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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尙鎔
1902년 9월 28일 ~ 1951년 6월 22일
1. 소개
1900년대 초에 태어난 일제강점기의 시인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 호는 월파(月波)이다.2. 일생
김상용은 1902년 9월 28일 경기도 연천군 남면 왕림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옮겨 졸업하였다. 대학교는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한 후 여러 시를 발표한 시인이다. 서정시 '무상' 등의 작품이 있다. 동아일보에 '그러나 거문고의 줄은 없고나'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게 된다. 이후 '대화', '포구', '마음의 조각'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에 열중하게 된다.그의 시가 가지고 있는 특징은 '나와 자연의 동일성'이다. 나와 자연의 관계에서는 어떠한 대립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그의 시에 반영되어 있다. 또한 '나와 자연의 화해'를 설파하며 '자연의 품에 안긴 삶'을 꿈꾸었다. 인위적인 것과 그것에 투영된 삶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자연과 더불어 살기를 동경하였다. 1939년, 시집 '망향(望響)'이 출간되었다. 그는 소설집인 '무궁화'도 남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표작인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허탈하면서 초탈한 듯한 '왜 사냐건 웃지요'란 구절은 지금도 사람들에게 자주 쓰이는 유행어이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 하에서 강원도지사로도 임명되었으나 며칠만에 사임하고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학무처장으로 일했다. 1946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 대학교에서 3년 동안 영문학을 연구하였다.
6.25 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피란갔지만, 1951년 6월 22일, 갑작스런 식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3. 작품
4. 관련 문서와 자료
한국어 위키백과 - 김상용 (시인)5. 흑역사
이런 유명한 시를 남긴 시인에게도 흑역사가 있다. 바로 그가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벌어진, 도둑 누명을 쓴 학생의 자살 사건이다. 이 사건이 자세히 다뤄진 글기숙사에 살면서 학교 청소 등의 일을 하며 고학하던 문모 양[1]이라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문모 양은 금전출납부를 관리하며 사생들의 돈을 맡아주는 일도 하게 되었다.
어느날 주모 양이 문 양에게 40원을 맡긴 후 20원을 찾아 썼다. 이후 주 양이 남은 20원을 찾아 쓰려고 문 양을 찾아갔는데, 금전출납부에는 주 양이 이미 나머지 20원도 찾아간 것으로 되어 있었다. 주 양은 문 양이 도둑이라며 펄펄 뛰었고, 문 양은 억울하다며 펄펄 뛰었다. 문 양이 사감 박은혜[2] 선생에게 불려갔다 올 때마다 학우들이 문 양을 보는 눈길은 싸늘해졌고, 문 양은 학우들로부터 철저히 따돌림을 받았다.
당시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학장이었던 김상용은 문 양을 다독이고 도둑 누명을 풀어주기는커녕 "네가 했다고 시인해라. 돈은 내가 채워주겠다."라는 말을 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문 양을 죽음으로 내모는 결과를 초래했다. 문 양은 가족과 학교, 학우들 등에게 보내는 유서 5통을 남긴 채, 1937년 1월에 학교 교정의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
이 사건은 당대 문단에서 엄청난 논란을 초래했다. 당대의 명 시인인 김상용이 교육자로서 제대로 된 처신을 못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는데 심지어는 춘원 이광수까지도 "김상용은 교육자로서 글러먹은 인간이다. 책임을 지고 교수직을 사임해야 할 것이다."라고 대놓고 신문에 비판글을 썼을 정도였다.
그러나 김상용은 이런 세간의 비난에도 아랑곳 않고, 태평양 전쟁으로 일제가 모든 학교에서 영문학 강의를 금하게 되는 1943년까지 계속 교수로 이화여자전문학교에 남아 있었다. 이런 걸로 보면 인성은 썩 좋은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2002년 발표된 친일반민족행위자 문학인 42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교육/학술 부문에 선정되었다. 1943년 《매일신보》에 발표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등 총 3편의 친일 작품을 썼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