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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슬라블예비치 왕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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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제 보디노비치 | 그루베샤 | 그라디냐 | 라도슬라프 그라디슈니치 | 미하일로 3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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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0522D><colcolor=#fff> 두클랴 국왕 {{{#fff {{{+1 그루베사}}} }}} {{{#fff Грубеш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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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사망 | 1125년 |
재위 | 두클랴 국왕 |
1118년 ~ 1125년 | |
아버지 | 라도슬라프 |
형제 | 브라니슬라프, 고지슬라프, 프레디흐나, 드라기냐, 드라길로, 그라디냐 |
가문 | 보이슬라블예비치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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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클랴 제8대 국왕. 동로마 제국의 지원으로 도르제 보디노비치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지만, 도르제가 반격하면서 전사했다.2. 생애
두클랴 3대 크냐지 스테판 보이슬라프의 아들이자 두클랴 초대 국왕 미하일로 1세의 형제이며, 트라부니야와 자후믈례의 통치자인 라도슬라프의 아들이다. 형제로 브라니슬라프, 고지슬라프, 프레디흐나, 드라기냐, 드라길로, 그라디냐가 있었다. 1090년경, 미하일로 1세의 아들이자 두클랴 2대 국왕 콘스탄틴 보딘은 아내 자퀸타 브린스카의 선동에 따라 슈코더르에 있던 자신을 방문한 브라니슬라프, 고지슬라프, 프레디흐나를 체포했다. 이에 그루베사는 나머지 형제와 함께 라구사 공화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보딘의 군대가 라구사를 포위했지만 쉽사리 공략하지 못했다.그러던 중 자기가 총애하는 신하가 전사한 것에 격분한 자퀸타는 남편을 설득해 브라니슬라프, 고지슬라프, 프레디흐나를 성벽 앞에서 참수하도록 했다. 그러자 라구사 성벽 내부에서 동요가 일어났고, 일부 수비대는 항복하는 걸 진지하게 고려했다. 라구사에 망명했던 보딘의 친척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스플리트로 망명했다가 다시 아퀼레리아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배를 갈아타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다. 1099년 보딘이 사망한 뒤 보딘의 장남 미하일로 2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퀸타에게 반감을 품은 무리가 얼마 안가 콘스탄틴 보딘의 이복형제인 도브로슬라프를 앞세워 반란을 일으켜 미하일로 2세를 타도한 뒤 도브로슬라프를 새 국왕으로 옹립했다. 그는 이후에 두클랴로 돌아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1113년, 자퀸타가 차남 도르제 보디노비치를 옹립하기 위해 두클랴 6대 국왕 블라디미르를 독살했다. 자퀸타는 지난날 장남 미하일로 2세를 폐위한 전력이 있었으며, 도르제 보디노비치가 왕위에 오르는 데 방해가 될 잠재적 경쟁자인 도브로슬라프 마저 체포해 감옥에 집어넣고 거세하고 실명형에 처한 뒤 슈코더르의 성 페타르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 후 왕위에 오른 도르제는 잠재적인 왕위 경쟁자들을 모조리 제거하기 위해 친척들을 모조리 제거하려 했다. 이에 그루베사, 드라기냐, 드라길로는 아드리아해 연안의 해안도시이자 동로마 제국의 요충지인 디라히온으로 피신해 그곳에서 망명 생활하던 삼촌 고지슬라프의 집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루베사는 도중에 체포되어 스칸다르에 감금되었다.
1118년,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2세는 칼로얀 쿠만에게 군대를 맡겨 고지슬라프와 함께 두클랴를 침공하게 했다. 도르제는 이들과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여 대다수 병력을 잃고 일부 측근만 데리고 라쉬카로 탈출했다. 그 후 동로마군은 스칸다르에 수감되었던 그루베사를 풀어준 뒤 두클랴의 왕으로 세웠다. 한편, 도르제의 어머니 자퀸타는 동로마군에 체포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된 후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렇게 왕위에 오른 그루베샤는 7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1125년, 도르제는 세르비아 대공 우로시 1세의 지원을 받으며 두클랴로 진군해 바르 전투에서 그루베사를 전사시키고 두클랴 국왕에 복위했다. 그루베사의 유해는 바르 주교령의 성 페터로 교회에 안장되었다.