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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문일(文一) / 동천(東泉) |
본관 | 의령 남씨[2] |
출생 | 1876년 4월 12일 |
경기도
광주유수부 낙생면 하산운리 (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산운동)[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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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08년 11월 4일 (향년 32세) |
서대문형무소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178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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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구한말의 의병장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남상목은 1876년 4월 12일 경기도 광주유수부 낙생면 하산운리(현 성남시 분당구 하산운동)에서 아버지 남진희(南晉熙, 1839 ~ ?. 12. 11)[4]와 어머니 전주 이씨(? ~ ?. 4. 16) 이승진(李陞鎭)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고향 인근에 있던 낙생면 판교리(현 분당구 판교동)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그는 어려서부터 힘이 셌다고 한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에는 일본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조선을 상대로 수탈을 했는데 남상목이 살던 낙생면에서는 인근의 언주면과 돌마면 등에 있던 나무를 모두 베어 주민들에게 운반하게 시켜놓고는 보상금을 한푼도 주지 않은 일이 있었다. 이 일을 보고 남상목은 일본인 감독관이던 나카이(中井)를 두들겨 팼다. 이 사건으로 헌병대에 체포되어 곤욕을 치렀지만, 반일정신과 민족의식을 쌓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돼 외교권이 강탈당하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남상목은 충청북도 제천군에서 활동하던 이강년의 부대에 들어가 일본군과 싸웠다. 1908년 8월에는 용인~충주에서 활동하던 50명의 의병을 이끄는 의병장이 되었다. 의병들은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패했으나 일본군에도 꽤 피해를 입히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1908년 11월 경기도 광주군에서 가족을 만나러 가다 잠복해있던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고,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가 고문을 받다 장 파열로 인해 11월 4일 옥사 순국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청계산 아래 후천골에 임시로 묻혔다가 8.15 광복 후 고향인 성남시 분당구 하산운동의 뒷내골 선산에 안장되었다. 그 뒤 분당신도시가 개발되고 인근에 도로가 건설되자 1990년 7월 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어 지금에 이른다.
3. 참고 자료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248~24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