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김해 김씨 |
출생 | 1898년 3월 22일 |
경상북도
대구군
화현내면 설화동 (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설화리)[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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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22년 6월 10일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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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8년 3월 22일 경상북도 대구군 화현내면 설화동(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설화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달성군 수성면(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범어동으로 이주했다.그는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식민통치에 늘 불만과 반감을 갖고 있었으며 1919년 전후부터 조선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난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 기회를 살려 독립운동을 도모하겠다는 결의를 하게 되었다. 이에 각지를 돌아다니며 동지를 규합하기에 고심하던 중 마침 1920년 6월 경상북도 대구부 전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전동)에 있는 금구여관(金龜旅館)의 김한수(金漢洙)의 방에서 같은 여관에 투숙해 있던 장내주(張來周)와 우연히 이야기를 하다가 뜻이 통하게 되어 오랫동안 의논을 하였다.
그해 7월 30일 장내주와 오랜 협의 끝에 우국지사들에게 권유하여 독립운동결사대(獨立運動決死隊)를 조직하고 대구를 중심으로 독립군 자금을 모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각 단체와 협력할 것을 결의하였다. 김석주와 장내주는 스스로 상해 임시정부 파견원이라고 칭하고 표면적으로는 회사 설립을 가장하여 기생 출신의 이동옥(李東玉)이 운영하는 요릿집을 그 본거지로 삼았으며, 자신들은 요릿집에 찾아온 주객 행세를 하며 신분을 숨기고 비밀리에 논의를 하곤 했다. #
또 그해 8월 6일부터 8월 14일까지 대구부 경정1정목(현 대구광역시 중구 종로1가) 거주 이동옥을 비롯해 달성군 월배면(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진천동의 최상설(崔相卨)·곡물상을 운영하는 대구부 신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 거주 이을명(李乙明)·대구부 달성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거주 하영호(河榮浩)·대구부 시장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에 거주하는 견직공 김문재(金文在)·대구부 남성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 거주 김성욱(金聲郁) 등 9명을 이 단체에 가입시키고 조선독립운동에 종사하겠다는 서약서와 단원모집비 명목의 자금 50원을 받는 등 대구부 및 달성군· 고령군을 중심으로 단원모집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8월 15일 밤 일본 경찰의 대대적인 본거지 수색 끝에 단원들로부터 받은 서약서 5통이 발견 되어 체포되었으며, 8월 24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이로 인해 김석주는 당초 1920년 8월 30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의 예심에서는 불기소처분을 받았으나 곧 공판에 회부되었다. 이어 9월 1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19일 형집행정지로 출옥했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1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이듬해인 1922년 6월 10일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