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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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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어린 시절3. 1993년~1996년: 대학가요제 입상 및 데뷔4. 1997년: 전람회 해체, 그리고 카니발 결성5. 1998년~2002년: 정규 1집~3집 발매 및 솔로 활동6. 2003년~2007년: 졸업, 4집, 그리고 방송 활동7. 2008년: 정규 5집 <Monologue>8. 2010년: 베란다 프로젝트 활동9. 2011년: EP < KimdongrYULE> 발매 및 솔로 활동 계속10. 2014년: 정규 6집 < 동행> 발매 및 토이 객원보컬 참여11. 2015년: 세 번째 라이브 앨범 발매12. 2018년: EP < 답장> 발매13. 2018년: 디지털 싱글 <그럴 수밖에> 발표14. 2018년: 디지털 싱글 <노래> 발표15. 2018년: 디지털 싱글 <동화> 발표16. 2019년: 디지털 싱글 <여름의 끝자락> 발표17. 2019년: 리패키지 앨범 <답장+>18. 2020년: 네 번째 라이브 앨범 발매19. 2021년 : <답장+ 리마스터드(remastered)> 발매20. 2023년: 디지털 싱글 <황금가면> 발표21. 2024년: 동고동락했던 동료를 '떠나보내다'

1. 개요

대한민국의 가수 김동률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

2. 어린 시절

1974년 3월 15일 서울특별시 성동구(현 강남구)에서 치과의사 부부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이후 역삼초등학교와 단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를 거쳐 휘문고등학교(85회)를 졸업하고 1993년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1]에 입학했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데 부친의 직업은 치과의사이며 저소득 노인 대상으로 무료 진료도 하고, 본인이 가수 김동률의 아버지로 밝혀지는 것을 무척 꺼린다고 전해진다. (관련 기사에 유명가수 K의 아버지라고만 나왔다.) 김동률이 비교적 괜찮은 학업 성적에도 불구하고 음악으로 먹고 살겠다고 하니 "음악이 이제껏 너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었을 텐데, 그걸 직업으로 하면 더 이상 위안이 되지 않는 것이 될 텐데 괜찮겠냐?"라고 조용히 물으셨다고 한다. 덕업일치의 어려움을 고려한 부친의 조언은 어른으로서의 통찰과 동시에 아드님을 인격적으로 대하신 모습을 엿보게 한다. 지금도 그런 사례가 적지 않지만 만약 이때 강압적으로 묻지마 의치대 진학을 권하셨다면...

집안 분위기가 학구적인 데다가 중고교 시절 공부를 위해 다른 것들을 하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피아노 치는 것만 허락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김동률의 유일한 취미는 피아노 연습이었는데, 다른 애들이 오락실 다니고 만화방 다닐 때 피아노 가지고 놀았으니 음악에 대한 이해가 빠를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휘문의 김동률" 하면 공부 잘 하고 음악에 아주 뛰어난 학생으로 지역에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2] 한 마디로 될성부른 나무.

초등학교 때 처음 작곡을 했다고 한다. 악보를 100장 정도 만들어 500원 정도에 팔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소장자들을 찾아 김동률이 100만원 주고 다시 산다고. 졸업식 때 흔히 불리는 전람회의 "졸업"은 무려 중학교 3학년 때 완성한 곡이라고 한다.

3. 1993년~1996년: 대학가요제 입상 및 데뷔

대학 입학 직후 서동욱과 만든 그룹인 ' 전람회'로 1993년도 MBC 대학가요제에 참가했는데, 여기서 대상과 특별상을 모두 수상했다. 당시 본 무대 이전에 팀별로 리허설을 한 번씩 했었는데, 전람회의 곡을 들은 다른 팀들이 "올해 대상 타기는 글렀구나."라고 생각했다는 일화가 있다.[3] 특히 MC를 봤던 이수만 이문세가 전람회의 공연이 마치 콘서트 같았다며 극찬을 했다. 또한 특별상이란 건 원래 없었는데 심사위원들이 대상 하나만 줄 수 없다며 자신들의 명예가 달린 일이라며 심사위원 특별상을 급히 만들어 상을 줬다. 심사위원 특별상을 줄 때 MC인 이수만이 특별상 줬다고 대상 안 주는 거 아니라고 거듭 강조한다. 또 서동욱은 값싼 콘트라베이스를 가지고 연주했기 때문에 연주가 끝난 뒤 줄을 풀고 있었다고 한다. 근데 그걸 보고 있던 심사위원 중 한명이 너희 앙코르 곡 연주해야 되니까 줄 풀지 말라고 해서 서동욱은 이미 대상임을 알고 있었단다. 훗날 김동률은 친구인 서동욱이 대상 발표 후 기뻐하는 티가 너무 안 나서 친구의 쿨함에 감탄까지 했었다고 한다. 김동률은 라디오에서 대학가요제 때 부를 곡으로 다른 곡도 고려 했었다고 하는데 바로 전람회 1집의 '여행'이란 곡이다. 본인은 이 곡을 했어도 대상을 탔을 거라며 자화자찬한다.[4]

김동률은 사실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가지고 놀긴 했으나 오로지 클래식만 다뤘기 때문에 대중 가수로서의 자신감은 크게 없었다고 하는데, 대학가요제 대상이 그에게는 대중 가수로 성공할 수 있다는 일종의 자신감을 부여한 셈이다. 요즘 같은 기획사 시스템이나 오디션 시스템이 전무했던 당시의 대학가요제는 기성 음악계에 기존에 없었던 형태의 충격을 주는 역할을 해왔는데, 굳이 따지면 대학가요제 대상 출신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아티스트로 인정받은 것은 사실상 김동률이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듬해인 1994년에 대영AV[5]에서 김형석 신해철이 프로듀서를 맡아 전람회 1집 < EXHIBITION>을 내놓았고[6], 앨범 타이틀곡인 '기억의 습작' 이 첫 히트곡이 되었다. 1994~96년에는 방위병으로 근무했다.[7] 당시 감기에 심하게 걸려서 지하철 안에서 연신 코를 훌쩍이고 있었는데, 맞은 편에 앉아있던 팬이 '그때 휴지를 드리고 싶었는데 용기를 못 내서 죄송하다'는 편지를 보냈다나.

전역 후 2집 ' EXHIBITION 2'를 발표했다. 이 앨범에서는 ' 취중진담'이라는 두 번째 히트곡이 나왔지만, 동시에 '유서'라는 곡이 히사이시 조 작곡의 ' 천공의 성 라퓨타' OST에 나오는 음악과 비슷하다고 해서 표절 논란이 일어났다. 지금처럼 일본 음악을 쉽게 들을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파장은 그리 큰 편이 아니었지만, 한국 대중음악계의 '왜색' 문제를 거론할 때면 지금도 종종 언급되는 에피소드다. '유서'의 후렴(1분 20초~1분50초)과 라퓨타의 반복되는 메인테마와 가락이 상당 부분 일치한다.

4. 1997년: 전람회 해체, 그리고 카니발 결성

전람회 활동은 멤버인 김동률과 서동욱 중 서동욱이 전업 음악인의 길보다는 공부에 전념하려는 의지를 보였고, 이에 따라 전람회는 1997년 1월 전람회 3집 '졸업'을 발표한 뒤 2월까지 마지막 콘서트를 연 뒤 해체되었다. 해체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루머가 있었는데, 2008년 김동률 5집 발표 즈음의 가수 인터뷰에서 전람회를 해체했던 이유에 대해 밝히면서, "나는 음악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서동욱은 할 수 있는 게 매우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이야기했다. 해체 이후에도 서동욱과 김동률은 간간히 만났으며 2001년에 발표된 김동률 3집 앨범에도 참여했다. 2008년 모놀로그 콘서트 때도 서동욱이 잠깐 짬을 내어 찾아왔는데, 서동욱은 공연만 보고 바로 돌아가야 해서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왔지만, 기사가 엄청 나는 바람에 가족들에게 들켰다. 어머니께서 싸늘한 목소리로 전화하셔서 "너 한국에 있니?"라고 하셨다나. 자세한 내용은 서동욱(기업인) 항목 참조. 김동률 5집 속지를 보면 서동욱에게 전하는 전람회 20주년 앨범 내자는 말이 있는데, 전람회 데뷔 20주년인 2014년에 발매된 김동률 6집에는 아쉽게도 서동욱이 참여하지 않았다.

전람회 해체 후 약 반년 동안 KBS 2FM의 라디오 프로그램 'KBS 김동률의 FM 인기가요' 를 진행했다. 마지막 방송은 1997년 11월 2일이며, '통학 버스'에 비유한 마지막 방송 엔딩은 지금도 인터넷에 많이 검색될 정도다.[8]

1997년 말에는 이적(본명 이동준)과 함께 프로젝트 듀오인 ' 카니발'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카니발 1집 Carnival의 유명한 곡이라 한다면, 인순이가 나중에 리메이크해서 더 유명해진 ' 거위의 꿈'이 있다. ' 그땐 그랬지'도 유명하며 방송 활동이 없었음에도 가요 차트에서 중위권에 오래 머물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 비누인형'은 중학교 교과서에도 나왔다고 한다.[9]

5. 1998년~2002년: 정규 1집~3집 발매 및 솔로 활동

1998년 '망각의 그림자(The Shadow of Forgetfulness)' 라는 타이틀로 첫 솔로 앨범을 발표했고, 그 해 12월 24~26일에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첫 솔로 콘서트를 개최했다. 한 때 이 콘서트 내용을 무단 녹음한 파일이 넷상에 돌아다녔는데, 가수 본인이 속상한 마음을 표현한 적이 있다. 지금은 다행히 소멸된 듯 하다. 이 앨범에서는 기존의 전람회 스타일에서 김동률 본인의 음악적 색깔이 좀 더 강하게 드러나는데, "Cosmos" 같은 곡은 윤상의 영향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듬해 미국의 명문 버클리 음악대학에 입학해 작곡, 영화음악 작곡을 복수전공했다.[10]

버클리 음악대학에 입학 후 한동안은 상당히 헤맸다고 한다. 본인 나름대로는 음악에 어느 정도는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같이 공부하는 동기생 중에 고수가 너무 많아 좌절했다고.[11] 특히 재즈 피아노 전공의 우에하라 히로미(上原ひろみ)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괴물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히로미는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4~5분 내의 곡 내에서 도입과 전개, 절정, 결말을 다 포함시키는 네가 더 괴물처럼 보인다"라고 답하여 김동률은 자신감을 회복했다고. 지금도 김동률과 히로미는 막역한 관계인데, 히로미의 결혼식에도 초대되었다. 일본에선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청첩장을 보내기 때문에, 친한 건 분명한 듯. 김동률은 히로미가 내한할 때마다 공연을 꼬박꼬박 관람한다. 히로미가 최근 내한했을 때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동률과는 무슨 사이냐는 질문을 받자 음악적 동반자라고 답하면서도, "제발 김동률과 남녀관계 아니라고 써주세요~ 테러 당하기 싫어요~"라고 하기도.

버클리 음악대학에 재학 중인 2000년 2집 '희망'을 발표했고, 졸업 직전에 3집 '귀향'을 발표했다. 2집 앨범의 경우, 본인 말로는 실패작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 듯. 콘서트 때 1집 수록곡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반면 2집 수록곡은 '희망' 정도만 나오는 걸 보면, 본인이 그다지 애착을 갖는 앨범은 아닌 듯 하다. 확실히 다른 앨범과 비교하면 음질이 떨어지는 문제는 있다. 하지만 '2년만에' 도 그렇고, 마지막 곡인 '희망'도 그렇고, '염원'같은 곡도 팬들 사이에서는 무척 사랑받는 곡이니, 너무 흑역사로 취급할 필요는 없을 듯.

이들 앨범에서는 버클리 음악대학 재학 중 만난 편곡자 케빈 캐스카 [12][13]등의 조력으로 좀 더 스케일이 큰 형태의 곡들이 많이 담겼고, 영국의 대표적 오케스트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도 기용되어 화제가 되었다. 김동률은 자신이 음반 작업을 할 때 음표를 전부 컴퓨터로 찍어서 완벽한 악보를 만들어 연주를 요청하는 자신의 스타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런던 필하모닉과 같은 전문가들과 작업할 때는 시간이 곧 돈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쪽이 오히려 비용과 품이 덜 든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워낙 실력이 좋아서, 악보만 정확히 찍어주면 아주 짧은 시간에 작업이 끝난다고 한다.

하지만 2집의 관현악 연주곡인 '윤회' 같은 경우에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스타일에 너무 경도되었다는 비판 여론도 있었다. '한 여름밤의 꿈'이나 '악몽' 같은 경우 전반적으로 뮤지컬 풍의 편성이 느껴지고, '염원'에서는 뱃노래와 사물놀이를 활용하기도 했다. 마지막 곡인 '희망'의 서정성은 유명하다.

2001년에 발표한 3집 '귀향'의 타이틀곡 '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는 크게 인기를 끌었다.[14] 이 노래로 MBC 생방송 음악캠프에서 커리어 역사상 처음으로 지상파 순위 프로그램 1위를 차지했다. 마지막 부분의 후렴구는 아모레 미오(Amore Mio)이며 이탈리아어로 "나의 사랑"이라는 의미지만 몬데그린으로 아 홀애비요, 후회들로, 노랠빌려, 부랄이여 등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6. 2003년~2007년: 졸업, 4집, 그리고 방송 활동

2003년에 학사 학위를 따서 졸업했고, 졸업 당시 보도에는 김동률이 최우등 졸업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후에 유희열의 라디오 천국에서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 김동률이 최우등 졸업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침도 뱉었다는 유희열에게 학점이 좋았던 것은 사실이나 최우등 졸업은 와전이 된 얘기라고 얘기했다. 참고로, 이 방송에서 김동률은 자신의 성적은 A가 아니면 F라며 C를 받는 법을 모르겠다고 해 유희열에게 'shut up!'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귀국 이듬해인 2004년 4집 ' 토로' 를 발표했다. 같은 해 8월에 두 번째 솔로 콘서트를 서울과 부산에서 개최했고, 이 중 서울 공연의 실황을 편집한 더블 라이브 앨범인 ' 招待(초대)' 가 2005년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CD만 들어있는 통상판과 DVD 포함 하드커버 장정 형태인 한정판 두 가지 형태로 나왔는데 둘 다 지금은 절판 상태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는 MBC 텔레비전의 음악 프로그램인 '김동률의 For You'나 KBS 2FM의 '김동률의 뮤직 아일랜드'[15] 같은 방송 출연을 위주로 활동했고, 방송 활동 정리 후 베스트 앨범인 '감사' 를 발표했다. 이 앨범 발매 당시, 베스트 앨범을 발매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밝혀, 발매와 관련된 어른의 사정이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이 앨범은 전람회 1집부터 솔로 4집까지의 곡들을 정리한 더블 앨범이며 1번 CD에는 전람회 시절의 음악이, 2번 CD에는 솔로 시절의 음악이 수록되어 있다. 1번 시디 1번 트랙에는 특별히 새로 작곡해 녹음한 '감사'가 수록되었는데 이 곡으로 제9회 KBS 바른언어상을 수상했다.

7. 2008년: 정규 5집 <Monologue>

솔로 5집 이래 소속사는 뮤직팜으로, 이적, 체리필터 등과 한솥밥을 먹고 있다. 이상순도 한때 같은 소속사에 있었다.

2008년 1월 25일에 5집인 'Monologue' 를 발표하면서 음악 활동을 재개했는데, 13만장을 판매하여 그 해 나온 가요 앨범 중 최다 판매량을 기록[16]한 앨범으로도 꼽혔다. 이 중 <출발>은 1박 2일을 포함한 많은 여행 프로그램에서 많이 틀어줄 만큼 인기가 높았다.

4~5월 사이에 고양과 성남에서 'Prologue I/II', 서울에서 'Epilogue' 라는 제목으로 세 번째 콘서트를 개최했으며, 2004년 초대 콘서트와 마찬가지로 2008 콘서트 역시 CD와 DVD가 나온다는 루머가 있었다. 김동률은 당시 라디오에 출연하여 "녹음은 해놨는데 잘 모르겠어요"라고 발언. 결국 2009년 5월에 트리플 CD 앨범으로 나왔다. 이전 라이브 앨범과 달리 DVD는 나오지 않는데, 김동률 본인은 이미 초대 콘서트 앨범 발매 당시 "초대 콘서트 DVD 만들다가 죽을 뻔 해서 앞으로 DVD는 절대 안만들 거예요"라고 밝힌 바 있다.

카니발 10주년을 맞이하여 2008년 12월의 콘서트를 열었으며, 2009년 10월에는 앵콜 형식으로 솔로 콘서트인 'Prologue III' 를 서울에서 다시 개최했다.

8. 2010년: 베란다 프로젝트 활동

김동률은 2002년에 사진 동호회에서 그룹 롤러코스터의 멤버 이상순을 알게 되었다. 2009년 모놀로그 앵콜공연까지 마친 김동률은, 친구 이상순이 음악공부를 하고 있는 네덜란드로 여행을 떠난다. 사람들은 네덜란드 다녀오겠다는 김동률의 글을 보고 그냥 놀러갔다고 생각했고, 김동률 본인도 그냥 편하게 놀러간 거였으나, 그냥 녹음기 틀어놓고 이상순과 네덜란드 골방에서 막 생각나는대로 노래를 부르다, 이거 음반으로 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베란다에서 기타치고 노래하다 프로젝트 그룹 '베란다 프로젝트'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김동률이 먼저 한국으로 들어와 음반 작업을 시작하고, 이상순과 앨범을 완성하여 2010년 5월 18일에 음반이 출시되었다. 앨범 타이틀은 'Day off'. 발매 직후 실시간 차트에서 2위를 기록했으며 당시 원더걸스와 엠블랙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고 한다. # 8월 집계에서는 2만장 가량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2010년 발매 앨범 중 판매순위에서는 12위다.

베란다 프로젝트의 향후 구상에 대해서는 '그냥 잘 모르겠다'는 것이 두 사람의 공통된 의견. 재미있게 노는 것처럼 같이 작업한 것이라 미래에 대해서도 너무 깊게 고민하지는 않는 듯 하다. 다만 김동률은 베란다 프로젝트 작업을 하면서 전람회 시절과 카니발 시절이 많이 떠올랐다고. 함께 하니까 좋구나 하는 걸 느꼈다고 한다.

9. 2011년: EP < KimdongrYULE> 발매 및 솔로 활동 계속

2011년 6월 27일[17], 유희열의 라디오천국에서 정재형 유희열에게 디스를 당했다. 노래부를때 입 크게 벌려서 싫고, 쓸데없이 가사로 까이고, 이 날 방송의 백미는 청취자와 유희열이 한 몸이 되어 김동률을 깐 것.
청취자 : 김동률은 이빨이 너무 커요.
유희열 : 0000번님 선물을 챙겨드리겠습니다.[18]

2011년 7월 20일 이효리와의 열애설도 아닌 '결혼설'이 터졌다. 당연히 양측 다 부정. 자신도 재미있다고 생각했는지 이 사건 이후로 트위터에서 이효리를 '자기'라고 불렀다. 시기 상으로 볼 때 베란다 프로젝트로 이상순과 함께 하던 시기와 한창 이상순과 이효리의 열애 시기가 겹치는데, 이상순을 만나기 위해 베란다 프로젝트의 활동 영역에 자주 방문하던 이효리를 보고 연애 대상을 이상순이 아닌 김동률로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만 해도 이상순은 아는 사람만 아는 뮤지션이었으니까. 이후 라디오스타 200회 특집에 출연한 이적은 해당 루머가 김동률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했으며 옆에서 듣던 정재형은 물개박수를 쳤고, 존박은 웃다가 숨이 넘어갈 뻔했다.

2011년 11월 15일에 EP ' KimdongrYULE'[19]을 냈고, 12월 24~26일에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발매 기념 콘서트를 개최했다. 본 EP 앨범은 오랜만에 여성가수와의 듀엣곡('새로운 시작')이 포함되었다. 이 곡은 원래 듀엣을 생각하고 만든 노래는 아니라서 먼저 김동률 솔로곡으로 녹음을 하고, 너무 밋밋한 느낌이 들어서 듀엣을 할 여가수가 누가 없을까 하다가 안테나뮤직에 소속된 박새별에게 듀엣을 부탁했다. 참고로 김동률과 이적은 2010년 안테나뮤직에서 개최한 대실망쇼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여 박새별의 노래를 듣고는, 저렇게 훌륭한 노래실력을 가지고 있는 가수가 안테나뮤직에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그날 나온 정재형, 유희열, 루시드폴, 페퍼톤스를 한 번에 묶어서 깐 적이 있다. 박새별은 김동률이 부르니까 무작정 가서 시키는대로 녹음을 했는데, 김동률은 박새별에게 별다른 언질 없이 솔로버전과 듀엣버전 중에 고민을 하다가 듀엣버전을 앨범에 넣었고, 박새별은 자기 목소리가 김동률 앨범에 들어갔다는 것을 신문을 보고 알았다. 이에 대해 김동률은 크리스마스 콘서트에서 "제가 정말 나쁜 놈이에요"라며 스스로를 디스했다. 그리고 이 콘서트에서 박새별은 듀엣을 하러 나와 심하게 떠는 바람에 무대를 혼자 힘으로 대차게 말아먹었고 김동률은 무대 위에서 박새별을 갈궜다.

앨범을 낸 11월 15일 당일에 성시경 FM 음악도시에 출연했다.[20] 종전 유희열 정재형이 디스한 것의 반격 차원에서인지 성시경과 함께 유희열을 함께 깠다.
청취자: 조무래기 김동률에게 가래요정 정재형과 나부랭이 유희열이란?
성시경: 두 분에 대해 일자평으로 하신다면?
김동률: 안테나 것들?
성시경: 정동인 씨[21]가 욱하시겠는데요.

당시 음악도시 시민들 사이에서는 감미로운 목소리가 양 쪽에서 들렸다고 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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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한솥밥을 먹게 된 존박과 같이 찍은 사진이 화제가 된 바 있다. 이 때 이후로 김동률이 몇 번 존박의 노래를 작곡하는 등 교류가 있었는데, 서로가 만나기 전 존박은 김동률이 너무 무서웠고, 김동률은 미국에서 자란 존박이 잘 따라올까 걱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작업해보니 너무 잘 맞았고, 김동률은 존박을 반듯하게 자란 청년이라고 극찬했다.

10. 2014년: 정규 6집 < 동행> 발매 및 토이 객원보컬 참여

이 해는 김동률 데뷔 20주년이었다.[22]

2014년 10월 1일 3년 만에 정규 앨범인 6집 '동행'을 발표하여, 각종 음원 사이트에서 1위를 달렸다. 11월 1일 부산 공연을 시작으로 6집 앨범 발매 기념으로 전국 투어 콘서트 '동행'을 개최한다.[23] 타이틀곡 '그게 나야'는 10월 10일자 뮤직뱅크에서 1위 후보에 올랐으며 에일리의 '손대지마'에 아쉽게 밀렸지만, 10월 12일자 SBS 인기가요에서 12년 만에 지상파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여세를 몰아 10월 17일자 뮤직뱅크에서는 지난주에 고배를 마시게 한 에일리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아쉽게도 직접 출연은 없었다.

인기가요와 뮤직뱅크 1위 이후 DC인사이드 김동률 갤러리 갤러들이 1위 가수에게 조공을 바쳤다. 이후 그는 자신의 SNS를 통해 뮤직뱅크 1위 트로피와 조공 받은 것을 인증했다.

2014년 11월 18일 발매된 토이(유희열) 7집 < Da Capo>에 객원보컬로 참여했다. 곡은 "너의 바다에 머무네". 성시경이 보컬을 맡은 타이틀곡 "세 사람", 이적이 맡은 "Reset" 다음으로 음원 차트 상위권을 쓸고 있다. 김동률과 유희열이 꽤 친함에도 이번 토이 앨범 참여는 처음인 셈. 대신 곡이 평소의 김동률 곡과 달리 미묘하게 높다. 참고로 해당 곡은 유희열이 가족들과 바다에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갔을 때 썼던 곡이라고.

11. 2015년: 세 번째 라이브 앨범 발매

8월 6일, 2012년 <감사> 콘서트와 2014년 동행 콘서트에서 불렀던 곡을 묶어 라이브 앨범 <KIMDONGRYUL LIVE:2012 감사/2014 동행>을 발매했다. 2004년 < 招待> 콘서트, 2009년 < 2008 Concert, Monologue> 이후 세 번째 라이브 앨범인 셈. 앨범 표지가 상당히 독특한 게 특징.

12. 2018년: EP < 답장> 발매

13. 2018년: 디지털 싱글 <그럴 수밖에> 발표

김동률 가수 역사상 첫 디지털 싱글이다.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리 대단할 만한 이유는 없다. 김동률 본인이 직접 관리하는 페이스북에서 속마음을 들어볼 수 있는데 원래 계획은 얼마 전에 발매된 < 답장> 앨범에 수록된 노래들과 앞으로 싱글로 여러 차례 발표할 노래들을 정규 앨범으로 묶어 발표할 생각이었나보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앨범 발표가 늦어질 것 같아서 완성된 곡들을 미니 앨범으로 먼저 공개하고 남은 곡들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싱글로 내겠다고 한다. 사실 팬들 입장에선 미니 앨범 외에도 곡들이 여럿 있다는 소식에 반가울 뿐이다. 더욱 반가운 소식은 싱글들을 모두 발표하고서 연말이나 내년 초에 공연을 계획중이라는 소식이다.

14. 2018년: 디지털 싱글 <노래> 발표

김동률이 3월 페이스북에 남겼던 말처럼 계절이 바뀌자 새 노래를 들고 팬들을 찾아왔다. 가을 날씨에 어울리며 동반자, 고독한 항해, 귀향, 잔향과 같은 느낌의 노래라는 의견이 뒤를 이었다.

15. 2018년: 디지털 싱글 <동화> 발표

겨울이 되고 역시 새 노래를 발표했다. 그것도 무려 아이유와의 듀엣곡이다. 둘의 듀엣곡이라는 소식에 발표 전부터 뜨거운 반응이었고 당연하게도 발표하자마자 모든 음원차트 1위를 하게 된다.이 싱글의 발매 날짜는 '2018년 김동률 콘서트: 답장' 공연 첫날인 12월 7일 이었기에 콘서트의 게스트가 무려 아이유 일거다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냥 소문이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제곡이나[24] 아이유 Last Fantasy에 실렸던 <Last Fantasy>처럼 따뜻한 분위기의 곡이라는 반응이다. 또한 김동률의 곡인 만큼 오케스트레이션이 더욱 빛을 발한다. 앨범 커버를 보면 일년 중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절기인 대설에 발표한 건 우연이 아닌 듯하다.

16. 2019년: 디지털 싱글 <여름의 끝자락> 발표

2019년 8월 20일 오후 6시에 발표한 새 싱글. 작년 콘서트에서 과연 자신이 디지털 싱글로 음악을 발표하는 게 옳은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한 듯한 얘기를 했었다. 하지만 디지털 싱글로 음악을 내면 상대적으로 덜 주목 받을 수도 있었을 곡도 많이들 듣게 되어 좋다고도 말했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도 디지털 싱글로 곡 발표를 하였다. 상당히 이례적으로 곡 발표 전에 악보를 공개하면서 팬들의 커버가 쏟아지기도 했다. 발표 전에는 곡 분위기가 4집의 잔향의 느낌이 들어 기대감을 모았지만 발표된 곡을 들어보면 피아노 반주로만 편곡이 이루어져 더욱 담백한 느낌을 준다. 피아노 반주로는 4집의 River를 연주했던 피아니스트 김정원이 도왔다.

17. 2019년: 리패키지 앨범 <답장+>

2019년 8월 27일 페이스북에 ‘답장’ 미니 앨범 수록곡들과 이후 발매 된 음원 4곡이 합쳐진 <답장+>를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김동률은 리패키지 형태로 앨범을 재발매를 하는 걸 선호하지 않아서 발매 계획은 없었으나 팬들이 꾸준히 요청을 했고, 무엇보다 김동률 본인이 이번 곡들을 하나의 온전한 형태의 앨범으로 갖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버려서 결정을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답장+> CD 발매일은 9월 5일이며 더불어 LP로 소량제작한다 밝혔고. 드디어 9월 19일 LP 예약판매 안내 공지가 떴다. 하지만 너무 소량으로 찍어냈는지 예스24는 공지가 뜨자마자 1~2분 만에 매진이 될 정도로 정말 적은 양을 발매를 했다. 김동률 갠소용

18. 2020년: 네 번째 라이브 앨범 발매

2020년 9월 28일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게시글에 따르면,
2019년에 공연했던 '오래된 노래' 공연의 실황 녹음 앨범을 9월 30일에 발매한다고 한다. 2015년 세 번째 라이브 앨범을 발매할 때 더 이상은 라이브 앨범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었다.. 물론, 팬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실제로 그 동안 여러차례 콘서트가 있었으나, 공연 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은 나오지 않았음에 팬들은 크게 아쉬워 하는 분위기였다. 무엇보다 가수 본인이 더 이상 TV에 출연하지 않으므로 사실상 SNS를 제외하면 더 이상 소식을 들을 수 없었으므로, 팬들이 점점 걱정하기 시작하던 차였다. 그런데 갑자기 깜짝 선물처럼 라이브 앨범을 발매한다는 소식이 떴다. 당연히 팬덤은 쌍수를 들고 기뻐하는 중
드디어 2020년 9월 30일 앨범이 발표되었고 판매량 예측 및 조기매진 사태로 배송지연이 속출 하였다.
라이브 콘서트 앨범이라 믿기지 않을 음향 상태와 어덜트 취중진담 이라 불리는 편곡 등으로 높은 완성도를 들려주는 앨범이다.

2020년 11월 25일 LP 발매 소식이 전해졌다. 티켓팅을 방불케하는 빠른 속도로 매진되어 LP를 구하지 못한 팬들이 속출할 정도로 엄청난 경쟁률을 보였다. 정식 발매 날짜인 12월 1일 이전에 이미 여러 중고판매 사이트나 리셀러 사이트에 프리미엄이 붙은 가격으로 올라오면서 팬들의 분노와 원성을 샀고, 소속사에 추가발매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2020년 12월 8일, 김동률이 직접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장문의 글을 작성하면서 LP 추가발매를 약속했다. '오래된 노래' 라이브 앨범 LP 추가발매 뿐 아니라 기존에 발매되어 이미 높은 가격대를 형성하고있던 '동행' 앨범 LP나 '답장+' 앨범의 LP 재발매 계획도 있다고 밝혔다.

19. 2021년 : <답장+ 리마스터드(remastered)> 발매

2019년 발매한 '답장+'를 전곡 리마스터링한 '답장+ 리마스터드'를 2021년 6월 1일 발매했다. 이 앨범에는 2018년 1월 발표된 '답장'의 수록곡 5곡과 이후 발표된 싱글 연작 '그럴 수 밖에', '노래', '동화', '여름의 끝자락'이 담겼다. LP와 CD의 합본 형태로 발매되었다. #

20. 2023년: 디지털 싱글 <황금가면> 발표

2023년 5월 11일에 발표한 새 싱글. 기존 김동률 스타일의 발라드와는 궤를 달리하는 곡이다. 김동률이 발표한 곡 중에서는 BPM이 가장 빠른 곡이기도 하며 늘 냈던 흔한 사랑과 이별이 아닌, 현실을 부딪쳐 어린 시절 TV에 나오는 영웅을 보던 낭만을 잊은 사람이 초심으로 회귀하는 내용의 팝 록 노래다.

싱글 발표와 함께 게시된 김동률의 페이스북/인스타그램 작성글에 따르면, 펜데믹 시기의 영향으로 무엇을 소재로 노래를 써야할 지 모르는 것과 혹여 무엇을 노래해도 사치스럽게 느껴지지 않을까하는 노파심으로 인해 뮤지션으로서의 의욕을 상실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약 2년 동안 음악을 좋아하는 리스너로 돌아가, 다양한 음악을 접하고, 또 할까 말까 하던 운동도 꾸준히 하고, 클래식 피아노 레슨도 받으며 보냈다고 한다. 그러다 다시 마음을 잡고 곡을 완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동률 본인에게는 황금가면은 펜데믹을 닫는 곡이라며 음악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고 한다.[25]

뮤직비디오에는 배우 조우진이 직접 안무를 펼치며 열연하였다. 빠르고 경쾌한 곡과 뮤지컬과 흡사한 뮤직비디오가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평이 대다수.

21. 2024년: 동고동락했던 동료를 '떠나보내다'

몇 번을 지우고 지우다가 겨우 쓴다.



떠나보내다

12월 18일, 휘문고, 연세대, 군악대 동기이자 전람회 멤버였던 서동욱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그의 발인식까지 마친 12월 21일, 위의 추모글을 남겼다.


[1] 타 대학의 건축학과와 건축공학과가 합쳐진 형태다. 세부전공으로 건축학 전공과 건축공학 전공이 나뉜다. 여담이지만 김동률이 대학 진학하던 시기를 포함해 대략 1997년 외환 위기 직전까지 건축공학과는 공과대학 진학자들의 선호학과 선두를 다투었다. 의대 치대 다음 순위 정도의 탑과였다는 얘기. [2] 수학여행 때 학년 대표로 노래 부르는 건 기본으로 거의 교내 가수로 대우받았다고 한다. 휘문고 - 연세대 동기 서장훈도 수학여행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고 "진짜 노래 잘 한다."며 감동했다고. [3] 비슷한 일화로 1988년 대학가요제 당시 마지막으로 나온 무한궤도의 곡 그대에게가 도입부를 하는 순간부터 참가자와 심사위원들은 모두 "아 얘네가 1등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이후 무한궤도 신해철이 전람회의 소속사 선배이자 1집 프로듀싱을 담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4] 전람회 1집에 있는 원곡에는 인트로 격으로 서동욱과 김동률이 곡에 대해 신나게 얘기하는 소리가 녹음되어 있는데 (중간과 마지막에도 나온다), 스무살 젊은이들답게 장난스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저음으로 유명한 김동률이 하이피치로 낄낄대는 드문 음성까지 포함. 여기서 "야, 잔다. 형ㅋㅋㅋ"할 때 형은 프로듀서를 맡은 신해철. [5] 당시 신해철 윤종신이 소속사 선배 뮤지션이었다. [6] 이때 신해철이 했던 말은 다시 하라는 말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미 완성된 아티스트라서 딱히 첨언할 게 없었다고... '90년대를 빛낸 명반 50'(2006)에서 신해철 인터뷰 중. [7] 경기도 소재 모사단 군악대 알토색소폰 연주병이자 행정병으로 만기전역하였다. [8] 자리라는 건 어차피 통학버스 빈 좌석처럼 개인의 자리는 될 수 없어서요. 내릴 때가 됐다 싶으면 서 있는 누군가에게 양보를 해야하는 거죠. 아무리 자리가 욕심이 난다고 해서,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치면서까지 앉아 있다라는 건 생각할수록 무의미한 이기심이라는 얘깁니다. 졸면서 가든, 놀면서 가든, 어차피 종점까지 간다고 해도요. 다음날이면 다시 남의 자리가 되어 있을게 뻔한데, 굳이 사사로운 자리 욕심땜에 눈총을 받아가면서까지 시간 낭비를 한다라는 건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란 생각도 듭니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동안 되도록 이면 여러분이 무겁게 들고 있는 가방을 다 받아 들이려고 했는데 그게 어느 정도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이제 맡았던 가방들은 다 나눠 드리겠습니다. 혼자 무겁게 들고 서있지 마시고요. 다음에 앉는 분한테도 조심조심 맡길 수 있었으면 하네요 [9] 해당 노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소설이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다. [10] 연세대학교 건축학과는 자퇴했다. 이미 카니발 인터뷰를 하던 1997년에 복학할 생각이 없었다고 밝힌 바 있었으니. [11] 베란다 프로젝트때 낸 '기필코'라는 곡에 "왜 난 천재과가 아닌 걸까"라며 말도 안되는 한탄을 하는 가사가 있는데, 이 버클리 음대 시절을 떠올리며 적은 가사인듯 하다. [12] 케빈 캐스카는 영화음악 작곡가 한스짐머의 오케스트레이션 담당 편곡가이다. 한스짐머의 인터스텔라, 라이언킹 사운드트렉에도 참여함. [13] https://www.imdb.com/name/nm1870068/ [14] 당시 이적이 이 노래를 먼저 듣고 이 노래는 안 뜰거 같다면서 다른 곡을 타이틀로 하자고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대박이 나서 이적도 놀랐다고 한다. [15] 1997년 4월 7일부터 11월 2일까지 진행했던 KBS FM '김동률의 FM인기가요' 이후 약 8년 만의 복귀였다. [16] 정확히는 2008년 상반기 최다 판매 앨범이다. 2008년 한 해 최다판매 앨범은 MIROTIC. [17] 해당 방송 36분 부터 [18] 해당 방송 55분 부터 [19] 종전에는 이 앨범이 정규 6집이냐 아니냐에 대해서 꽤 의견이 분분했으나, 최종적으로 2014년, 정규 7집이 아닌 정규 6집이 나왔으므로 정규앨범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20] 당시 음악도시가 부활한 지 반 년도 안 된 때였다. [21] 유희열의 매니저이자 안테나 뮤직 대표 [22] 정확히 1993년으로 꼽으면 21년이긴 하겠으나. [23] 참고로, 김동률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이 공연이나 6집 앨범이 데뷔 20주년을 기념하는 것은 아니라고 못박았다. [24] 라푼젤의 I See the Light과 살짝 비슷하다는 의견도 있다. [25] 실제로 가사 중에 '뭔가 울컥'이라는 글처럼 곡의 가사를 보고 공감되어 울컥하였다는 리스너들, 특히 청년과 장년의 직장인과 주부들의 댓글들이 종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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