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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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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7호
죽도왜성
[ruby(竹, ruby=チュク)][ruby(島, ruby=ド)][ruby(倭城, ruby=わじょう)] | Jukdo Japanese Fortress
파일:144540465986_20151022.jpg
<colbgcolor=#BE0529> 국가유산
명칭
김해 죽도왜성(金海竹島倭城)
이칭 김해왜성(金海倭城)
죽림왜성(竹林倭城)
죽도성(竹島城)
가락성(駕洛城)
형태 왜성
건설 1593년 (선조 26년)
나베시마 나오시게 등 2인
폐성 1598년 (선조 31년)
소재지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 836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면적 미상
지정연도 1999년 3월 9일
건축시기 조선시대
링크 공식 홈페이지
1. 개요2. 역사3. 위치 및 구조
3.1. 농소리왜성3.2. 마사리왜성
4. 과거 모습 및 현황5. 교통6. 외부 링크7.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7호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1593년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 일대의 죽도(竹島) 위에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그 아들 나베시마 가쓰시게(鍋島勝茂) 등 왜장 2명이 쌓은 연곽식 산성.

2. 역사

그리고 경상좌도의 적세는 서생포 · 임랑포 · 두모포 · 기장 동래 지방의 성황당 수영 · 부산포 양산 지방의 구법곡 등지에 전처럼 진을 치고 웅거하여 적선이 수시로 오가고 있으며, 경상우도는 김해 · 죽도(竹島) · 덕교(德橋) · 웅천 · 웅포(熊浦) · 안골포 · 제포(薺浦) · 천성(天城) · 가덕 · 거제 등지에 역시 전처럼 웅거하여 적선이 항상 드나든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4년 3월 10일자 기사
거기서 며칠을 머물면서 그들을 따라 거제 등 여러 곳의 영루(營壘)를 두루 살펴보았는데 거제의 적은 대략 5∼6천 명이고 웅천은 약 4∼5천 명이고, 김해·용당(龍堂)·죽도(竹島)의 적들이 거제에 비해 더 많은 것 같으니 통틀어 4∼5만 명은 될 것이다. 적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있었고, 바닷가의 조선 거민들은 고기를 잡아 팔거나 혹은 농사를 짓고 있었다. 적들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군량이 얼마나 되는지는 내가 확실히 모르지만 그들이 먹는 것은 거의가 한 끼에 작은 종지 하나의 홍대미(紅大米) 밥이었는데 피도(皮稻)가 절반이었다. 일은 고달프고 배는 고파 나와서 항복하려는 자가 매우 많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살펴보면 그들도 양향(糧餉)이 넉넉지는 않은 것 같았다.
조선왕조실록』, 1594년 4월 17일 기사
병사가 '이러한 때에는 오직 일본이 말을 겸손히 하고 몸을 굽혀 공손한 태도를 어느 정도 극진히 하느냐에 일의 귀추가 달려 있을 뿐이다. 그대들 중에 상장(上將)이 누구인가?'하니, 왜사가 '직급으로 말하면 죽도에 있는 장수가 상좌이나 태합이 병권을 행장(行長)에게 전적으로 위임했기 때문에 모든 군무(軍務)는 행장이 주관한다.' 하기에, 병사가 '그렇다면 무수(茂守)[1] · 직무(直茂) · 선소(仙蘇) · 죽계(竹溪) [2]등이 무엇 때문에 나와서 우리를 보려고 하는가?’ 하니, 왜사가 웃으며 ‘우리가 이렇게 왕래하는 것은 반드시 기명(記名)하는 일이 있어서이다. 지금 이런 큰일에 만일 참여하여 듣게 된다면 어찌 녹공(錄功)되는 일이 없겠는 가. 이렇기 때문에 제공(諸公)들이 모두 와서 참석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고 (...)
조선왕조실록』, 1594년 4월 17일 기사
답서를 김해에 있는 장왜에게 주었더니 장왜는 그 답서를 보고 나서 죽도로 인솔해 갔고, 다음날 배를 타고 웅포에 있는 평행장의 진중에 이르러 답서를 전하고 다시 평의지(平義智)의 진중에 이르렀는데, (...)
조선왕조실록』, 1594년 11월 18일 기사
정월 12일에 일찌감치 진 유격을 따라 유천(楡川)에서 출발하여 밀양을 지나 김해에 정박하였는데, 죽도의 진영에 있는 소장(小將)이 배 위에 와서 보고 식사를 청하여 그대로 그곳에서 잤습니다. 그 진영의 기지는 넓이가 평양 정도나 되었는데, 3면이 강에 임해 있으며 목성(木城)으로 둘러쌓고 토성(土城)으로 거듭 쌓은 다음 안에는 석성(石城)을 쌓았으며, 높고 웅장한 누각은 현란할 정도로 화려하고 크고 작은 토우(土宇)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한 조각 공지도 없는 것 같았으며, 규모가 만여 명의 군사를 수용할 만하였습니다. 크고 작은 선박들은 성 밑에 줄지어 매어 있었는데, 그 수를 기억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2월 10일 기사
이달 7일 유격(遊擊)이 이 중군(李中軍)을 차견하여 통역관 진지남(秦智男)을 데리고 진영을 철수한 김해·덕교 등 지역을 가서 조사케 하였는데, 목책과 망루는 이미 모두 철거했고, 방옥(房屋)은 아직 반쯤 남았으나 또한 모두 벽을 철거하여 반드시 철수할 뜻을 보였으며, 그 진영의 왜장은 이미 죽도로 옮겼고 다만 소장(小將) 및 군사 몇 명만 남아 있으므로 ‘왜 진작 돌아가지 않았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배가 한꺼번에 이르지 않아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5, 6일을 기다리면 모두 도착할 것이다.’고 했다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7월 17일 기사
김해의 3영 중 덕교에 있는 직정(直政)의 진영은 또한 모두 불태웠으나 김해부중(金海府中)의 진영과 죽도의 진영은 철거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7월 24일 기사
그러나 일본 사람의 마음은 변덕스러워 믿을 수가 없으며, 전후 신절(信節)을 변개하고 있으므로 비록 책봉사(冊封使)가 황명으로 임하여도 오히려 그 요령을 알 수가 없습니다. 기장 · 죽도(竹島) · 안골 지방의 왜적이 여전히 결진하고 있어 바다를 건널 시기를 듣지 못하였는데, 또다시 우리 나라에 무엇을 요구할 것이 있기에 하나의 사신으로 경중을 삼는단 말입니까.
조선왕조실록』, 1596년 1월 14일 기사
상이 이르기를, "죽도의 적이 매우 성하고 안골 · 가덕(加德) · 부산 등에도 영진(營陣)이 있다 하는데, 그러한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죽도의 적이 가장 많습니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596년 6월 20일 기사
'왜서(倭書) 한 장을 얻어 보았는데 그 내용에는 「고려수번장(高麗戍番將)으로 부산포 소서진주수(小西津州守), 서생포 하산주계수(賀散主計守), 죽도(竹島)는 갈도가하수(鍻嶋加賀守), 가덕도는 진병고(津兵庫), 안골포는 일번(一番)에 삼이기(森伊紀), 이번(二番)에 흑전갑비수(黑田甲非守)이다. 」는 등의 글자가 있었으므로, 원서(原書)를 가지고 귀국하여 바친다.' 하였고 (...)
조선왕조실록』, 1596년 12월 29일 기사
적장 행장 정성(正成)이 이미 책사(冊使)가 돌아올 적에 함께 바다를 건너와서 동래 부산의 옛 진영에 둔거(屯據)하였고,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또 1월 14일에 병선(兵船) 2백여 척을 거느리고 와서 기장의 옛 보루에 주둔하였고, 풍무수(豊茂守)가 또 병선 60여 척을 거느리고 와서 죽도의 옛 보루에 주둔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4월 15일 기사

임진왜란 발발 1년째인 1593년에, 일본군의 공세가 점점 난항을 겪자 수세로 전환하여 후방에 쌓기 시작한 왜성 중 하나이다. 왜장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그 아들 가쓰시게가 주도해 김해의 죽도에 쌓은 성으로, 당시 부산포왜성, 서생포왜성, 웅천왜성 등과 함께 중심이 되는 거점 중 하나였으며 경상좌도 후방의 일본군 진영들이 서로 연결하게 보조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때문인지 일본과의 화의 분위기가 한창이라 일본군이 대거 본국으로 철수하던 1595년에도 기장왜성, 부산포왜성, 안골포왜성 등지와 함께 끝까지 철군하지 않은 성이었는데, 조선 측에서 언제쯤 철수하냐고 독촉에 독촉을 거듭해도 병력을 물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정유재란이 터지자 다시금 중심 거점이 되어 공세를 이어가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일본군이 완전히 철수하면서 폐성된다. 이후 이곳은 다시 군사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지는 않았고, 대동여지도도 그저 고산성(古山城)으로 표기하고 있을 뿐이다. 일제강점기에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51호 죽도성(竹島城)으로 지정되었지만, 일제지정문화재를 재평가해 등급을 조정하면서 1997년 1월 1일 사적 지정이 해제되었으며 1999년 3월 9일 부산광역시의 기념물 제47호 김해죽도왜성으로 지정되었다. 2006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발굴 조사를 실시했고 2014년 9월 3일에는 띄어쓰기를 적용하여 김해 죽도왜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지금에 이른다.

3. 위치 및 구조

파일:그림133142.png
죽도왜성 위치관계도[3]
파일:스크린샷 2025-01-07 101950.png
죽도왜성 항공사진 (1982)
죽도는 지금은 낙동강에 의한 퇴적 작용이 활발하게 일어나 육지와 연결되어 옛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지만, 임진왜란 당시까지만 해도 김해만 한가운데에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었다. 그 지리적 특성상 조선의 입장에서는 딱히 군사적 요충이라 하기 힘들었으나 부산포에서부터 진격해 북상하던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요해지(要害地)였다. 동래왜성, 구포왜성을 거쳐 김해, 양산, 나아가서는 낙동강을 타고 올라가 밀양 방면으로 진격할 수 있는 중요한 갈림길에 있었고, 바다를 통해 남측의 가덕도와 안골포, 웅포, 거제도 등과도 연락할 수 있는 최적의 입지였다. 1593년 처음 성을 쌓을 때는 왜성의 최전방 라인에 끼어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고, 정유재란 때 이곳에서 더 나아간 지점에 양산왜성과 마사왜성을 쌓아 최전방을 전진시킨 뒤로는 그 후방에서 사방의 거점을 연결, 지원해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죽도는 전체적으로 ㄱ자 모양의 지형에 해발 47.5mdml 오봉산(五峰山)이라 부르는 구릉지가 솟아 있는 형상인데, 그 구릉지의 정상부를 동서로 길게 삭평하며 차례차례 부곽을 만드는 연곽식 형태를 띠고 있다. 동측의 좀 더 높은 지대에 주곽부가, 서측의 약간 낮은 지대[4]에 외곽부를 배치한 것으로 추정한다. 김해 평야[5]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으며, 배를 정박시킬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성곽의 둘레는 약 1,200m에 이른다. 중심부는 낙동강변의 독립 야산을 이용해 산꼭대기를 3단으로 깎아 동서 460m, 남북 100m의 이시가키를 이중으로 쌓았다. 석축은 대체로 화강암과 잡석을 이용해 5 ~ 8m의 높이로 쌓았고, 상부의 너비는 280㎝ 정도이다. 석축에 굴곡을 주어 전투에 유리하도록 했으며 제1곽의 동쪽으로 마스가타 고구치(枡形虎口)와 천수 기단으로 추정되는 약간 높은 대지가 형성되어 있다.

주곽부의 동측으로는 부곽(副郭)을 덧붙였고, 중심부의 서북쪽 끝에는 망루 기단(櫓台)이 배치했으며 망루와 맞붙어 높은 대지를 만들었다. 이곳의 서측으로 2개의 부곽을 이었는데, 그 양측의 하단에도 외곽을 둘러 부곽을 덧붙였다. 중심부의 서측으로 두 번째 부곽에는 외곽으로 통하는 출입구가 있으며, 각 부곽으로 통하는 출입구에는 직경 1 ~ 1.5m 크기의 대형 석재도 남아있다. 남측과 북측의 외곽은 대체로 등고선과 나란히 축조했고, 모두 계단 모양의 지형을 이루다가 바깥쪽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중심부의 동쪽 부곽 가장자리에는 망루 기단 두 곳 있고, 밖으로는 강변의 선창까지 연결되었던 것으로 추정하며 서측의 외곽으로도 지형상 물이 채워진 해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심부의 서측 끝단에도 망루 기단이 남아 있는데, 망루의 바깥쪽으로는 폭 5m 정도의 능선절단형 해자(堀切り)을 남북으로 내어 외곽부와의 연결을 차단시켰다. 또한 곳곳에서 목책을 박았던 주혈(株穴) 흔적이 발굴되어, 조선왕조실록이 기록하는 대로 목성(木城)과 토루, 석성이 복합적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외곽부의 제1곽은 서측으로 길게 대지를 이루고 있고, 그 중심부에는 윗면이 수평을 이루는 암반이 형성되어 있어 건물지로 추정하며, 외벽 쪽으로는 매몰된 석축이 보인다. 외곽부의 출입구는 가락초등학교 쪽으로 난 대형의 성석이 확인되었다. 제1곽의 서남측과 동북측 아래는 계단상의 지형이 있고, 서측으로 길게 고시구루와(腰曲輪)[6]를 배치했으며 서측 끝에도 2 ~ 3개소의 부곽을 조성했다. 북측 외곽에 출입구로 보이는 모서리가 존재한다. 죽도왜성의 범위는 죽도 구릉지의 서측 끝 민가가 있는 부분까지 포함된다.

현재 김해 죽도왜성의 중심부 대부분은 공동묘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일부 밭으로 개간되고 있다. 동쪽 끝으로는 문수암이 들어서 있고, 그 아래로 최근 민가가 신축되면서 성벽이 훼손되고 있는 상태이다. 정상부를 중심으로 동서 방향으로 연속되는 지형의 좌우 아래쪽으로는 독립된 공간이 단을 이루고 있으며, 북쪽 최하단부 사면에는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3.1. 농소리왜성

3.2. 마사리왜성

4. 과거 모습 및 현황

파일:pan029441.jpg
경남 김해 죽도 일본성 (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이하 유리건판 사진 동일)
파일:pan029434.jpg
경남 김해 죽도 일본성 일부[7]
파일:pan004936.jpg
부산 강서 김해죽도성에서 본 김해읍과 장유면[8]
파일:pan031888.jpg
부산 강서 김해 죽도성 전경[9]
파일:pan031890.jpg
부산 강서 김해 죽도성 서북 각로[10]
파일:pan031892.jpg
부산 강서 김해 죽도성 각로[11]
파일:pan031889.jpg
부산 강서 김해 죽도성 남면 석원과 천수대[12]
파일:pan031891.jpg
부산 강서 김해 죽도성 석원과 천수대[13]
파일:52778998356_9f05554527_o.jpg
주곽부 북측 이시가키의 축조 상태
파일:52778998116_7c3ca8ffe1_o.jpg
주곽부 북측 망루 기단의 우각부
파일:5805947115_b41b573d2d_o.jpg
대나무숲에 파묻힌 이시가키
파일:52778998581_a4034760b0_o.jpg
무덤으로 뒤덮힌 주곽부의 서측 부곽과 건너편의 외곽부

5. 교통


죽도왜성은 본래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섬이었고, 현재로 드넓은 김해 충적평야의 농경지로 둘러싸인 외딴 곳이기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 쉽지 않다. 가락동행정복지센터 정류장에 하차한 다음 길을 건너 문수암 및 부산가락국가관리묘역 방면으로 산길을 타고 올라오면 진입할 수 있다. 상술했듯 주곽부 전체가 빽빽한 대나무숲과 묘역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석축을 자세히 관찰하려면 산행을 해야 하는 수준이며, 경사도 가팔라서 안전에 유의해야 한다. 여름에는 진드기 역시 큰 위험 요소이다.

6. 외부 링크

7.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7호

김해 죽도왜성은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 가락산에 있는 것으로, 가락성 또는 죽도성이라고도 한다.

가락산은 동서로 길게 뻗은 독립된 야산으로, 그 동쪽 끝이 낙동강 서쪽 지류에 인접해 있어 선박을 정박시킬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왜장인 니베시마가 쌓은 것으로, 해발 35m의 낮은 구릉지 양쪽에 축조되었다. 제일 높은 곳에는 소위 일본성의 양식인 본환(本丸)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석재는 부근에서 구하기가 어려워 먼 곳에서 육로 및 뱃길을 이용하여 운반한 것으로 보인다.

죽도왜성은 주변의 구포왜성, 양산왜성과 함께 삼각형을 이루어 김해 북쪽지역에서 내려오는 병력을 효율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방어의 요충지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낙동강 지류를 이용하여 배로 만든 다른 성들과 긴밀한 연락을 도모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8. 관련 문서


[1] 토요 시게모리(豊茂守). [2] 죽계종만(竹溪宗逸). [3] 적색이 중심거점, 황색이 연결거점, 녹색이 진출거점 및 데지로(出城) [4] 현재는 69번 지방도를 놓으면서 지형을 끊어 놓은 상태다. [5] 상술했듯 임진왜란 당시에는 모두 바다와 뻘밭이었다. [6] 주가 되는 부곽의 측면을 따라 길게 다진 작은 부곽이 연속적으로 이어진 형태이다. 계단식 논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7] 외곽부에서 주곽부를 동측으로 바라본 모습. [8] 주곽부에서 외곽부를 서측으로 바라본 모습. [9] 외곽부에서 주곽부의 북측 석축을 바라본 모습. [10] 角櫓. 모서리(우각부)에 위치한 망루 기단, 즉 스미야구라다이(隅櫓台)를 말한다. [11] 북측 이시가키 한가운데에 돌출된 망루 기단을 동측에서 바라본 모습. [12] 석원(石垣)은 곧 이시가키를 말한다. 사진에서 조금 솟아오른 부분에 기와지붕 모양의 기념물이 있는 곳이 천수 기단이다. [13] 천수 기단을 서북측에서 바라본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