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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섭의 기타 정보
|
이름 |
김이섭 金利燮 | Kim Yi-sub |
|
출생 | 1974년 4월 27일 ([age(1974-04-27)]세) | |
전라남도
광주시 (現 광주광역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185cm | |
직업 |
축구 선수 (
골키퍼 / 은퇴) 축구 코치 |
|
학력 |
숭의중학교 (졸업) 숭신공업고등학교 (졸업) 전주대학교 (학사) |
|
프로 입단 | 1997년 포항 스틸러스 | |
소속 | 선수 |
포항 스틸러스 (1997~2000) 전북 현대 모터스 (2002~2003) 인천 유나이티드 FC (2004~2011, 2016) |
코치 |
인천 유나이티드 FC U-18 (2011~2014 / 골키퍼 코치) 인천 유나이티드 FC (2015~2016 / 골키퍼 코치) 이리고등학교 (2018 / 골키퍼 코치) 인천 유나이티드 FC (2019~ / 골키퍼 코치) |
|
가족 | 아들 김준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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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 코치.2. 선수 경력
2.1. 유소년 시절
광주에서 태어나 전라도권에서 축구를 배웠다. 본래는 육상부였으나 축구부였던 동네 형을 따라갔다가 코치의 제의로 축구를 시작했다. 숭의중학교 시절에는 골키퍼를 하기 싫어서 골키퍼를 시키면 축구를 그만 두겠다고 한 적도 있지만, 필드플레이어로는 팀의 주전으로 뛸 수 없었다. 반대로 골키퍼로 나서면 주전이 될 수 있었기에 결국 스스로 골키퍼의 길을 선택했다.숭의중학교 졸업 이후 숭신공업고등학교, 전주대학교에서 경력을 쌓았으나, 특별히 지명도가 높은 유망주는 아니었다.
2.2. 포항 스틸러스
1997년 드래프트에서 포항에 5순위로 지명되며 프로 선수로 데뷔했다. 전주대 시절까지는 크게 유명한 선수는 아니었고 포항에서도 처음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주전 골키퍼 이명열이 입대하면서 빈 자리가 생기자 김이섭에게 기회가 생겼고, 이 자리를 꿰차며 주전 선수로 자리잡았다.프로 데뷔 시즌에 포항의 주전 골키퍼가 된 김이섭은 0점대 방어율을 기록했고, 1997년 K리그 신인왕 후보에도 이름을 올렸다. 최종적으로는 대전의 신진원이 수상했지만, 불과 1년 만에 달라진 위상을 자랑하며 기대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1997 시즌 이후에는 부침을 겪었다. 1998 시즌에는 여전히 주전으로 나서며 포항의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우승을 이끌었으나 실점이 잦아지며 불안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1999 시즌에는 부상이 겹쳤다. 그리고 그가 부상에 시달리는 사이 새로 영입된 골키퍼 조준호가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면서 2순위 골키퍼로 밀려났다.
설상가상으로 2000 시즌이 끝난 뒤에는 무려 김병지가 포항으로 이적하면서 경쟁이 더욱 어려워졌다. 결국 2001년 포항과 계약을 해지한 김이섭은 한동안 여러 팀의 테스트를 받으며 재기를 모색했다.
2.3. 전북 현대 모터스
약 1년이라는 시간을 무적 신분으로 보냈던 그는 2002 시즌 중순에 모교 소재지였던 전북 현대에 입단했다. 당시 전북은 이용발을 제외하면 골키퍼 자원이 전무했기에 보강이 필수였고, 지역 출신 선수였던 김이섭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됐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입단한 팀에서도 주전으로의 도약은 힘들었고, 첫 해에는 출전 기회를 받지 못한 채 시간을 보냈다.이듬해인 2003 시즌에는 종종 출전 기회를 얻으면서 오랜만에 그라운드를 밟았다.
2.4. 인천 유나이티드
FA로 풀린 상황에서 김이섭은 새로 창단하여 선수를 모으던 인천 유나이티드의 제의를 받아 창단 멤버로 입단했다.
2.4.1. 2004 시즌
시즌이 개막한 후 초반에는 팀의 주전 골키퍼로 경기에 나섰으나, 베테랑 골키퍼 신범철이 시즌 중반부터 중용을 받으면서 입지가 오락가락했다. 김이섭은 시즌 내내 신범철, 권찬수와 치열한 주전 경쟁을 벌였는데, 끝내 시즌 최후반부에 주전으로 도약하면서 인천 골문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였다.2.4.2. 2005 시즌
2004 시즌이 종료된 후 신범철이 은퇴를 선언하면서 김이섭의 입지가 굳건해졌다. 시즌 시작 전그러나 부상이 겹치면서
가장 영광스러운 시간을 맞이한 김이섭이었지만 K리그 챔피언 결정전 1차전에서 울산을 상대로 5실점을 당하면서 위기를 맞이했다. 이 날의 부진으로 국가대표팀과도 거리가 멀어졌고, 2차전에는
2.4.3. 2006 시즌
2005년 막판의 충격으로 2006 시즌에는 2순위 골키퍼로 시즌을 시작했다. 리그에서 벤치만을 치키다가 리그컵에서 오랜만에 출전 기회를 받았고, 기량을 어느 정도 되찾으면서 다시금 주전 경쟁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즌 전체로 보면2.4.4. 2007 시즌
2007 시즌 시작을 앞두고시즌 초에는 애매한 출전 기회를 받고 있던 그였지만, 시즌 중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주전에 등극했다. 유망주 송유걸이 영입된 후에도 다른 경쟁자들보다 단단한 입지를 확보한 김이섭은 후반기 내내 주전의 위치를 지키며 1년 반만에 인천 골문의 주인으로 복귀했다.
2.4.5. 2008 시즌
지난 시즌 막판의 활약을 이어가 시즌 초에는 주전 수문장으로 팀을 지켰다. 리그는 김이섭, 리그컵은 송유걸이 맡는 방식으로 초반 일정을 소화했으나 김이섭은 시즌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불의의 부상에 시달렸다. 갑작스런 컨디션 저하로 인해 송유걸,그래도 언제나 시즌 막판에 강했던 김이섭답게 부상을 털고 돌아와서 최후에는 주전으로 복귀했고, 무난하게 시즌을 마무리했다.
2.4.6. 2009 시즌
우여곡절을 거쳐 2009 시즌에는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임중용- 안재준을 중심으로 한 수비진과 굉장히 좋은 호흡을 보여주면서 전반기 인천 돌풍의 주축이라는 평까지 들었다. 하지만 단단했던 수비진도 시즌 중반부터는 흔들렸고, 김이섭 본인도 노장이었기에 차츰 경쟁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시즌 최후반부에는 젊은 골키퍼 송유걸에게 기회가 돌아가며 2선발 골키퍼로 밀려났다.2.4.7. 2010 시즌
지난 시즌 막판에 이뤄졌던 세대교체의 영향으로 전반기에는 완전히 2선발 골키퍼로 분류되었다. 전반기에는 간혹 로테이션이 있던 때를 제외하면 송유걸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면서 차츰 은퇴를 준비하는 모양새였다.그러다가 후반기에 허정무 감독이 부임하면서 다시 주전으로 복귀했으나, 이전에 비해 대량실점 경기가 늘어나면서 아쉬운 평가도 받았다. 시즌 막판에는 그래도 주전으로 나섰던 그였지만, 최종전에는 세대 교체의 일환으로 젊은 신인 골키퍼 윤기원이 기회를 받기도 했다.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은 김이섭은 현역 생활 연장과 은퇴의 기로에 놓였는데, 허정무 부임 이후 노장 선수들을 대거 정리하는 흐름 속에서 본인도 은퇴를 선택했다. 선수 본인은 타 팀의 제의도 받았고 현역 생활 연장의 의지도 남아있었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오랫동안 몸담았던 인천에서 선수 경력을 끝내기로 결정했다.
2.4.8. 2011 시즌
은퇴한 후 인천대건고등학교 축구부 골키퍼 코치로 부임하면서 지도자 경력을 쌓던 그였지만, 2011 시즌 중순 윤기원이 세상을 떠나면서 허정무 감독이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현역 복귀 제안을 받은 그는 고심 끝에 R리그 경기에 나서면서 차근차근 폼을 끌어올리며 후반기 일정을 준비하였다.그러나 이적시장에 인천이 김이섭 복귀 대신 권정혁 골키퍼 영입을 결정지으면서 현역 복귀는 무산되었고, 다시 본업인 코치직에 집중하였다. 그래도 시즌 최종전이었던 상주 상무전에 임중용과 함께 동반 은퇴식을 치르면서 팀의 레전드로 대우를 받았다.
인천 소속으로 김이섭은 통산 129경기에 나서서 149실점, 46클린시트를 기록했다. 이는 2024년 시점까지도 인천 역대 골키퍼 최다 출전 기록이자, 최다 클린시트 기록이다.
3. 국가대표 경력
국가대표팀과 크게 인연이 없던 선수였으나, 2005년 리그에서의 활약으로 딕 아드보카트 감독의 주목을 받았다. 결국 2005년 11월 팀 동료 이상헌과 함께 아드보카트호 전지훈련 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처음으로 대표팀 선수가 됐지만, 상술한 울산전 5실점 사건 이후 국가대표팀에서 밀려났다.4. 플레이 스타일
기본적으로 안정적인 성향의 골키퍼였다. 뛰어난 안정감과 반사신경을 고루 갖췄고, 후방에서 자리를 지키며 무게감을 실어주던 클래식한 유형. 다만 골킥을 비롯하여 경기 관여 면에서는 아쉬움을 보였는데, 2000년대 골키퍼의 전형적인 장단점을 지닌 선수로 여겨졌다.사실 김이섭 본인은 보다 적극적인 플레이를 추구하는 면이 있었으나 인천 시절 팀 동료이자 이후 코치가 되어 스승으로 만난 신범철의 영향을 받아 스타일이 변화했다고 한다. 김이섭은 본인을 유럽형 골키퍼로 표현했는데, 신범철은 남미형 골키퍼 스타일이라고 밝혔다. 신범철은 안정적이고 전통적인 골키퍼의 역할을 강조했는데, 가치관의 차이로 김이섭과 충돌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김이섭이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며 스스로 많이 성장했다고 회상했다. 특히 상황 대처 및 캐칭 면에서 신범철의 도움이 컸다.
선수 본인은 현역 시절 아쉬웠던 부분으로 실수를 두려워하고, 경기에 소극적으로 임하는 순간이 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연차가 쌓이면서 적극적으로 수비진을 리드하고자 노력했고 이 변화가 코칭 스타일에도 영향을 줘서 지도자가 된 후에는 후배들에게 수비수와의 소통을 적극적으로 주문하였다.
5. 지도자 경력
은퇴 이후에는 인천 유나이티드의 유스 팀인 인천대건고등학교 축구부에서 GK코치를 맡았고 2015년부턴 인천 유나이티드 1군 팀에서 코치로 활동했다. 그가 육성한 선수 중 대표적인 선수로 그의 후계자로 불리는 이태희, 김동헌가 있다.
2016년 인천 유나이티드 선수 명단에 등록된 것으로 확인되어 갑작스런(...) 현역 복귀를 하게 되는 듯 보였지만, 원래 골키퍼 코치를 골키퍼 공백에 대비하여 선수 명단에 등록하는 것은 몇 차례 있던 일이었다. 실제로 권찬수도 성남 시절 등록되었다가 골키퍼 진이 전멸하며 서브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2016 시즌 종료 후 인천을 떠나 행방이 묘연했으나 2018년 전북 이리고등학교의 코치로 재직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전북 U-15팀에 속한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함으로 보인다.
2019 시즌을 앞두고 권찬수 코치가 제주로 떠나고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2년 만에 인천으로 돌아왔다. 팬들 역시 레전드의 귀환을 반가워하는 분위기. 김이섭의 복귀 후 이태희의 기량이 급상승했고, 엄청난 선방을 보여주고 있다.
2022 시즌에는 김이섭의 또 다른 제자인 김동헌의 잠재력이 제대로 만개하며 이태희마저 밀어내고 주전으로 올라섰고, 리그 정상급 골키퍼로 인정받는 등 김이섭의 엄청난 지도력에 힘입어 인천은 2023 시즌에 창단 최초 AFC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하게 됐다.
2023 시즌에는 프로팀 GK 모두가 유스 출신으로 채워지면서 다시한번 김이섭의 지도력을 인정받았던 순간이다.
5.1. 코치로서 능력
2011년부터 인천 유나이티드 유스팀 코치를 시작으로 지도자 인생을 시작하였다. 그의 첫제자는 이태희인데 당시 대건고는 신생팀으로 중하위권에 위치한 팀이였다. 이런팀에서 이태희는 당시 연령별 대표팀 주전으로 활약했을정도로 첫 제자부터 본인의 지도 능력을 발휘했다. 이후 김동헌 역시 연령별대표팀에 계속해서 발탁되며 능력을 입증해냈다. 이후 프로팀으로 올라와 만년 서브였던 조수혁을 주전급 골키퍼로 성장시켰으며, 다시 돌아온 인천에서는 그의 두번째 제자였던 김동헌을 프로 정상급 골키퍼로 성장시켰다. 김동헌은 당시 리그 세이브 1위를 기록했다. 여담으로 2023시즌에는 인천의 모든 골키퍼가 유스출신으로만 채워졌었다. 2024시즌에는 이범수 역시 몇단계 더 레벨업 한 모습을 보여주며, 다시 한번 지도력에 대해 능력을 입증하게되었다.6. 여담
- 아들 김준홍도 축구선수이며, 포지션은 역시 골키퍼다. 인천 유나이티드 U-12 시스템을 거쳐 김이섭이 잠시 인천을 떠날 당시 전북 U-15팀인 김제금산중학교로 옮겨갔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지 2학년임에도 전북 U-18팀 전주영생고등학교에서 주전으로 뛰고 있으며 2019 FIFA U-17 월드컵 브라질, 2023 FIFA U-20 월드컵 아르헨티나 최종 명단에 포함될 정도로 가능성을 인정 받는 유망주다.[1] 아버지가 선수 시절 내내 대표팀과 인연이 없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연령별 대표팀부터 꾸준히 주전 골키퍼로 뛰고 있다.
- 김병지가 헤딩 골을 넣었을 때 실점했던 골키퍼였다. 경기 당시 선수 본인은 허리 부상으로 출전을 고사하였으나 박성화 감독은 그를 기용하기로 결심했고, 그런 상황에서 김병지에게 실점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 좋아하는 선수로 올리버 칸을 꼽았다.
- 외모만 보면 진중하거나 조용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유쾌한 성격을 지녔다.
- 다시 축구를 하게 된다면 필드플레이어를 하고 싶고, 특히 공격수를 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골키퍼도 매력이 있는 포지션이지만 한 차례의 실수가 너무 커서 힘들었는데, 자신은 골키퍼의 약점을 잘 알기 때문에 득점할 자신이 있다고 밝혔다.
- 징크스로 경기 전 날에는 김을 비롯하여 쌈 종류를 멀리 했다. 초등학교 당시 축구를 할 때 감독이 부진한 선수들에게 '김 말아 먹었냐'는 말을 많이 했는데 그게 마음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체한 적도 있다고. 다만 평소에는 잘 먹는다.
- 인천 시절 경력을 뜯어보면 유독 후반기에 강한 면모를 보여 줬다. 인천에서 보낸 모든 시즌동안 주전 경쟁을 겪었고[2] 벤치에 머무른 시기도 있었지만 2009 시즌을 제외하면 항상 시즌 막판의 주전 골키퍼는 김이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