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896년 일본에서 건너온 노리마쓰 마사야쓰(乗松雅休 1863-1921) 선교사가 한국에서 시작한 교회.2. 일본 및 조선 선교
플리머스 형제운동은 영국에서 북아메리카로 오세아니아, 아시아까지 선교지역을 확장하면서 일본과 조선까지 미치게 되었다. 일본에는 허버트 브랜드(Herbert Brand) 형제가 자비량 선교를 하고 있었다. 그는 1884년 캠브리지 대학교(Cambridge University) 시절, 영국 성공회(Anglican Church)에 회의를 느껴 형제 모임에 와서 해외선교를 생각하던 중 일본이 떠올라 1888년 일본에 와서 자비량으로 일본 선교를 하기 시작했다.허버트 브랜드(Herbert Brand) 형제가 일본에서 복음전도를 하던 중에 니혼바시교회 신학생이었던 노리마츠 마사야스(승송아휴) 형제를 만났다. 노리마츠 마사야스 형제는 허버트 브랜드 형제의 설명을 들으며, 카톨릭 교회와는 다른, 빵과 포도주의 2종 성찬, 독특한 구원관, 칭의교리,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성인세례 교리 등에 매료되어,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일본 기독교단 니혼바시 교회를 떠나 브랜드 형제를 따라 일본 형제모임에 들어왔다.
1896년 노리마츠 준목이 명치학원 신학교를 졸업한 후 앞날의 진로를 생각하면서 기도하던 중, 일본인에 의한 명성왕후 시해와 러일전쟁으로 피해가 겹친 조선인들의 참혹한 상황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좌고우면 하지 않고 혈혈단신으로 1896년 12월 23일 배를 이용해서 인천에 도착하여 조선 선교를 시작했다.
이때 조선에는 벌써 미국의 감리교회와 장로교회의 지원을 받고 파송된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들이 한국포교에 대한 고종황제의 윤허를 얻어, 왕실을 중심으로 조선 전도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노리마츠 형제는 후원자라곤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돕는 사람 하나 없이 조선 선교를 시작했다. 그는 조선에 도착한 다음 해인 1897년 1월 4일 경성부(서울) 중구 명동 진고개 영락정에 자리 잡고 한글 공부부터 시작했다. 노리마츠 형제의 한글교사로 교제를 시작한 조덕환 형제가 노리마츠 형제의 선교 열매 제 1호이다. 그해(1897년) 11월 14일, 경성부 중구 명동 진고개 집회에서 조덕환, 신태일, 윤태훈 등 조선인 형제들이 모여 떡을 떼고 잔을 받는 성만찬 예배를 드림으로써 조선 최초의 형제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그날 신태일, 윤태훈은 침례를 받았다.
허버트 브랜드 형제는 1898년에 조선에 와서 노리마츠 형제와 합류하여 조선 전도 협력자가 되어 조선주재 영국 공사관 직원들과 공사관 한국인 직원들과 공사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이들 두 외국인 선교사들은 주일예배 때 성만찬 집회와 건덕회를 통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증언을 하고 기도 후에 친교를 가졌다. 주중엔 화요일 저녁 기도회, 목요일 저녁 성경공부, 그리고 거의 매일 낮시간에는 조선인 형제자매들과 함께 서울의 거리에서 노방전도를 하면서 한국어 실습과 전도를 병행했다.
러일전쟁이 일어난 해 1904년 12월 3일에 정세불안으로 인해 허버트 브랜드 형제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조선인 최초로 침례를 받은 윤태훈 형제가 침례 받은 감격을 찬송 가사로 작사 것이 최초의 조선인 집회 찬송이었다. 이것이 바로 '기독동신회 모임찬송 제 48장'이다.
-
구주 믿고 자녀 되니 기쁨이 한량 없네
보기에는 빈궁하나 실상은 부유하다 -
이 세상에 바랄 것이 내게는 하나 없네
즐겁고도 기쁜 마음 장래를 바람일세 -
이런 은혜 생각하면 믿는 마음 굳게 되리
환란풍파 모든 것은 믿음 연단함일세 -
믿고 믿고 더욱 믿어 풍파 중에 더 믿세
주가 나타나실 때 말씀대로 다 되리
3. 기독동신회의 전도자들
한국 형제모임의 조선 전도는 만주 지족촌과 황해도 흑교리에서부터 남도 목포의 영화농장까지 활발하게 전개 되었다. 그러는 사이 조선에는 경술국치의 비운과 일본의 혹심한 기독교 핍박과 신사참배 강요가 조선반도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나 전국 각처에 세워진 한국 형제모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불타는 열정을 가진 조선과 일본의 자비량 전도인들에 의해 전도가 전성기를 이루었다.그 중에 유일한 유급 전도인이 있었는데, 장로교 전도사 출신인 김태희 형제다. 그는 한반도 전역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면서 전국 곳곳에 형제모임 집회를 만들었다. 그가 집필하고 출판한 문서전도 매체는 <복음신보>이다. 복음신보는 1917년 창간해서 1940년 일제의 기독교 탄압으로 폐간될 때까지 77호를 김태희 형제가 직접 집필 발간했다. 복음신보가 전도용 문서로 큰 영향력을 발휘한 증거는 당시 복음신보 구독자가 1,000명을 훨씬 넘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활발하게 23년여 동안 조선 전역을 전도하던 김태희 형제는 조선 해방을 한 달 앞 둔 1945년 7월 10일 전염병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김태희 형제는 한국형제 모임의 지평을 넓힌 열정적인 전도자였다. 그는 또한 지필묵에도 당대의 명성을 떨치던 한학자 서예가이기도 했다.
김태희 형제의 뒤를 이어 등판한 한국 형제모임의 지도자급 복음전도자는 자비량 전도자였던 원경선 형제다. 그는 1917년 평남 중화군 출생으로 20세 때, 고향에서 전도자 김태희 형제를 만나 복음의 열정을 전수 받았다. 그는 1935년 서울에 와서 형제모임에 참석하여 김태희, 지상태, 이원순 등의 형제들과 친교하면서 전도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원래 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기에 감리교 신학을 공부하여 감리교 전도자가 되려고 했으나 김태희 형제의 전도를 받아 형제모임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그에게는 상당한 위험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그 당시에도 감리교단은 큰 교단이라 신학만 공부하면 전도의 길이 체계적으로 열리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제모임은 새로운 개신교 종파로써 모든 것을 처음부터 개척해야 하는 터라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오직 성서에만 의지하고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보다 유익하다고 판단한 원경선 형제는 자급전도의 길을 굳게 결심하고 서울 낙원동 형제모임 집회에 합류했다. 그 모임에서 원경선 형제는 배화여고 출신의 지명희 자매와 혼인한 후 1953년부터 자급전도의 길을 걷기 시작해서 2013년 1월 8일 세상 떠날 때까지 오직 한 길, 정직하게 믿고 믿는대로 살면서 받은 만큼 나누는 일을 실천하는 외길만 걸어가다 세상 떠났다.
4. 6.25 전쟁 이후의 한국 전도
1900년 8월 9일, 노리마츠 형제의 가족들(부인 쓰네꼬, 아들 요시노부)이 경기도 수원으로 전도 사역지를 옮겨갔다. 경성부 명동 진고개의 서울모임은 노방전도, 화요기도회, 성서연구 모임을 가졌으며, 주일엔 성만찬 모임과 건덕회로 모이면서 친교가 확장 되었다. 그러던 중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정전 후 수많은 미국인 선교사들이 폐허가 된 한국에 들어와 복음 전파와 함께 구제 활동을 활발히 행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민간인 구호단체들도 많이 활동했다.한국은 전쟁 후유증으로 심각해진 가난과 거리에 넘쳐나는 상이군경과 전쟁 고아들, 그리고 파괴된 국토의 산업시설들 등 이런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당면한 가장 큰 숙제였다. 한국의 전쟁복구를 위해 세계 각국에서 원조 물자와 인력을 파송했는데, 그 가운데 미국의 형제모임도 토목기술자를 한국에 파송해 한국 재건을 돕게 했다. 그가 바로 맥카피(Brother Wilber T. McAfee) 형제다. 그는 기독교 사립학교인 경남 거창고등학교에서 교사신축 공사에서 토목공사를 도우면서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1960년 맥카피 형제는 전영창 교장이 있던 거창고등학교에서 나와 독자적으로 거창읍 장팔리에 교회와 농장을 개척해서 다른 길을 갔으며, 2009년 캐나다에서 세상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당시 한국에는 일본과 한국에서 선교하고 있던 허버트 브랜드와 노리마츠 형제 등이 함께하는 한국기독동신회가 있었고, 미국인 리쳐드 요크(Richard York), 영국인 에드윈 제임스(Edwin A. James), 윌버 맥카피(Wilbur T. McAfee) 등이 원경선 형제와 함께 서울 종로구 낙원동 성서강당에서 주일 만찬예배와 건덕회로 모였다. 이 모임에 가끔 거창고 전영창 교장이 건덕회 말씀증언과 친교에 참석하곤 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원경선 형제 중심의 한국 기독동신회 형제들과 미국 형제모임에서 파송받은 형제들의 교리인 문자주의와 구원받은 날짜 자체를 강조하는 그들의 경향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점점 갈등의 골이 깊어져 갔다. 그러던 중 결국 1960년 여름 어느 주일 오후에 교인총회를 열어, 투표를 통해 미국 형제모임 파송 선교사들과 그들을 추종 한국인 형제들이 한국 형제모임에서 분리 되어 나갔다. 분리되어 나간 한국인 형제들과 미국인 선교사들이 노량진 모임이 된 유래이다.
이들과는 신앙의 결이 완전히 다른 원경선 형제와 전영창 교장은 어떤 특수한 교단의 교리나 예전에 얽매이지 않고, 진실하고 솔직하게 믿고, 믿는 대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원경선 형제가 부천군 오정면 도당리에서 형편이 어려운 형제자매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같은 동네 젊은이가 중병에 걸려 대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수술비가 없어 난감하다는 소식 듣고 공동체 식구들 모임에서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려면, 우리가 기르는 소 한 마리 팔아서 수술비 지불하게 해야죠!"하며 서슴지 않고 실천했다.
전영창 교장은 1960~1970년대 거창고등학교를 운영하면서 학교 서무과에서 교사 구인 광고비와 서울 출장비를 받아 서울로 향하는 출장길에 올라 대전시 대전대학에서부터 졸업생들을 찾아보기 시작해서 서울 등촌동 그리스도대학, 흑석동의 중앙대학교, 봉천동의 서울대학교, 용산의 숙명여자대학교, 신촌의 연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종로의 서울대 문리대, 안암동의 고려대학교, 그리고 태릉의 육군사관학교와 서울대 공대를 차례대로 순방하면서 동아일보에 지불할 교사모집 광고비를 다 쓰고 완전히 빈털터리가 된 상태로 중구 회현동 소재 자현여관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그 다음 날부터 직장에 다니는 졸업생들에게 전화해 자현여관으로 불러 광고비를 충당했다고 한다.
한국 기독동신회의 역사는 조덕환, 김태희 형제들이 한국 형제모임의 지리적 지평을 넓혔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원경선 형제가 전도 사역의 스펙트럼을 진보적으로 확장했다. 원경선 형제의 근원적인 개혁신앙은 플리머스 형제운동(Plymouth Brethren Assembly) 또는 근본(문자)주의 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만 합당하다면 교리나 종파의 벽을 거침없이 넘어 친교하고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다. 그들(전영창, 원경선)의 전도사역과 교육의 지향점은 시대를 따라 물 흐르듯 넉넉하고 유연했지만, 성서이해와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신앙생활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살았다.
현재 기독동신회에는 서울중앙교회, 기독동신회 현방교회, 수원동신교회 등의 회원교회가 있고, 강원도 홍천군에 신위균기념수양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