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17:05:19

나이젤(엘리 주교)

성명 나이젤
Nigel
생몰년도 1100년경 ~ 1169년 5월 30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엘리
아버지 험프리
직위 엘리 주교, 대재무장관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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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 성직자, 정치인. 엘리 주교이자 대재무장관으로서 헨리 1세, 스티븐 왕, 마틸다, 헨리 2세 치세에 활약했다.

2. 생애

옥스퍼드 전기 사전에 따르면, 1100년경에 출생했다고 한다. 반면, <국민인명사전>(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은 1100년 이후에 출생했다고 기술했다. 아버지 험프리는 이름만 언급될 뿐 별다른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아마도 아들이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 일찍 죽었을 것이다. 삼촌 로저는 솔즈베리 주교이자 헨리 1세의 대법원장으로서 통치 체계 간소화, 재정 및 행정 개혁, 체스판 상공회의소 설립을 이끌어낸 저명한 정치인이었으며, 사촌 알렉산더는 링컨 주교였다.

그는 일찍이 삼촌 로저에 의해 프랑스 왕국의 랑 시에 있는 수도원응로 보내졌고, 그곳의 수도자인 안셀무스로부터 교육받았다. 그가 언제 성직자로서 서원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런던 교구의 대성당에서 사제를 맡은 뒤 솔즈베리 교규의 대집사직을 역임했다는 사실은 전해진다. 1115년 웨스트민스터에서 베르나르를 초대 세인트 데이비드 주교로 선임하는 행사에 참석했으며, 1120년까지 왕실 사제로 봉사했고 여러 왕실 헌장에서 증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헌장에서는 그를 “nepos epicopi”(“주교의 조카”)라고 지칭했다.

그 후 노르망디 공국 재무부의 수취인 또는 감시원 겸 관리자로 활동하던 나이젤은 1130년경 헨리 1세에 의해 재무관에 선임되면서 노르망디 공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재정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아 영국해협을 주기적으로 왕래했다. 1133년 삼촌 로저에 의해 1131년 이후로 주교가 없던 엘리에 주교로 선임되었다. 1133년 10월 1일, 나이젤은 램베스에서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엄 드 코르베일에 의해 봉헌되었다. 그는 1136년까지 재무관직을 유지하다가 친척인 아델렘에게 넘겨줬다.

그는 헨리 1세의 통치 마지막 10년 동안 헌장에 대한 증인으로 31번이나 언급될 정도로 궁정에서 쭉 지냈고, 엘리 교구엔 기혼 성직자인 솔즈베리의 라눌프를 보내 자기 대신 관리하도록 했다. 라눌프는 현지 수도자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추진해 반감을 샀지만, 나이젤은 수도자들을 학대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전혀 내리지 않고 라눌프가 알아서 하도록 방치했다. 1135년 12월 헨리 1세가 사망한 뒤 스티븐 왕이 등극했을 때 충성을 서약했다. 그 후 그는 라눌프가 노르만족을 학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했다. 음모의 정확한 내용은 불명확한데, 중세 연대기 작가 오데릭 비탈리스는 정부 내의 모든 노르만족을 죽이고 나라를 스코틀랜드 왕국에 넘길 계획을 꾸몄다고 주장했지만 신빙성은 부족하다.

라눌프는 음모를 꾸민 혐의로 잉글랜드에서 추방되었고, 나이젤은 엘리 수도자들과 화해했으며, 수도자들이 토지에서 세금을 거둬들이고 통행료를 부과하며, 도난을 다루는 법원을 열 권리를 보장했으며, 라눌프가 수도자들에게서 빼앗은 땅 일부를 돌려줬다. 그러나 <엘리 수도자들의 연대기>(Liber Eliensis)는 나이젤의 교구 행정은 부실했고 교회의 몫인 토지 중 질이 아주 좋은 것을 자신에게 남겨뒀으며, 수도자들을 억압하고 약탈했다고 비난했다.

나이젤은 스티븐 왕의 치세에서도 재무관으로서 활동했으며, 삼촌 로저, 사촌 알렉산더와 함께 옥스퍼드 회의에 참석하여 왕이 성직자들에게 정식 선거의 자유를 약속하고 남작들에게는 왕실의 숲과 사냥에 관한 법률을 완화할 것을 약속하며, 다네겔트[1]를 폐지하는 등의 내용이 담긴 새로운 헌장을 발표했다.

1138년부터 무정부시대가 발발했을 때, 그는 친척과 다른 귀족들처럼 왕의 동의 없이 자기가 맡은 영지에 성을 짓기 시작했다. 이에 스티븐 왕은 그가 딴 마음을 품고 있을 거라 의심했고, 고문인 갈레랑 4세 드 묄룬의 권고를 받아들여 그와 로저, 알렉산더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139년 6월 245일, 솔즈베리 주교 로저, 링컨 주교 알렉산더 등이 전격 체포되었다. 오직 나이젤 만이 데바이즈 성으로 도주한 뒤 왕실군에 저항했다. 그러나 왕실군의 맹공으로 요새 함락이 임박하자, 그는 세 추종자와 함께 탈출한 뒤 마틸다 편에 선 글로스터의 로버트에게 귀순했다.

솔즈베리 주교 로저와 그의 친척들을 체포한 일은 성직자들 사이에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스티븐 왕의 동생인 윈체스터 주교 앙리 드 블루아조차도 스티븐 왕에게 "잘못을 바로잡고 주교들을 그들의 소유로 돌려보내라"고 촉구했지만 묵살당했다. 그 후 스티븐 왕의 추종자들은 윈체스터 의회에서 솔즈베리의 로저와 친척들이 왕을 배반하고 성을 건축하려 했다고 고발했다. 교회 대표자들은 피고인 주교들이 교회 법원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호소했고, 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압류된 재산을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티븐 왕은 그럴 의사가 있다고 밝혔지만 실제로 이행하지 않았고, 로저는 앙리 드 블루아의 설득을 받아들인 스티븐 왕에 의해 석방된 지 얼마 안 된 1139년 12월 11일에 사망했다.

1140년, 나이젤은 엘리 주교직에서 해임되었다. 이에 나이젤은 교황 인노첸시오 2세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해 10월 5일, 인노첸시오 2세는 켄터베리 대주교 테오발드에게 나이젤을 복위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스티븐 왕은 이에 불응했다. 그러던 1141년 2월 2일, 스티븐 왕이 링컨 전투에서 패배하고 마틸다군에 생포되었다. 나이젤은 마틸다와 함께 글로스터에서 윈체스터로 이동했고, 1141년 3월 3일에 도착했다. 그 해 5월엔 마틸다와 함께 레딩을 방문했고, 1141년 6월에는 웨스트민스터를 방문해 마틸다의 잉글랜드 여왕 대관식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해 6월 28일 런던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마틸다와 함께 옥스퍼드로 피신했다. 1141년 9월 윈체스터 전투에서 마틸다군이 참패하고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생포되자, 양측은 스티븐 왕과 로버트를 교환하기로 합의했다.

1142년 초, 나이젤은 마틸다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를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스티븐 왕과 화해한 뒤 엘리 교구로 돌아갔다. 그는 한동안 감독단의 임무를 조용히 처리했지만, 곧 새로운 갈등에 휘말렸다. 1143년 3월, 나이젤은 런던 의회에서 성직자비탈리스를 비난했고, 비탈리스는 이에 항소했다. 비탈리스는 나이젤이 전쟁을 선동하고 교회 재산을 낭비했다고 비난한 스티븐 왕의 형제인 앙리 드 블루아의 지원을 받았다. 나이젤은 보호를 위해 다시 한 번 교황에게 의지하기로 하고 로마로 떠났다. 그는 로마에서 새 교황 루치오 2세와 접견해 자신의 편에 서도록 설득했다. 1144년 5월, 루치오 2세는 나이젤에 대한 비난을 거부하고 그를 엘리의 감독관으로 확인하는 여러 서한을 보냈다.

이렇게 나이젤이 없는 동안, 틸다의 지지자인 제프리 드 맨더빌이 엘리를 점령한 뒤 이웃 땅을 습격하는 전진 기지로 활용했다. 그러다가 1144년 9월에 제프리가 사망하자, 스티븐이 도로 엘리를 확보한 뒤 나이젤이 제프리의 반란을 묵인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교황청의 중재로 스티븐 왕과 나이젤은 입스위치에서 만나 화해했다. 나이젤은 200파운드를 지불하고 서자 리처드를 인질로 보내기로 했고, 스티븐 왕은 엘리 주교 및 감독관 직위를 나이젤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엘리 수도자들은 나이젤이 로마로 행차하고 입스위치에서 왕과 접견하기 위해 엘리 교구를 강탈했다고 비난했지만 무시당했다.

1147년 스티븐 왕의 헌장에 증인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1153년 또는 1154년에 케임브리지에 있는 세인트 라데군드 수도원에 대한 토지 기증 증인으로 지명되었다. 또한 1147년 8월 치체스터 주교로 힐러리가 선임되는 걸 지원했으며, 1150년 노퍽과 서퍽의 지방 법원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에 그가 재무 업무에 관여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그가 공의회나 다른 유사한 행사를 위해서만 궁정에 출입했음을 시사한다. 1153년 11월 스티븐 왕이 후계자로 마틸다의 아들인 헨리 플랜태저넷을 지명한 월링포드 협약의 증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1154년 10월 25일 스티븐 왕이 사망한 뒤, 나이젤은 헨리 2세의 대관식에 참여했다. 이후 헨리 2세에 의해 대재무장관으로 선임되어 헨리 1세 치세 때의 행정 체계를 회복하고 싶어하는 왕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던 1156년 2월, 교황 하드리아노 4세가 서신을 보냈는데, 거기엔 3개월 이내에 엘리 교구를 반환하지 않거나 지난 몇년간 교회 소유였던 재산을 돌려주지 않으면 나이젤을 직위해서 해임하겠다고 위협하는 내용이 있었다. 나이젤은 당시 잉글랜드에 헨리 2세가 없다는 이유로 시간을 끌다가 1159년 캔터베리 대주교 테오발드 앞에서 교회 재산을 돌려주겠다고 맹세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이후에도 수도자들과 갈등을 여러 차례 빚었는데, 특히 신임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은 그가 기혼자라고 비난했다.

이렇듯 비방이 끊이지 않았지만, 나이젤은 헨리 2세의 신임을 받으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1162년 6월 3일 토머스 베켓의 봉헌식과 1164년 1월 클라렌던에서 열린 대의회에 참석했으며, 재무장관으로서 오랜 내전으로 황폐해진 잉글랜드 재정을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1165년에는 대재판관에 선임되어 헨리 2세는 대신해 잉글랜드 왕국을 일시적으로 관리할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다가 1166년 부활절에 마비 증세에 걸려서 정계를 은퇴했고, 엘리에서 3년간 지내다가 1169년 5월 30일에 사망한 뒤 엘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사후 사생아인 리처드가 그를 대신해 재무관에 선임되었는데, 세간에서는 나이젤이 툴루즈 원정을 벌이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헨리 2세에게 400파운드를 지불하는 대가로 자기 아들이 재무관이 되도록 약속받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나이젤을 주교가 아닌 행정가로 보았다. 20세기 베네딕토회 수도자이자 역사가 데이비드 놀스는 나이젤이 모든 에너지와 능력을 순전히 세속적인 문제에 바쳤는데, 특히 재정 및 행정 부문에서 대단한 역량을 발휘했다고 밝혔다. 또다른 역사가 워런은 스티븐 왕이 솔즈베리의 로저와 엘리의 나지엘을 해임한 건 재무부의 전문 지식이 그들에게 있던 것을 고려했을 때 큰 실책이었다고 평했다. 이렇듯 나이젤은 행정적 재능에서 무척 탁월했다는 평을 받았지만, 성직자로서는 사제에게 어울리는 거룩하고 소박한 삶의 방식을 무시하고 전쟁과 허영심에 완전히 헌신했으며 수도자들을 억압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1] Danegeld. 9세기 중반부터 바이킹의 위협을 받은 잉글랜드 주민들이 이들을 격퇴하거나 공물을 바치기 위해 나라에 바치는 세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