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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김련(金鍊), 김치정(金致精) |
출생 | 1888년 4월 19일 |
평안도
개천군 중서면 신현리[1] (현 평안남도 개천시 용진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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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0년 6월 |
종교 | 개신교( 장로회)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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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1911년 신흥무관학교 1기로 졸업하고 압록강 연변의 5개 군에 산재하여 있는 독립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단 동지회를 조직하였으며 일경에 의해 3차례나 체포된 독립운동가. 의열단으로도 활동하였다.[2]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88년 4월 19일 평안도 개천군 중서면 신현리(현 평안남도 개천시 용진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평안남도 강계군(현 자강도 강계시)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어려서 장로교를 믿어 강계읍 남장대교회(南章坮敎會)에서 목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1년 신흥무관학교 1기를 특기생으로 졸업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19년에 평안북도 강계, 자성, 후창, 초산, 위원 등 5개 군에서 독립단의 국내지단 조직의 임무를 맡고 입국하였다. 그는 강계에서 독립단동지회를 조직하였고 군자금을 모금하며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그 후 일경의 감시가 그를 조여오자 다시 만주로 돌아가게 되었다. 1921년 재입국한 그는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이어가다가 일제에 의해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풀려난 그는 다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1928년에 또 한 번 체포되고 옥고를 치렀다.[3]
8.15 광복 후 1948년 12월 7일 육군사관학교 8기 특별2반으로 입교했는데, 아들 김창영이 정규 8기로 입교하여 부자 사관후보생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 1949년 1월 14일 임관하여 1950년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도중에 실종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3. 여담
- 아들 김창영, 김지영, 외손자 배성일, 손자 김인광, 증손자 배효상, 증손자 김세환까지 4대째 대한민국 육군과 미합중국 해병대, 미합중국 해군에 복무하고 있는 군인 집안이다. 첫째 아들 김창영은 육군사관학교를 8기로 졸업하고 육군 중령으로 예편했으며, 둘째 아들 김지영은 포병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령으로 예편하였음. 또한 외손자 배성일(장녀 김예영 아들)은 육군3사관학교 15기로 임관하여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으며 그 아들 배효상은 학군 43기로 임관하여 육군 중위로 예편하였음. 손자 김인광은 1983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합중국 해병대에 입대하여 걸프 전쟁에 전차 상륙부대 훈련 조교로 참전한 후 중사로 전역했다. 증손자 김세환은 2012년 미국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