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민 金慶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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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출생 | 1955년 9월 24일 ([age(1955-09-24)]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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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신 안동 김씨 (新 安東 金氏)[1] |
부모 |
아버지
김두한 어머니 김부미 |
형제 |
친누나 김영채 친동생 김현성 이복누나 김을동 이복동생 김주택, 김범상 |
학력 | 영락고등학교 (졸업) |
직업 | 정치인, 사회운동가, 언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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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정당인. 재선 국회의원을 지낸 김두한의 장남이며, 역시 재선 국회의원을 지낸 김을동의 이복동생이다.2. 생애
1955년 9월 28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에서 당시 제3대 국회의원을 지내던 아버지 김두한과 어머니 김부미(金富美)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이후 민족정신선양회 회장, 대한독립유공자 유족중앙회 총무부장을 지냈으며, 1986년 7월 후지오 마사유키(藤尾正行) 당시 일본 문부대신이 " 합방이 없었더라도 청나라, 러시아 또는 후일의 소련이 한반도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 보증이 없으므로 (조선에 대한 일제 강점을) 일본의 침략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망언을 하자 #, 이에 대(對) 일본역사왜곡 시정촉구투쟁위원회 대변인으로서 후지오 대신의 망언을 규탄하기도 했다.
한때 한국국민당에서 청년분과위원회 부위원장 및 종로구·중구 조직책으로 활동했으며, 당내에서 분당 사태가 일어나자 탈당하고 민주노동조합연합회 지도위원, 범야권통합추진위원회 집행부 부위원장을 지냈다.
그 밖에 민주화추진협의회 자유언론 특별위원, 5.18 광주사태 진상규명 실행위원장, 박종철· 이한열 외 21명 합동추모제 집행위원장 등을 지내면서 민주화 운동가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주의통일한국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이종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1년 일본의 신군국주의를 경계하는 한국인연맹 위원장을 지냈으며, 당시 가이후 도시키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이 방한하려할 때 반대 시위를 열어 할복 시도를 하기도 했다.
1992년 신정치개혁당이 창당되자 입당하여 청년분과 위원장 및 대일문제 특별분과 위원장, 마포구 갑 지구당 위원장을 지냈으며 대한독립유공자 유족중앙회 상임이사를 지냈다. 같은 해 치러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정치개혁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자유당 박명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자유민주연합 소속이 되어 상임고문을 지냈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88 |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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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3표 (0.55%) | 낙선 (5위) |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마포구 갑) |
[[신정치개혁당| |
5,137표 (5.34%) | 낙선 (4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