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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 김순재(金珣載)[1] |
출생 | 1918년 3월 7일 |
황해도
황주군 동천리(東天) 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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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01년 3월 23일 향년 83세 |
서울특별시 | |
학력 | 난징 국립중앙대학 농학원 중퇴 |
직업 |
아세아상공사 경리 상하이 동화산업공사 근무 |
독립운동 경력 |
한국광복군 제 1지대 제 2구대[2]상하이 지구 지하공작 책임자[3] 상하이 주호판사처 처장 |
광복 후 경력 |
미군정 CIC 요원 내무부 치안국 정보수사과장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894호 |
상훈 |
대통령표창(1963) 건국훈장 애족장(1991) |
[clearfix]
1. 생애
1918년 3월 7일 황해도 황주군(黃州郡) 황주면(黃州面) 동천리(東天里)에서 태어났다.
첫째 형 김경재(金璟載)는 신징(新京)[4] 만선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한다. 이때 만선일보에 있었던 송지영, 박철원과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1939년 김경재가 중국인 쏴(紹)씨의 초청으로 투자를 받아 중국 상하이에서 상하이시보(上海時報) 일간지를 발행하고 동시에 위일리스 극장을 매수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만선일보에서 만난 송지영[5]이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1941년 2월, 랴오닝성 뻔시후(遼寧省 本溪湖)에 있는 아세아상공사 경리를 시작으로 다롄시을 거쳐 상하이의 동화산업공사에 근무하게 된다. 이때 직원으로 쓰고 있던 중화민국 제 3전구 사령장관부 조사실 소속 천더썽(陳德生, 24세) 중위와 만나게 된다.
2. 독립운동
1942년 2월, 첫째형 김경재가 일본군 헌병대에 끌려가고 상하이시보(上海時報)와 위일리스 극장 강제폐쇄가 된다. 맏형이 풀려난 후 제 3전구 사령부 조사실 소속 지하공작원이 된다.1943년 2월, 왕징웨이 괴뢰 중화민국 정부의 난징 국립중앙대학 농학원(農學院)에 입학하게 된다. 송지영, 이일범, 조일문 정영호, 박철원, 이규해, 유완, 이복록, 전원일, 김영휘, 박시준, 전채순 등 한국인 동창들과 만나게 된다. 이 중 송지영과 이일범과 절친으로 보낸다.
1943년 6월말, 난징 국립중앙대학 한족동맹(韓族同盟) 사건으로 송지영, 이일범, 조일문, 이정선 등 체포되자 동창생 박철원(朴哲遠)이 상하이(上海)의 일본 영사관 경찰에게 쫓기게 되었는데 박철원의 항저우에서 항전지역으로 탈출을 돕는다.
박철원은 송지영(宋志英) 등 한인 재학생들과 한족동맹(韓族同盟)을 조직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해나갔는데, 조직이 발각되어 일본영사관 경찰에 추적을 받았다. 그래서 그를 장시성(江西省) 상라오시(上饒市) 옌산현(鉛山縣) 하구진(河口鎭)에 있던 중국 중앙군 제 3전구로 탈출하도록 도와주었다. 박철원을 도피시킨 사실이 발각되어 항저우(杭州)에서 일본 경찰에 구속되었다가 한 달 후 석방되었다.
1943년 3월 5일경 황푸군관학교 4기생이자 김원봉계열의 이소민 대장이 이끄는 광복군 제 1지대 제 2구대 입대하고[6], 중국 제 3전구 사령부 조사실 파견근무를 하였다. 제3전구 장관실 마오완뤼(毛萬里) 장군 소속으로 있으면서 항저우(杭州), 진화(金華) 지구에서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고, 광복군 모집 등의 공작 활동을 하였으며 많은 물자와 현금을 밀반출하기도 하였다.
물자와 현금은 맏형 김경재가 중국에 투자한 전재산을 돈을 담배와 광목(2화차, 담배1화차, 현금 180마대)을[7] 트럭 3대에 한국인 13명[8] 중국인 5명과 함께 일본군 점령지에서 탈출하게 된다. [9]
1945년 4월 3일, 진화지구 일본군 보급로 차단과 민심교란 작전을 위해 천더썽(陳德生), 박시준과 편의대(사복차림) 공작원 10명과 란씨를 거점으로 하여 진화, 위우, 쥬지 3개 지역으로 정찰 공작원을 보내고 철로를 파괴하고 일본군 보급창고를 폭파시킨다.
3. 광복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하자, 징모 제 3분처와 제 1지대 제 2구대에서는 간부 20명을 중심으로 적군지역에 대한 초모 확대반 5개조를 조편성하여 파견계획을 완비하던 중 적이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되여 총사령부 지시에 의한 적 점령지구 내의 교포 생명/재산 보전 및 한적 장병 수용 임무를 구축하고자 각 지구에 선발대를 파견하였으며 그 명단은 아래와 같다.우후지구(蕪湖地區) | 박승학 |
난징지구(南京地區) | 이일범, 박철원, 피문성 |
상하이지구(上海地區) | 김용, 박시준 |
항저우지구(抗州地區) | 전호인, 정영호[10], 유익배 |
등이 파견되어 소임직무를 완축하였다.[11]
1946년 3월 4일, 상하이시에서 미군정에서 제공한 L.S.T.상륙정을 타고 3월 13일, 부산항에 귀국했다고 한다.[12]
4. 경찰 입대
1947년 봄, 이순용[13]의 추천으로 미군정 CIC 요원으로 활동하다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내무부 치안국 교육과장으로 특채되었다.[14]
1947년, 공산당이 합법적으로 활동하던 시대라 공산당 관련 조직을 검거하기 위해 김문호[15]와 공조로 조선상사주식회사 부사장 최창성, 사업부장 김찬도를 체포했고 북조선노동당 자금조달책인 서울시 미국인 시장 고문 박길용를 체포하여 북한 김일성이 남로당에 지원한 자금에 대한 수사를 했었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장석윤치안국장으로 지프차 열쇠를 받아 부산까지 철수하게 된다.[16] 다시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게 되자 이순용을 통해 미 육군성 파견대로 정찰 임무를 수행했었다.[17]
1952년 이일범과 함께 대남간첩단 사건으로 기소되고 무죄로 풀려났다.
1969년 선열기념사업회 건립위원 위촉
1973년 광복사를 운영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5. 참고문헌
김용의 공훈록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378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14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856·867면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 2012[18]
[1]
1946년 귀국하자마자 황해도 황주 고향집에 찾아갔는데 당시 소련정에 공산화된 사리원 검찰소 김계도에 의해 기소가 되면서 잡혀있었다. 도보로 탈출하여 38선 넘어 남한에 정착하게 된다. 아마도 기존 이름으로는 활동하기가 어려워 1947년 봄,
미군정 CIC 요원이 될때 이름을 김용(金龍)으로 개명한다.
[2]
첸산(鉛山)주둔
[3]
계급은 소교(소령)
[4]
만주국 수도 장춘
[5]
후술할 1942년 상하이시보가 폐쇄되자 생계가 불안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6]
1944년 2월 10일에
진화시의 식당에서 광복군 입대 선서식을 한다.
[7]
현재기준 180억원
[8]
남자 6명, 여자 4명, 아이 3명
[9]
진화에서 열차 유격대 습격을 받아 중국인과 일본인이 납치 당하고 상공에서 미공군의 P51 머스탱 전투기가 폭격하고 다니는 정세에서 조선으로 가지고 갈 수 없기 때문에 중국군에 주는게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10]
저장성 외교조원
[11]
김승학, 한국독립사 제 2편 제 3장 제 6절 p. 302
[12]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 2012, pp. 249~252
[13]
미국 육군 중사 신분으로 CIC(미군 방첩대)에서 국무부 촉탁으로 일하며
백의사와 CIC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으며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도 기여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미군정(1948)이 해체되면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14]
김용의 회고록에 따르면 미군 CIC요원으로 시작했었고 그 당시 월급 5천원을 받았었다고 한다. 장관들 월급이 5천원이었으니 상당히 큰 돈이었다.
[15]
광복군 제 3징모분처장, 육군 헌병총사령부 조사과장, 당시 계급 소령
[16]
차량이 없던 광복군, 임시정부 출신의 인사들은 서울에서 탈출하지 못해 북한으로 납치된다.
[17]
주로 북한군이 38선을 넘어서 서울에 침입한 목적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한 임무였다.
[18]
김용의 자서전으로 주로 광복군 제 1지대로 편입된 조선의용군 출신 이소민 상교에 대한 정보와
이일범과 같이 한 내용이 많아서 참고 삼아 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