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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틀리 왕국 13대 군주 გიორგი | 기오르기 1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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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기오르기 11세 |
조지아어 | გიორგი | |
라틴어 | George XI | |
가족 |
바크탕 5세(아버지) 로담 카플라니쉬빌리-오르벨리아니(어머니) 아르칠리(형) 레반(동생) 알렉산드레(동생) 루아르사브(동생) 솔로몬(동생) 아누카(누이) 타마르(누이) 엘레니(누이) 타마르(첫째 아내) 호라산(둘째 아내) 바그라트(장남) 마리암(장녀) 로담(차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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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년도 | 1651년 ~ 1709년 | |
재위 기간 |
1676년 ~ 1688년(1차 재위) 1703년 ~ 1709년(2차 재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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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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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르틀리 왕국 13대 군주이다.2. 생애
카르틀리 왕국 12대 군주 바크탕 5세와 로담 카플라니쉬빌리-오르벨리아니의 장남이다. 형으로 아르칠리, 동생으로 레반, 알렉산드레, 루아르사브, 솔로몬이 있었고, 누이로 아누카, 타마르, 엘레니가 있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구르긴 칸(Gurgin Khan)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675년 사파비 제국의 솔레이만 샤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은 바크탕 5세는 그를 대리 통치자로 임명하고 아스파한으로 향하던 중 간자의 코스카로에서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사망했다. 그 후 솔레이만 샤는 그를 불렀고, 그는 동생 레반을 카르틀리의 총독으로 남겼다.솔레이먄 샤는 처음에 그를 카르틀리의 왕위에 앉히는 걸 거부하고 테이무라즈 1세의 손자 헤라클리오스 1세를 왕위에 앉히려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의 형 아르칠리는 카르틀리로 이동한 뒤 현지 총독에게 자신을 카르틀리 왕으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솔레이만 샤는 현지 총독의 보고를 받고 마음을 바꿔 그가 왕위에 오르는 걸 승인하고 큰 선물을 안겨서 트빌리시로 돌려보냈다. 1676년 트빌리시에 도착한 그는 즉위식을 거행했다. 솔레이만 샤는 그에게 아르칠리를 체포해 이란으로 보내거나 추방하라고 요구했고, 그는 아르칠리를 이메레티 왕국으로 망명시켰다. 이후 동생 루아르사브를 인질로 보내라는 샤한샤의 요구도 받아들여야 했다.
1678년, 그는 아르칠리를 후원하여 이메레티 왕국으로 진군해 바그라트 5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게 했다. 얼마 후, 시할리 칸이 솔레이만 샤에게 그가 반역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고발했다. 이메레티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아르칠리를 도우면서 오스만 제국과 이란의 전쟁을 부추킬 거라는 것이었다. 1679년, 솔레이만 샤는 아지 알리 칸을 트빌리시로 보내 실상을 알아보게 하는 한편, 그에게 아르칠리를 이란으로 보내거나 추방하라고 재차 요구했다. 그는 아르칠리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아르칠리는 드발레티로 도망쳤다. 그는 샤한샤에게 아르칠리를 추방했다고 알렸지만, 솔레이만 샤는 만족하지 않고 아르칠리를 드발레티에서 추방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형제 레반과 기비 아밀라코르를 아르칠리에게 보내 이 사실을 알렸고, 아르칠리는 러시아로 망명해야 했다.
그는 아르칠리를 이메레티 왕으로 세우려던 계획을 접고 바그라트 5세의 아들이며 1678년 이메레티 왕국을 공략했을 때 인질로 잡아갔던 알렉산드레 4세를 이메레티 왕으로 내세우기로 했다. 그는 아할치헤의 유수프 파샤에게 서신을 보내 알렉산드레 4세를 이메레티 왕위에 앉히라고 제안했다. 아할치헤 파샤는 메흐메트 4세에게 보고했고, 메흐메트 4세는 동의했다. 오스만 제국의 동의를 받아낸 그는 1682년 알렉산드레 4세를 아할치헤로 보냈다. 유수프 파샤는 1683년 알렉산드레 4세와 함께 이메레티로 진군했다. 이메레티 귀족들은 곧바로 알렉산드레 4세에게 귀순했고, 이메레티 왕 기오르기 4세는 구리아로 도피했다. 알렉산드레 4세는 그에게 딸 마리암과 결혼하게 해달라고 청했지만, 그는 마리암을 다비트 에리스타비와 약혼시켰기 때문에 거부했다. 알렉산드레 4세는 다시 그의 형제 루아르사브의 딸 엘레나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신통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 아직 알렉산드레 4세의 입지가 완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함부로 결혼 동맹을 맺었다가 사달이 날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한편, 솔레이만 샤는 그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걸 원하지 않았고 오스만 제국과 협력할 기미가 보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아지 알리 칸에게 그를 실각시킬 음모를 꾸미라고 지시했다. 아지 알리 칸은 카르틀리 왕국 내에 거주하는 음타와르족을 부추겨서 그에 맞서 봉기하라고 촉구했다. 여기에 솜히티 총독 콰마르 벡은 카르틀리 왕의 모든 행동을 샤한샤에게 고스란히 보고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그는 콰마르 벡을 처형했으며,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기를 거부한 아라그비 공작 야손을 처형했다. 이후 형 아르칠리에게 사절을 보내 조지아로 돌아오라고 요청했다. 샤한샤가 레반을 이란으로 보내라고 지시하자, 레반 대신 외아들 바그라트를 보내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샤한샤는 레반과 바그라트를 둘다 보내라고 요구했다. 샤한샤의 고압적인 태도에 화가 난 그는 이란에 반기를 들기로 마음먹고 카헤티 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카헤티 귀족들이 협력하겠다고 맹세하자, 그는 1688년에 군대를 모아 쿠르쿠타에 집결시키고 카헤티 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토프카라가지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의 삼촌인 타마즈가 도중에 진영을 이탈하여 아그자칼라 요새를 점령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그는 아라그비 공작으로 새로 임명했던 기오르기에게 자신과 함께 하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두셰티를 공략한 그는 아라그비 공작 기오르기에게 재차 합류를 요청했으나 또다시 거절당했다. 한편 솔레이만 샤는 반란 소식에 진노하여 토흐케에 있던 바그라트와 레반 왕자를 체포해 헤라트 감옥에 수감하라고 명령했다. 또다른 왕자 루아르사브는 강제로 이슬람교로 개종한 뒤 케르만으로 보내졌다.
이후 그를 폐위하겠다고 선언한 솔레이만 샤는 14년간 이란에 체류하고 있던 헤라클리오스 1세를 카르틀리의 새 왕으로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헤라클리오스 1세는 이란 분견대와 함께 트빌리시에 입성하여 즉위식을 거행했다.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라차로 후퇴한 뒤 뒤이어 밍그렐리아 공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헤라클리오스는 카르틀리 귀족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에, 트빌리시에 주둔한 대규모 페르시아 수비대에 의존해야 했다. 이후 솔레이만 샤의 요청을 받은 메흐메트 4세가 아할치헤의 유수프 파샤에게 그를 체포해 이란으로 넘기라고 지시했다. 그는 이로 인해 체포된 뒤 아할치헤로 끌려갔다. 이때 헤라클리오스 1세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아쇼탄 무크라바토니, 기비 아밀락호리, 니콜로스 마갈라슈빌리 등 여러 귀족이 아할치헤 파샤에게 뇌물을 주며 그를 이란에 넘기지 말라고 청했고, 아할치헤 파샤는 이 말에 따라 그를 가만히 붙잡아뒀다.
1691년, 그는 아할치헤 파샤의 묵인 아래 지하감옥을 탈출한 뒤 슬레사에 도착하여 가족과 재회했다. 이후 카르틀리로 이동한 그는 여러 귀족과 합세한 뒤 헤라클리오스 1세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헤라클리오스는 트빌리시에서 고립된 채 근근히 버텼다. 트빌리시 마저 공략하려고 맹공격을 퍼부었으나 좀처럼 함락되지 않자 협상을 제안했다. 자신은 카르틀리 왕국을 가질 테니 헤라클리오스는 카헤티 왕국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헤라클리오스는 처음에는 이 제안을 고려했지만, 사파비 제국이 원군을 보냈다는 소식을 듣자 협상을 중단했다. 그는 카르틀리 서부로 후퇴했고, 헤라클리오스는 티아네티 전역을 장악했다. 이후 양자는 3년간 장기전을 벌였으나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1695년, 사파비 제국은 새 카헤티 총독 칼바니 칸의 지휘 하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해 헤라클리오스를 도왔다. 이에 카르틀리 인들이 승산이 없다고 보고 흩어지자, 그는 이메레티로 망명했다가 1696년 패배를 인정하고 이스파한으로 이동해 사파비 제국의 새 군주 술탄 호세인에게 귀순했다.
1697년 3월 5일 이스파한에 도착한 그는 케르만 지사로 임명되어 1699년부터 1704년까지 케르만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 케르만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술탄 호세인은 반란을 진압해 준다면 카르틀리 왕위를 그에게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이고 동생 레반을 조지아인으로 구성된 분견대 지휘관으로 삼고 케르만으로 보냈다. 레반은 반란을 일으킨 루트바르 부족과 발록 부족을 물리쳤으며, 강도 무리를 3차례 물리치고 수괴의 머리를 샤한샤에게 보냈다. 이후 그는 또다른 조지아군을 이끌고 케르만으로 진군해 반란군을 섬멸하고 수많은 수급을 샤한샤에게 보냈다. 이에 흡족한 술탄 호세인은 그에게 수많은 선물을 보냈고, 레반을 이란의 최고 판사로, 카이호스로를 이스파한의 도시 총독으로 임명했다. 1703년, 호세인은 그를 카르틀리 왕으로 복위시키고 헤라클리오스를 카헤티 왕으로 이전시켰다. 그러나 카르틀리로 돌아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고 대신 레반을 카르틀리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 반란군을 토벌하는 데 힘을 보태달라는 샤한샤의 요청에 따라 동생 레반과 함께 아프가니스탄으로 진군해 반란 진압에 기여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체포하여 이스파한으로 보낸 미르와이스 칸이 술탄 호세인의 환심을 사고 그에게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호세인은 그가 반란을 꾸밀 지도 모른다는 미르와이스 칸의 참소에 넘어갔고, 미르와이스 칸이 그를 암살하는 걸 용인했다. 1709년 4월 21일, 그를 따르는 부하들이 조카 카이호스로의 지휘하에 칸다하르를 떠나 반란군 토벌에 나선 사이, 미르와이스는 그를 자신의 시골 영지에서 열린 연회에 초대한 뒤 암살했다. 미르와이스 칸은 칸다하르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그의 유품을 십자가와 시편과 함께 이스파한에 보내 반역을 꾀한 증거로 삼았다. 그 후 조카 카이호스로가 이끄는 조지아군은 1711년 10월 아프가니스탄 반란군에게 괴멸되었다. 한편 카르틀리 왕위는 그의 조카인 카이호스로에게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