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2:59

김원규(1904)

金元圭
1904년 ~ 1968년

1. 개요

대한민국의 교육자로 특히 서울고등학교의 아버지라고 일컫어도 될 만큼 서울고등학교의 발전에 기여했다.

1904년 황해도 옹진군 출생으로 1925년 평양고등보통학교, 1929년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함흥농업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 이후 1932년 경기여고 교사, 1945년 경기도 학무과장, 1946년 서울중학교장, 1957년 경기고등학교장, 1964년 서울시 교육감, 1966년 경기공업고등학교장을 역임하였다.

서울고등학교(당시 6년제 서울중학교) 개교와 함께 초대 교장을 맡으며 무려 11년간 교장으로 재임하였다. 조선총독부 관료 자제들이 주로 재학하던 일본인 학교였던 경성중학교를( 참조)와의 역사를 단절하고 새로이 서울중학교로 개교하면서[1] 자신의 모교였던 평양고보 스타일로 신문로 감옥소라 불릴 만큼 엄격한 스파르타식 교육을[2] 실시해 단숨에 서울고를 전국 명문고로 부상시켰다. 이와 함께 평양고보 졸업생들은 평양고보의 복교라는 생각으로 일부러 자제들을 서울고에 진학시켰다고 한다.

서울고 교장에서 경기고 교장으로 옮기면서 서울고에서는 아쉬움이 컸다고 한다.

정년을 1년 앞둔 1968년 일본 출장 도중 사망하였다.

서울고등학교 동문들은 그의 노고를 기려 흉상과 어록비(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돼라)를 서초동 서울고 교정에 세웠다.

그에 대해 자세히 다룬 기사는 이 곳을 참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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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동고등학교는 그러나 일제시대의 욱구중학교 역사를 계승하였다. [2] 그러나 김원규 교장 본인은 스파르타식 교육이라는 말을 싫어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