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3 16:23:38

기욤 베르트랑

성명 기욤 베르트랑
Guillaume Bertrand
생몰년도 미상 ~ 1356년 5월 19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브릭퀘벡
사망지 프랑스 왕국 브릭퀘벡
아버지 로베르 7세 베르트랑 드 브릭퀘벡
어머니 필리파 드 크레르몽네슬
형제 로베르 8세 베르트랑 드 브릭퀘벡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프랑스 왕국의 주교.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항쟁했다.

2. 생애

1273년경 프랑스 왕국 브릭퀘벡에서 브리퀘벡 자작 로베르 7세 베르트랑 드 브릭퀘벡과 필리파 드 클레르몽네슬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브리퀘벡 자작이자 프랑스 원수를 맡았던 로베르 8세 베르트랑 드 브릭퀘벡이 있었다. 일찍이 성직자의 길에 들어선 그는 보베, 쿠탕스, 오를레앙, 리지외, 파리 대성당의 정경을 맡았으며, 1328년 리옹 지방 정부의 재무관을 맡았다. 또한 프랑스 국왕 샤를 4세의 왕비인 룩셈부르크의 마리의 궁정에서 일했으며, 1328년부터 1331년까지 마리의 고해사제를 맡았다.

1331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 의해 누아용 주교가 되었고, 1338년 7월에는 바이외 주교를 맡았다. 1346년 7월 11일 노르망디에 상륙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12,000 ~ 15,000명 가량의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 북서부의 문화, 정치, 종교 및 금융 중심지인 으로 쳐들어오자, 그는 300명의 군인과 함께 캉 시 북쪽의 성채를 지켰다. 잉글랜드군은 7월 26일 캉에 도착한 뒤 방비가 되지 않은 구시가지를 점령한 후 요새를 봉쇄하기 위해 소규모 병력을 파견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이 1차 캉 공방전을 치른 끝에 캉의 신시가지를 마저 점령하고 주민 5,000명을 학살했다. 하지만 기욤은 끝까지 버텼고, 잉글랜드 주력군이 파리로 진군하자 형제 로베르 8세와 함께 수비대를 이끌고 출진해 캉 시에 주둔하고 있던 소규모 잉글랜드군을 격파했다.

1347년 보베 주교로 선임되었고, 1351년 8월 왕실 평의회 의원에 선임되었다. 1353년과 1354년에 잉글랜드와의 협상에 참여했다. 1356년 5월 19일에 브릭퀘벡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