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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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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치보.jpg
이명 김감리 (金監理)
출생 1859년 9월 17일
평안남도 평양부
사망 1941년 11월 18일 (향년 82세)
중국 훈춘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
서훈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2.1. 연해주 일대의 독립운동을 이끈 노인2.2. 러시아 내전 시기의 행적2.3.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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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유공자,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연해주 일대의 독립운동을 이끈 노인

김치보는 1859년 9월 17일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와 연해주 이주 이전 생애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나, 1908년경 이주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들로부터 금광 감리를 맡았던 사람이라는 의미로 '김감리'라고 불렸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볼 대 평안도에서 금광업에 종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연해주 이주 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약방을 개업하여 운영했다. 그의 상점은 연해주 한인 민족운동가들의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하였다.

김치보는 연해주로 이주한 직후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08년에 전 간도관리사 이범윤, 조창호 등과 상의하여 의병을 조직하기 위해 자금을 모금하였고, 1909년 국민회(國民會) 블라디보스토크 지방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그는 1909년 4월 청년돈의회(靑年敦義會)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았다. 청년돈의회는 명목상 청년들의 교육을 발달시키기 위하여 조직되었다고 하여 매주 일요일 저녁 7시에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로 대동공보의 발행인이었던 유진률이 많은 역할을 하였다.

김치보는 교육활동에도 열심이었다.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에 설립된 계동학교 감독이 되었으며, 교장 김학만과 함께 학생들을 위해 교과서 대금을 의연하기도 하였다. 또한 김병희, 이시달, 김응필, 이주송, 오상목, 남진석, 안창준 등과 함께 낙열평에 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대한부인회가 한민여학교를 설립하려고 하자 이에 응하여 10원을 의연하였다. 나선리 학교와 청동학교에도 의연하였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의 풍속 교화와 사회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무렵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에서 한인들이 도박장을 개설하여 안녕 질서를 해치는 일이 발생하자, 김치보는 개척리의 유지 신사들과 함께 도박장을 혁파하는 운동을 펼쳤고, 이준 열사 전기 간행과 유족의 구휼을 위한 의연금을 모금하는데도 참가하여 50전을 의연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 1911년 6월 조직된 ‘해삼위 거류민회’에서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10년 8월 23일, 김치보는 성명회의 대표로 추대된 유인석, 이상설이 주관한 한일병합 반대 성명을 담은 '성명회 선언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성명회는 일본이 러시아에 강력히 항의를 제기하고, 그 주요 인물들의 체포 인도를 요구하여 해산되고 말았다. 8월 30일 러시아 당국은 유인석과 이상설을 포함한 성명회 주요인물 42명의 체포를 명하였다. 유인석과 홍범도, 이종호 등은 다행히 몸을 피해 화를 면했으나, 이상설을 비롯해 이범윤, 김좌두, 이남기, 권유상, 안한주, 이치권, 이규풍 등 8명은 ‘항일운동의 괴수들’이라고 하여 9월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로 유형을 당했다. 이들은 7개월 뒤인 1911년 5월 유배에서 풀려나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김치보는 이때 몸을 피한 것으로 보이며, 4개월 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자선공제회의 회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1911년 6월 1일 창립된 권업회에 참가하여 통신부장에 선임되었으며, 1914년 7월 19일 열린 권업회 하반기 정기총회에서 사임한 강택회를 대신하여 의사원으로 선임되었다. 한편, 그는 1912년 12월에 최종면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노인단을 조직하였다. 그는 노인단을 조직한 기념으로 기금을 모금하여 권업신문 발간을 후원하였다.

2.2. 러시아 내전 시기의 행적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한 후, 연해주 한인들은 한민회를 조직했다. 이후 7월 21일 <한인신보>가 창간되어 주 1회 발행되었다. 이때 김치보는 <한인신보> 발기회의 고문단장으로 활동했으며, 1918년 실시된 한민회 선거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17년 5월 18일 ‘노령한인협회 발기회’가 조직되었을 때, 김치보는 최재형, 문창범, 윤니콜라이, 김야곱 등과 함께 의사원으로 참가했다.

6월 17일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이르쿠츠크 동쪽의 각지 대표 96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1회 전로한족대표회의가 개최되었고, 이때 전로한족중앙총회가 결성되었다. 전로한족중앙총회는 1919년 2월 25일 ‘전로국내조선인회의’를 소집하였다. 김치보를 비롯하여 문창범, 김하석, 장기영, 김진 등 5명이 발기하여 소집된 회의에서는 전로한족중앙총회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로 확대, 개편하기로 의결하였다. 김치보는 대한국민의회의 상설의회 의원 30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1919년 3월 3.1 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국민의회는 3월 17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연해주 일대에서 대규모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3월 26일 김치보의 상점인 신한촌 덕창국에서 노인동맹단이 조직되었다. 이날 거행된 발회식에서 김치보는 단장으로 선출되었고 홍범도, 유상돈 등 16명이 의사원으로 선출되었다. 노인동맹단은 46세 이상의 연령제한을 두었을 뿐 남녀를 가리지 않고 회원자격을 부여하였다. 독립운동 청년들을 지원할 계획을 세운 노인동맹단은 발회식 직후 단원 모집을 위해 각 지방으로 대표를 파견하였다.

또한 노인동맹단은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기로 결정하고 6월 25일 강문백과 연병우를 대표로 파견하여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전노령 대한민노인동맹단 근력혈 도충간>이라는 제목의 독립요구서를 제출하였다. 대일본제국정부 대신 앞으로 보낸 이 요구서는 대한국민노인동맹단 대표 김치보 외 20명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한편 노인동맹단은 단원 중에서 결사대를 모집해 국내로 들여보내거나 단원 150명을 국내로 파견하여 3.1 운동을 확산시킬 계획도 세웠다. 이리하여 강우규가 국내로 투입되어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을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1920년 2월 23일, 신한촌의 유지 인사들은 각 단체 대표자회를 개최하고 협의한 결과 2월 27일부로 대한국민의회 의장 서리 한창해(韓蒼海)와 서기 대리 전일(全一)의 명의로써 통지서를 각 지방에 발송하여 각 지방이 모두 같은 날 같은 시간에 3·1독립선언기념회를 갖기로 하였다. 이때 재무부장엔 김치보가 선임되었다. 김치보는 1920년 3월 1일 신한촌 한민학교에서 대한독립선언 1주년 기념식이 거행했다. 이 행사에는 러시아공산당 대표인 세르게이 라조를 비롯하여 임시정부 육해군 총사령관의 부관, 블라디보스토크시 위수사령관 등 혁명정부 대표자와 각 신문사의 대표자,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각국의 영사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각 사회단체의 대표자들이 참가하였다.

한편 1920년 2월에 김치보 등 연해주 한인 유지 16명은 블라디보스토크 상무총회 설립을 발기하였다. 창립총회가 개최되고 의장에 최만학이 선출되었다. 상무총회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의 상무 진흥을 도모하고 독립운동에 이용하기 위하여 「한인신보」를 기관지로 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아령총판부'의 총판에 최재형, 부총판에 김치보를 임명했다.

그러나 1920년 4월 4일 일본군이 기습적으로 연해주 임시정부와 혁명군에 공격을 감행했다. 이로 인해 최재형을 비롯한 76명의 바일 한인 인사들이 체포되어 모조리 처형되었다. 이때 김치보는 자신의 상점 덕창국의 주인으로서 평범한 생활인의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일제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1921년 1월 23일 일제의 어용단체인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거류민회 총회에서 의사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1922년 1월 10일에서 17일까지 신한촌 한민학교에서 일제에 의해 시베리아조선인교육회가 개최되었을 때 영업부원으로 선임되었다.

2.3. 말년

1922년 4월, 김치보는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예술단의 일원으로 국내를 방문했다. 그들은 4월 14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8월 10일 돌아올 때까지 원산으로부터 경성, 개성, 평양, 정주, 선천 등 27개 도시에서 총 35회의 공연을 하였다. 당시 김치보는 해삼위천도교 교구장의 고문자격으로 이 방문단에 합류했다. 일제는 이를 통해 그들이 자신들의 지배에 순응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김치보는 7월 14일 국내를 순회하던 중 김광희, 강도희, 김흥종 등과 함께 국내의 이종훈, 홍병기, 그리고 최동희를 만나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여기에서 김광희는 해외선전부장, 김치보는 강도희, 김홍종과 함께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겉으로는 일제에 순응하며 방문단의 일원으로 참가했지만, 안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1922년 10월 26일 일본군이 연해주에서 철수한 뒤 일제의 비호 아래 있던 조선인거류민회는 해체되었고 거류민회에서 고위급 관직을 역임했던 인사들은 타도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김치보는 타도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1923년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에 참가하여 창조파가 조직한 국민위원회에 참여한 천도교 영수 신숙에 대해 1924년 3월 1일 시베리아 천도교인들이 반대 성명서를 발표했을 때 그도 참여했다. 그 후 중국 훈춘에 가서 살다가 1941년 11월 18일 중국 훈춘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지지나 확실하지 않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김치보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