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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봉(1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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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희봉(창녕 독립운동가).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찬문(贊文) / 간취(澗翠)
본관 서흥 김씨[1]
출생 1874년[2] 11월 25일
경상도 창녕현 월미면 계팔동
(現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계상리 계팔마을[3] 637번지)
사망 1928년 1월 7일[4] (향년 53세)
묘소 경상남도 창녕군 성산면 가복리 덕곡마을
상훈 대통령표창 추서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999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조선 전기의 문신 김굉필의 15대손이다.[5] 김부영 전 창녕군수는 종증손자이다.[6]

2. 생애

1874년 11월 25일 경상도 창녕현 월미면 계팔동(현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계상리 계팔마을 637번지)에서 아버지 김원동(金元東, 1853 ~ 1886. 6. 29.)[7]과 어머니 광주 노씨(1849 ~ 1886. 5. 27.)[8] 사이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그는 영남 지방 유림 중 한 사람으로서 경상도 유림들로부터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의 서명을 받아 내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런데 1919년 음력 3월 18일경 일본 제국 육군 헌병에 발각되면서, 그는 고암면 원촌리 출신의 유학자인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과 함께 경상북도 대구부 헌병사령부에 연행, 구금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해 5월 1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 불기소처분을 언도받고 출옥했다. # #

그후 그는 3.1 운동 1주기를 즈음하여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1920년 2월 창녕면 장날에 「통곡아팔역 동포 오주열강(慟哭我八域 同胞 五州列强)」이라는 선언문을 작성, 낭독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다시금 고초를 겪었다.

이후 옥고의 여독으로 고통받다가 1928년 1월 7일 죽었다.

199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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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남중파(嶺南仲派) 25세 희○(熙○) 항렬. [2] 서흥김씨대동보 권3 795쪽에는 1875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3] 서흥 김씨 집성촌이다. [4] 음력 1927년 12월 15일. [5] 김굉필의 차남 김언상(金彦庠, 1480 ~ 1540)의 14대손이다. [6] 남동생 김희달(金熙達, 1882. 2. 21. ~ 1967. 1. 7.)의 손자이다. [7] 자는 형언(亨彦). [8] 노학문(盧鶴文)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