입교 후에는 베르뇌(Berneux)[7], 다블뤼(Daveluy)[8] 주교 등과 교류하면서 교회 일에 관여했고, 1861년에 입국한 리델(Ridel) 신부에게 조선말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당시 부패한 많은 관리 중에서 돋보이는 청백리로, 의덕과 겸손의 가난한 생활을 통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질시의 대상이 되는 한편 향교 제사 문제로 신앙과 관직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 때 당당히 관직을 내놓았다. 남상교와 남종삼 부자의 묘재 정착은 평소 가까이 지내던 이들과의 교류가 계명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는 데 어려움을 초래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들 부자에게는 높은 벼슬, 명예와 권세, 안락한 생활 등 양반으로 누릴 수 있는 영화와 특권을 스스로 끊어 버린 일대 결단이었다.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즉위하던 1863년 말경, 흥선 대원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남종삼은 좌승지로 발탁되어 다시 임금 앞에서 경서를 논하게 되었다.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점차 미묘해져 가는 가운데 만주(滿洲)의 연해주(沿海州)를 차지한 러시아는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과 접하게 되었다. 그러자 점차 통상(通商)을 요구하며 자주 국경을 넘어오므로, 조정은 위기감에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에 실권자인 흥선대원군은 사태해결책을 강구하기에 부심하고 있었다.

이 때 남종삼은 홍봉주(洪鳳周)[9] · 이유일 · 김면호(金勉浩)[10] 등 교인들과 상의하여, 국내에서 전교 중인 베르뇌 · 다블뤼(Daveluy) 등 프랑스 선교사의 힘을 빌려, 영국 ·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침을 저지해야 한다는 방아책(防俄策)을 흥선대원군에게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남종삼은 이렇게 해서 러시아의 남침을 막는 동시에 쇄국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여 신앙의 자유도 구현케 하려는 의도였다.

흥선 대원군은 그의 방아책에 대한 건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부주교가 모두 황해도와 충청도에서 전교 여행을 떠난 뒤라 약속 시각 내에 찾아내지 못하자 흥선 대원군의 초조는 분노로 바뀌었다. 평안도에서 소식을 전해 들은 베르뇌 주교가 급히 서울로 올라왔으나, 그때는 이미 러시아인들이 물러간 후였다. 상황이 급변하자 흥선 대원군은 돌변하여 다시 쇄국정책을 강화하고 정권 유지의 방편으로 1866년 초 병인박해에 들어가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남종삼 승지는 일이 그르친 것을 깨닫고 묘재로 내려가 부친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부친 남상교는 그의 말을 듣고 “너는 천주교를 위해 충(忠)을 다하였으나 그로 말미암아 너의 신명(身命)을 잃게 되었으니 앞으로 악형을 당하더라도 성교(聖敎)를 욕되게 하는 언동을 삼가라." 하고 가르쳤다.

부친의 준엄한 가르침을 받은 남종삼은 순교를 각오하고 배론 신학당을 찾아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한양으로 향했다. 이미 한양으로부터 체포령이 떨어져 있던 그는 결국 한양까지 가지 못하고 3월 1일 경기도 고양(高陽)땅 잔버들이란 마을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갔다.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을 때에는 이유일(李惟一)에게 천주교를 배웠다고 진술하였다. 배교를 강요당하며 심한 고문과 곤장을 맞으면서도 신앙을 지킨 남종삼은 참수형이 결정되어 홍봉주, 이선이, 최형, 정의배, 전장운 등 수많은 신자들과 그리고 베르뇌, 다블뤼 주교와 함께 병인년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로 끌려가 참수되었다.

3. 사후

남종삼의 순교한 후 그의 가족도 모두 체포되어 부친 남상교는 공주 진영으로, 장자 남명희는 전주 진영으로 끌려가 순교하고, 부인 이조이 또한 유배지인 창녕에서 치명하고, 함께 경상도 지역 유배지로 간 막내아들 (당시 4살) 남규희와 두 딸 데레사와 막달레나는 삶을 부지할 수 있었으나, 노비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런 그들을 마저 죽이라는 논조의 요구가 30년간 288회 이어졌다면 보통일이 아닐 것이다. 그 논조는 특정세력에 의해 지속되었으며, 필두는 정조(正祖) 때의 홍국영(洪國榮)을 시작으로 이어진 계통의 사람들에 대한 계속된 정치 탄압이었다
결국 이렇게 3대에 걸쳐 4명이 순교하고, 나머지 가족 또한 살아있는 동안 유배지에서 고초를 겪었다.

4. 시복. 시성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집전한 24위 시복식(諡福式)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다.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시성식(示性式)을 통해 103위 성인 품에 올랐다.

5. 묘소

남종삼의 시신은 참수된 후 박순집[11]에 의해 용산 왜고개에 매장되었다.
이후 1909년 명동성당에 안치되었다가 시복을 계기로 1967년 10월 다시 절두산 순교 성지 성해실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이때 성인의 손자 남상철이 성인의 유해 일부를 가족 묘역으로 조성하엿다.
위치: 경기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 20-2 의령남씨 가족묘소 (천주교 길음동 교회 묘원)

이곳에는 성인과 함께 순교한 부친 남상교(아우구스티노)와 부인 이조이(필로메나)의 묘와, 창녕으로 유배 갔던 막내 아들 남규희의 묘가 있다. 전주 초록바위에서 순교한 장자 남명희의 묘는 없다.

2004년 12월 30일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아 순례의 발길이 뜸했던 성 남종삼 요한과 가족 묘소를 성역화하기 위해 묘소 안내 표지석 4개를 설치했다.
길음동 본당과 종친회의 협조를 얻어 “천주교 순교 성인 승지 남종삼 요한 묘”라고 새겨진 와비를 성인 묘역까지 올라가는 길에 설치했다.

성 남종삼 요한과 가족 묘소가 속한 의정부교구에서는 남종삼 성인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고 본받기 위해 의정부 주교좌성당에서 출발해서 사패산을 넘어 남종삼 성인 묘와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의 묘까지 순례하는 ‘순교자의 길’을 개발하여 실시했다.

본당 관할구역 내에 묘소가 있는 송추 성당은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황사영 묘와 성 남종삼 묘 도보 순례 후 성 남종삼 가족 묘소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의정부교구는 2018년 8월 24일자 공문을 통해 송추 성당을 남종삼 요한 성인과 가족 순교자 묘소와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순례지로 지정했으며, 같은 해 9월 20일 기존의 복자 표기 남종삼 성인 묘비 옆에 성인 묘비를 새로 세우고 제막식을 거행했다.

6. 주보성인

남종삼 요한을 주보성인(主保聖人)으로 모시는 성당

[1] 남종삼의 순교 이후 가족들의 수난도 시작되었는데 재산이 전부 몰수되고 80세가 넘은 부친 남상교와 14세의 장남 남명희(南明熙)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 조부와 손자를 한 감옥에 두지 않는 국법에 따라 남상교는 공주감영에 수감 중 순교하였다. [2] 남종삼 요한 성인의 부인이자 가톨릭 순교자이다. 충남 예산 출신으로, 남종삼의 처형 이후 두 딸들과 함께 노비가 되어 종살이를 했다가 결국 유배지인 창영에서 순교했다. 남종삼 요한 성인과 함께 순교한 부친 남상교(아우구스티노)와 함께 묘가 의정부교구에 있다. [3] 남종삼의 순교 이후 할아버지와 손자를 한 감옥에 두지 않는 국법에 따라 전주감영에 투옥된 남명희는 전라감사가 끝까지 배교를 권유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자 전주천변 초록바위 아래로 떠밀려 순교하였다. [4] 남종삼의 순교때 4살에 불과했으며, 그 어린 나이에 유배되었던 차남 남규희가 후에 후손을 두면서 가문을 이을 수 있었음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5] 남종삼의 처형 이후 처와 딸들은 경상도 유배 후 노비형에 처해져 종살이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6]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 시성. [7] 시메옹프랑수아 베르뇌(Siméon-François Berneux, 1814년 5월 14일 ~ 1866년 3월 7일)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프랑스인 선교사로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한국 이름은 장경일(張敬一) [8] 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프랑스어: Marie-Nicolas-Antoine Daveluy, 1818년 12월 31일 프랑스 아미앵 ~ 1866년 12월 30일, 충청남도 보령)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이며 천주교 조선교구의 제5대 교구장이다. 조선에 입국하고 21년 동안을 복음을 전파하며 여생을 보냈다. 한국명은 안돈이(한국어: 安敦伊)이다. 시메옹프랑수아 베르뇌와 함께 병인박해가 있을 때 순교하였으며, 1984년에 한국의 103위 순교자의 일원으로 시성되었다. [9] 세례명 토마스. 충청남도 예산 출신.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 홍낙민(洪樂民)의 손자이며, 기해박해 때 순교한 홍재영(洪梓榮)의 아들이다. 병인박해에 순교 [10] 세례명 토마스, 면호(冕浩), 계호, 1820년(순조 20) 출생, 병인박해에 순교 [11] 박순집 베드로: (1830~1911) ‘죽음을 당하지 않은 순교자’, ‘시복되지 않은 복자’, ‘신앙의 증거자’, ‘순교자 행적 증언자’, ‘성웅(聖雄)’등 여러 칭호가 따라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