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족보명 | 남용성(南容聖) |
자 | 화중(和仲) |
본관 | 영양 남씨[1] |
출생 | 1908년 3월 6일 |
강원도 울진군 상군면 정림리 (현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정림리)[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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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5년 1월 11일[3] |
경상북도
대구부
삼립정 대구형무소 (현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2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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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188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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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남지학은 그의 7촌 조카, 즉 재종질(再從姪)이다.2. 생애
남복이는 1908년 3월 6일 강원도 울진군 상군면 정림리(현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정림리)에서 아버지 남상백(南相百)과 어머니 울진 장씨 장경익(張景翼)의 딸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이후 큰아버지 남상일(南相一)에 입양되었다. #그는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39년 10월 1일 남원수, 노하순, 주영석, 남정성, 전원강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뜻을 모으고 1939년 10월 28일 자신의 집에서 회합해 창유계(暢幽稧)를 조직했다. 창유계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계형태를 가장하여 소규모 조직으로 운영되었으며, 일제의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 반드시 일제가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을 예상하고 이를 이용해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다.
남복이는 창유계를 조직한 후 다섯 차례에 걸쳐 회합을 가지면서 조직의 강화와 반일선전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1943년 3월 일제에 발각되어 조직이 와해되었고, 그는 경찰에 체포된 뒤 대구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징역 5년을 선고받은 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1월 11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남복이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90년 7월 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