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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조선)



1. 개요2. 생애3. 평가
3.1. 긍정적 평가3.2. 부정적 평가
4. 최종적 평가5. 관련 문서6. 여담

1. 개요

金睟

1547년( 명종 2) ~ 1615년( 광해군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구 안동(舊 安東), 자는 자앙(子昻), 호는 몽촌(夢村). 시호는 소의(昭懿).

2. 생애

1547년(명종 2) 사재감 정(司宰監正:정3품)을 지낸 아버지 김홍도(金弘度)와 어머니 한산 이씨 진사 이계백(李繼伯)[1]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567년( 선조 즉위년) 식년시 생원시에 2등 16위로 입격하고 1573년(선조 6) 알성시 문과에 병과 1위, 탐화랑(探花郞)으로 급제하였다.

선조 때 여러 관직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왕명을 받고 경상우도 관찰사(종2품)으로 부임해 경상우도 도내의 진주성 등 성 11채를 보수하는 등 전쟁 대비에 힘썼다.

그 뒤, 여러 차례 호조판서에 임명되어 활동을 이어나간다. 이후 김수는 조정에서 활동하며 전시의 재정 관리와 군량 확보에 주력했고 종전 후에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정1품)에 오르는 등 영예를 얻었다.

그러나 1613년(광해군 5), 손자 김비(金祕)가 옥사할 때 탄핵을 받고 삭직당하는 등 말년이 썩 좋지는 않았다.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재무 능력이 출중하고 청백리란 긍정적 평가를 받던 인물이다.

또한, 왜군에게 투항하여 순왜가 되었다는 의심받는 부산진 전투 정발 동래성 전투 송상현을 끝까지 변호하였고, 이는 훗날 두 사람이 명예회복에 성공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부정적 평가에서 언급된 곽재우와의 갈등도 애초에 지방토호가 개인 사병을 갖는 것에 병적으로 경계하던 조선에서는 군벌이 될 수 있는 의병에 경계하는 것은 당연지사인 것이다.[2]

3.2. 부정적 평가

전쟁대비를 하기 위해, 시험 난이도를 너무 높여서 시험에 탈락한 유생들도 성곽 수리와 군사훈련에 동원하여 당시 곽재우 등 지방 유림들과 백성들의 반발을 사게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다.

게다가.막상 전쟁이 터지자 한양까지 쭉 밀리면서 적병을 피하여 도망만 다녔다고 비판받기도 하였다. 또한 곽재우와의 불화까지 심해 눈총을 샀다.

게다가 처사가 조급하고 각박하여 도민들이 그를 싫어했으며, 파천 중이던 선조에게까지 이 사안이 보고되어 조정에서 그를 체직하거나 권한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상당했다고 한다.

4. 최종적 평가

행정, 재무 관료로서는 능력이 뛰어났으나, 전시 상황에 잘 대처하지 못하고 보신주의적이고 속 좁은 행태를 보이는 등 이중적인 면을 갖고 있는 인물이라 할만하다.

후방에서의 행정과 군수물자 관리하는 일에는 어울리는 인물이었지만 반대로 야전에서 작전을 짜고 군을 지휘하는 일에는 영 약했다.[3]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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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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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37년( 중종 32) 식년시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 [2] 실제로 의병 핑계로 민가와 관아를 약탈하던 자들이 처형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3] 애초에 김수는 무관이 아닌 문관이었다. 이는 동시대 인물인 김명원과 같은 케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